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에는 '월성양동마을(月城良洞마을)'이었으나, "경주(慶州)"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명칭임에 반해 "월성(月城)"은 한 때의 행정편의에 따라 한시적으로 쓰였던 행정구역 명칭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명칭을 변경(2009. 2.16)하였다. ( 자료 : 문화재청 )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에는 '월성양동마을(月城良洞마을)'이었으나, "경주(慶州)"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명칭임에 반해 "월성(月城)"은 한 때의 행정편의에 따라 한시적으로 쓰였던 행정구역 명칭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명칭을 변경(2009. 2.16)하였다. ( 자료 : 문화재청 )
양동(良洞)마을은 경주(慶州)에서 형산강(兄山江) 줄기를 따라 동북(東北) 포항(浦項)쪽으로 40리(里)를 들어가서 위치하는 마을이다. 지리적으로 기록할만한 것은 이 형산강 줄기와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동해북부선 철도, 그리고 광활한 안강평야(安康平野)와 경주와 포항이 모두 40리쯤의 거리라는 것, 서쪽으로는 60리쯤 영천(永川)을 지나 대구(大邱)로 연결된다는 것 등이다. 옛날에는 형산강의 물도 깊어서 선박이 일상 내왕(來往)했으므로 수운편(水運便)도 좋은 편이고 해산물의 교역도 쉽게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마을 자체는 안강평야에 임(臨)한 셈이나 서향한 좁은 골안에 다시 남향해서 물자형(勿字形)으로 이루어진 산골의 산등성이나 골에 집들이 산재해 있다. 그 가옥들 중에는 전국에서도 보기드물만큼 다수의 가옥이 규모를 갖춘 와즙반가(瓦葺班家)들이며 그 집단부락인 점에 큰 특색이 있다 하겠다. 그 반가들은 모두 산등성이나 중허리에 터를 잡았고 산에는 샘이 귀하여 식수는 거의 모두가 산하(山下)에서 길어 올려다가 사용한다는 점도 이 마을의 특색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옛날에는 넓은 안강평야의 옥답(玉沓)들이 대략 양동반가(良洞班家)들의 소유였다고 하거니와 양동은 구신분제도 사회에서 많은 소작인과 하인들을 거느린 양반들이 세거(世居)하기에 알맞는 마을이었다고 하겠다. 양동의 반촌적(班村的) 구성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문벌(兩大門閥)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양성(兩姓)의 동족집단부락(同族集團部落)인 셈이다. 먼저 입향(入鄕)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였으나 지금은 이씨 호구(戶口)가 훨씬 많게 되었으며 양문중간에는 상호통혼(相互通婚)과 협동으로 인척관계 등 친목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마을의 식자(識者)들은 넓은 평야에 임한 이곳 물자형 산곡(山谷)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물줄기를 서남간방(西南間方)의 역수(逆水)로 맞는 지형이어서 이 역수는 이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역수지부(逆水之富)의 상징이 일차적으로는 안강평야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마을이 손 ·이 양성의 반촌으로 형성되어온 과정에 대한 특수한 비유로서 “외손의 마을 ”이란 관념이 있다. 마을형성 초창기인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손소에서 이번(李蕃)으로 면면히 외손쪽으로 이어져 내려온데서 이루어진 관념이다. 다른 일설(一說)에 의하면 이미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이마을에 처음 들어와 5∼6호의 소촌을 형성하여 “양좌촌(良佐村) ”이라 불렀었다고 하나 이 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 자료는 없는 것 같다.
가장 근거가 확실한 근세 입향조는 아무래도 양민공손소(襄敏公孫昭)(1433년∼1484년, 참의사성(參義士晟)의 자(子), 세조(世祖)5년식년문과(年式年文科), 내섬사정(內贍寺正), 공조참의(工曹參議), 안동부사 (安東府使), 진주목사(晋州牧使), 적개절신이등(敵愾切臣二等), 계천군(鷄川君))로 꼽히고 있다. 그는 1467년 길주(吉州) 이시애난(李施愛亂) 평정(平定)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고, 그 때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그린 영정(影幀)이 지금 종손(宗孫) 손동만씨가의 가묘(家廟)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손동만씨는 그 19대종손이다. 양민공은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손씨 입향조가 되었으며 지금의 월성손씨 종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유씨는 무후(無後)하여 절손(絶孫)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향(祭享),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양민공의 여(女)는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해서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그 장자(長子)가 회재(晦齋) 이언적(1491년∼1553, 자복고(字復古), 호 회재(晦齋) 자계옹 (紫溪翁), 생원(生員) 번의 자, 중종(中宗)9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좌찬성(左贊成))이다. 그는 외가인 양민공댁(지금 서백당(書百堂) 손동만씨 가옥)에서 탄생하였으며 손우재(孫愚齋)에 이은 그의 출생은 후일 서백당의 명현출생(名賢出生) 계승설(繼承說)을 낳게 하였다고 한다. 손·이 양씨의 상호관계는 이렇게 맺어지고 계속되었다. 회재는 10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고 12세부터는 외숙(外叔)인 손중돈(孫仲暾)(1463년∼1529년, 자 대발(大發), 호 우재(愚齋), 소(昭)의 자, 김종직문인(金宗直門人), 14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양산군수(梁山郡守), 상주목사(尙州牧使), 우참찬(右參贊), 청백리(淸白吏))에게 훈도를 받게 되고 우재(愚齋)의 전관임지(轉官任地)(양산(梁山), 상주(尙州), 김해(金海) 등)로 따라다니면서 수학했으며 24세에는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게되고 후일 대학자(大學者)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회재와 외숙과의 수학관계를 두고 소위 학문연원수수설(學問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고 한다.
손씨측의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로 전수되었다”는 설과 이씨측의 그렇지 않다는 설이 상반되기에 이르고 이러한 학문에 관한 시비가 양 문중간의 갈등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양성 집단간의 뼈대있는 반촌(班村)이 지니는 한 특수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어쨌든 소년시절부터 외숙의 깊은 영향을 받았을 회재가 후일 대성하여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일인으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된 것은 양동마을의 긍지이기도 하였으려니와 학문연원수수설을 통한 양문중간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고 하겠다. 지금 이 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종손인 이인식옹(李仁植翁)은 회재로부터 15대손이다. 이러한 양동의 양성관계는 이제 과거의 일로 되었으나 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으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되었었다고 한다.
손 ·이 양씨의 호구(戶口)관계는 1973년에 손씨 28호, 이씨 88호였고 1979년에는 손씨 16호, 이씨 80호로 양쪽이 모두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특히 손씨들의 감소율은 현저하다. 그러나 원래 손씨들이 양동에서는 소수이지만 인근의 인동(仁洞), 강동면(江東面), 월성군(月城郡)으로 넓혀 전체로 본다면 이씨들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전반적인 감소추세는 시대의 급격한 산업화로 젋은이들을 중심으로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진출함에 따라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촌내(村內)에 있어서의 전통적, 양 문중간, 친족간의 협동 ·유대(紐帶)관계도 점차 마을생활에서 퇴조되어가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상조계(相助契)는 손 ·이 ·타성(他姓)받이의 각기 문중이나 또는 파손별(派孫別)로 행하여지고 있는데 그 중요도에 따른 순위는 상례(喪禮), 혼례(婚禮), 제례(祭禮), 회갑, 생일, 돌, 백일 등으로 순위를 나타내고 있다. 또 손 ·이 양씨의 각기 계조직은 가까운 경주, 포항, 대구에서부터 멀리는 부산, 서울 등 전국적으로 확대된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러한 확산은 양동마을 인구감소와 함께 도시진출과 비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동마을이 반촌으로 이름이 있는 것은 마을이 잔존가옥과 지형적 경관뿐 아니라 오히려 유가적(儒家的) 사상과 관습을 강하게 지녀온 데에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양동마을에는 마을의 일반적 전승으로서의 동제(洞祭)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며 세시행사(歲時行事)로서도 여름 삼복후(三伏後)의 머슴놀이인 호미씻기, 2∼3년에 한번씩 있었던 정월보름, 추석 때의 줄다리기 등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양동마을의 큰집들은 모두가 손 ·이씨들의 종가, 파종가들이고 특히 이씨들은 파손(派孫)이 여러 갈래이고 파손마다 정자(亭子)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종손인 무첨당파, 이손(二孫)인 양졸정파(養拙亭派)(영귀정(詠歸亭)), 삼손(三孫) 설천정파(雪川亭派), 사손(四孫) 수졸당파(守拙堂派)(무정자(無亭子)), 오손(五孫)인 오위정파(五衛亭派)(재(在) 영일군(迎日郡)) 등 지손(支孫)들의 파명(派名)에 정자(亭子)를 붙여 부르고 있었으며 모든 파손에 정자가 있었으나 수졸당파만은 정자가 없었다고 한다. 종가, 정자와 함께 재실(齋室), 비각(碑閣), 족보(族譜), 문집(文集), 고문서(古文書), 위토답(位土沓) 등은 이 마을 양반의 권위의 상징으로 되어왔다고 한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큰집들이 30동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종가일수록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는 것도 반가의 배열 법도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산상 반가들은 과거 솔거노비(率居奴婢)의 주거(住居)이던 행랑채를 두거나 또 외거노비(外居奴婢)의 살림집인 가랍집을 주위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개 초가들이었다.
현재 양동마을 내에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모두 15가호(家戶)인데 그중 가장 오랜 예는 손동만씨의 서백당(書百堂)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반가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ㅁ자 외에 대문(大門)앞에 행랑(行廊)채를 둔 예도 있다. 예외적인것으로 ㄱ자나 一자집을 여러동 혼합 배치하는 예도 있으나 내부구조에 있어 공통적으로 영남지방의 특색을 보이는 것은 안방과 부엌의 횡접(橫接)관계, 작은사랑과 안사랑의 구비(具備), 안대청(大廳), 사랑대청의 원주사용(圓柱使用), 지붕합각(合閣)의 처리 등이며 간혹 중부(中部), 서울식인 안방, 부엌의 하접형식(下接形式)이나 동(棟) 배치의 분산 등 예외적인 것도 있다. 지정된 가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손동만씨가옥(孫東滿氏家屋)(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 중요민속자료 제23호)
2. 낙선당(樂善堂)(손영호씨가옥(孫濚鎬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3호)
3. 무첨당(無첨堂)(여강이씨 대종가(驪江李氏 大宗家), 이인식(李仁植), 보물 제411호)
4. 관가정(觀稼亭)(손씨대종중(孫氏大宗中), 보물 제442호)
5. 향단(香壇)(향단파종가(香壇派宗家), 보물 제412호)
6. 심수정(心水亭)(향단파(香壇派), 중요민속자료 제81호)
7. 수운정(水雲亭)(손승익(孫承翼), 중요민속자료 제80호)
8. 수졸당(守拙堂)(이종환(李宗煥), 중요민속자료 제78호)
9. 이향정(二香亭)(이석천(李錫千), 중요민속자료 제79호)
10. 이원용가옥(李源鏞家屋)(중요민속자료 제75호)
11. 이희태가옥(李熙太家屋)(중요민속자료 제77호)
12. 안락정(安樂亭)(손씨종중서당(孫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2호)
13. 이동기가옥(李東琦家屋)(중요민속자료 제76호)
14. 이원봉가옥(李源鳳家屋)(중요민속자료 제74호)
15. 강학당(講學堂)(이씨종중서당(李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이들중 대지내에 가묘(家廟)를 둔 대종가(大宗家), 파종가(派宗家)는 4개소이며 이들이 지니고 있던 가랍집은 해방 무렵에도 40여호(餘戶)나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었거나 혹은 주인이 바뀌어 옛 가랍집이 형체로나마 그대로 잔존하는 것은 몇개소에 불과하다. 한편 이 마을 각 종(宗) ·파손(派孫)들의 정자에서는 하절(夏節)에 칠회(七回)의 놀이를 행하여 왔으며 5월 그믐에 개장되면 보신탕등 각종 음식, 주류를 갖추어 시창(詩唱)으로 양로위안적(養老慰安的) 연유(宴遊)를 벌였다고 한다. 7회(回)는 다음과 같다. 유두(流頭),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 칠석(七夕), 입추(立秋), 처서(處暑). - 자료 : 문화재청
마을 자체는 안강평야에 임(臨)한 셈이나 서향한 좁은 골안에 다시 남향해서 물자형(勿字形)으로 이루어진 산골의 산등성이나 골에 집들이 산재해 있다. 그 가옥들 중에는 전국에서도 보기드물만큼 다수의 가옥이 규모를 갖춘 와즙반가(瓦葺班家)들이며 그 집단부락인 점에 큰 특색이 있다 하겠다. 그 반가들은 모두 산등성이나 중허리에 터를 잡았고 산에는 샘이 귀하여 식수는 거의 모두가 산하(山下)에서 길어 올려다가 사용한다는 점도 이 마을의 특색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옛날에는 넓은 안강평야의 옥답(玉沓)들이 대략 양동반가(良洞班家)들의 소유였다고 하거니와 양동은 구신분제도 사회에서 많은 소작인과 하인들을 거느린 양반들이 세거(世居)하기에 알맞는 마을이었다고 하겠다. 양동의 반촌적(班村的) 구성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문벌(兩大門閥)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양성(兩姓)의 동족집단부락(同族集團部落)인 셈이다. 먼저 입향(入鄕)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였으나 지금은 이씨 호구(戶口)가 훨씬 많게 되었으며 양문중간에는 상호통혼(相互通婚)과 협동으로 인척관계 등 친목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마을의 식자(識者)들은 넓은 평야에 임한 이곳 물자형 산곡(山谷)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물줄기를 서남간방(西南間方)의 역수(逆水)로 맞는 지형이어서 이 역수는 이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역수지부(逆水之富)의 상징이 일차적으로는 안강평야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마을이 손 ·이 양성의 반촌으로 형성되어온 과정에 대한 특수한 비유로서 “외손의 마을 ”이란 관념이 있다. 마을형성 초창기인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손소에서 이번(李蕃)으로 면면히 외손쪽으로 이어져 내려온데서 이루어진 관념이다. 다른 일설(一說)에 의하면 이미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이마을에 처음 들어와 5∼6호의 소촌을 형성하여 “양좌촌(良佐村) ”이라 불렀었다고 하나 이 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 자료는 없는 것 같다.
가장 근거가 확실한 근세 입향조는 아무래도 양민공손소(襄敏公孫昭)(1433년∼1484년, 참의사성(參義士晟)의 자(子), 세조(世祖)5년식년문과(年式年文科), 내섬사정(內贍寺正), 공조참의(工曹參議), 안동부사 (安東府使), 진주목사(晋州牧使), 적개절신이등(敵愾切臣二等), 계천군(鷄川君))로 꼽히고 있다. 그는 1467년 길주(吉州) 이시애난(李施愛亂) 평정(平定)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고, 그 때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그린 영정(影幀)이 지금 종손(宗孫) 손동만씨가의 가묘(家廟)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손동만씨는 그 19대종손이다. 양민공은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손씨 입향조가 되었으며 지금의 월성손씨 종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유씨는 무후(無後)하여 절손(絶孫)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향(祭享),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양민공의 여(女)는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해서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그 장자(長子)가 회재(晦齋) 이언적(1491년∼1553, 자복고(字復古), 호 회재(晦齋) 자계옹 (紫溪翁), 생원(生員) 번의 자, 중종(中宗)9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좌찬성(左贊成))이다. 그는 외가인 양민공댁(지금 서백당(書百堂) 손동만씨 가옥)에서 탄생하였으며 손우재(孫愚齋)에 이은 그의 출생은 후일 서백당의 명현출생(名賢出生) 계승설(繼承說)을 낳게 하였다고 한다. 손·이 양씨의 상호관계는 이렇게 맺어지고 계속되었다. 회재는 10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고 12세부터는 외숙(外叔)인 손중돈(孫仲暾)(1463년∼1529년, 자 대발(大發), 호 우재(愚齋), 소(昭)의 자, 김종직문인(金宗直門人), 14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양산군수(梁山郡守), 상주목사(尙州牧使), 우참찬(右參贊), 청백리(淸白吏))에게 훈도를 받게 되고 우재(愚齋)의 전관임지(轉官任地)(양산(梁山), 상주(尙州), 김해(金海) 등)로 따라다니면서 수학했으며 24세에는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게되고 후일 대학자(大學者)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회재와 외숙과의 수학관계를 두고 소위 학문연원수수설(學問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고 한다.
손씨측의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로 전수되었다”는 설과 이씨측의 그렇지 않다는 설이 상반되기에 이르고 이러한 학문에 관한 시비가 양 문중간의 갈등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양성 집단간의 뼈대있는 반촌(班村)이 지니는 한 특수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어쨌든 소년시절부터 외숙의 깊은 영향을 받았을 회재가 후일 대성하여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일인으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된 것은 양동마을의 긍지이기도 하였으려니와 학문연원수수설을 통한 양문중간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고 하겠다. 지금 이 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종손인 이인식옹(李仁植翁)은 회재로부터 15대손이다. 이러한 양동의 양성관계는 이제 과거의 일로 되었으나 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으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되었었다고 한다.
손 ·이 양씨의 호구(戶口)관계는 1973년에 손씨 28호, 이씨 88호였고 1979년에는 손씨 16호, 이씨 80호로 양쪽이 모두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특히 손씨들의 감소율은 현저하다. 그러나 원래 손씨들이 양동에서는 소수이지만 인근의 인동(仁洞), 강동면(江東面), 월성군(月城郡)으로 넓혀 전체로 본다면 이씨들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전반적인 감소추세는 시대의 급격한 산업화로 젋은이들을 중심으로한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진출함에 따라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촌내(村內)에 있어서의 전통적, 양 문중간, 친족간의 협동 ·유대(紐帶)관계도 점차 마을생활에서 퇴조되어가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상조계(相助契)는 손 ·이 ·타성(他姓)받이의 각기 문중이나 또는 파손별(派孫別)로 행하여지고 있는데 그 중요도에 따른 순위는 상례(喪禮), 혼례(婚禮), 제례(祭禮), 회갑, 생일, 돌, 백일 등으로 순위를 나타내고 있다. 또 손 ·이 양씨의 각기 계조직은 가까운 경주, 포항, 대구에서부터 멀리는 부산, 서울 등 전국적으로 확대된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러한 확산은 양동마을 인구감소와 함께 도시진출과 비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동마을이 반촌으로 이름이 있는 것은 마을이 잔존가옥과 지형적 경관뿐 아니라 오히려 유가적(儒家的) 사상과 관습을 강하게 지녀온 데에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양동마을에는 마을의 일반적 전승으로서의 동제(洞祭)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며 세시행사(歲時行事)로서도 여름 삼복후(三伏後)의 머슴놀이인 호미씻기, 2∼3년에 한번씩 있었던 정월보름, 추석 때의 줄다리기 등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양동마을의 큰집들은 모두가 손 ·이씨들의 종가, 파종가들이고 특히 이씨들은 파손(派孫)이 여러 갈래이고 파손마다 정자(亭子)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종손인 무첨당파, 이손(二孫)인 양졸정파(養拙亭派)(영귀정(詠歸亭)), 삼손(三孫) 설천정파(雪川亭派), 사손(四孫) 수졸당파(守拙堂派)(무정자(無亭子)), 오손(五孫)인 오위정파(五衛亭派)(재(在) 영일군(迎日郡)) 등 지손(支孫)들의 파명(派名)에 정자(亭子)를 붙여 부르고 있었으며 모든 파손에 정자가 있었으나 수졸당파만은 정자가 없었다고 한다. 종가, 정자와 함께 재실(齋室), 비각(碑閣), 족보(族譜), 문집(文集), 고문서(古文書), 위토답(位土沓) 등은 이 마을 양반의 권위의 상징으로 되어왔다고 한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큰집들이 30동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종가일수록 산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는 것도 반가의 배열 법도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산상 반가들은 과거 솔거노비(率居奴婢)의 주거(住居)이던 행랑채를 두거나 또 외거노비(外居奴婢)의 살림집인 가랍집을 주위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개 초가들이었다.
현재 양동마을 내에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모두 15가호(家戶)인데 그중 가장 오랜 예는 손동만씨의 서백당(書百堂)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반가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ㅁ자 외에 대문(大門)앞에 행랑(行廊)채를 둔 예도 있다. 예외적인것으로 ㄱ자나 一자집을 여러동 혼합 배치하는 예도 있으나 내부구조에 있어 공통적으로 영남지방의 특색을 보이는 것은 안방과 부엌의 횡접(橫接)관계, 작은사랑과 안사랑의 구비(具備), 안대청(大廳), 사랑대청의 원주사용(圓柱使用), 지붕합각(合閣)의 처리 등이며 간혹 중부(中部), 서울식인 안방, 부엌의 하접형식(下接形式)이나 동(棟) 배치의 분산 등 예외적인 것도 있다. 지정된 가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손동만씨가옥(孫東滿氏家屋)(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 중요민속자료 제23호)
2. 낙선당(樂善堂)(손영호씨가옥(孫濚鎬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3호)
3. 무첨당(無첨堂)(여강이씨 대종가(驪江李氏 大宗家), 이인식(李仁植), 보물 제411호)
4. 관가정(觀稼亭)(손씨대종중(孫氏大宗中), 보물 제442호)
5. 향단(香壇)(향단파종가(香壇派宗家), 보물 제412호)
6. 심수정(心水亭)(향단파(香壇派), 중요민속자료 제81호)
7. 수운정(水雲亭)(손승익(孫承翼), 중요민속자료 제80호)
8. 수졸당(守拙堂)(이종환(李宗煥), 중요민속자료 제78호)
9. 이향정(二香亭)(이석천(李錫千), 중요민속자료 제79호)
10. 이원용가옥(李源鏞家屋)(중요민속자료 제75호)
11. 이희태가옥(李熙太家屋)(중요민속자료 제77호)
12. 안락정(安樂亭)(손씨종중서당(孫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2호)
13. 이동기가옥(李東琦家屋)(중요민속자료 제76호)
14. 이원봉가옥(李源鳳家屋)(중요민속자료 제74호)
15. 강학당(講學堂)(이씨종중서당(李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이들중 대지내에 가묘(家廟)를 둔 대종가(大宗家), 파종가(派宗家)는 4개소이며 이들이 지니고 있던 가랍집은 해방 무렵에도 40여호(餘戶)나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었거나 혹은 주인이 바뀌어 옛 가랍집이 형체로나마 그대로 잔존하는 것은 몇개소에 불과하다. 한편 이 마을 각 종(宗) ·파손(派孫)들의 정자에서는 하절(夏節)에 칠회(七回)의 놀이를 행하여 왔으며 5월 그믐에 개장되면 보신탕등 각종 음식, 주류를 갖추어 시창(詩唱)으로 양로위안적(養老慰安的) 연유(宴遊)를 벌였다고 한다. 7회(回)는 다음과 같다. 유두(流頭),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 칠석(七夕), 입추(立秋), 처서(處暑). -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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