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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세계유산-036.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11) ㅡ 이와미 은광 유적과 문화경관 : 아시아 최초의 산업유산형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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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ㅡ 이와미 은광 유적과 문화경관

 

일본 열도 혼슈 남서부, 시마네현 오다시의 해발 600미터 안팎 산지에는 한때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 가까이를 담당했던 광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와미 은광 유적과 문화경관(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은 아시아 최초의 산업유산형 세계유산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400년에 걸쳐 채굴이 이루어진 이 광산은 단순한 채굴 시설이 아니라 광산촌과 산성, 사원, 운송로, 항구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생활권이자 문화경관으로 평가받는다. 등재기준 (ⅱ), (ⅲ), (ⅴ)를 충족한 이 유산의 핵심은 대규모 산업 활동이 주변 삼림과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공존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유산 면적은 529헥타르에 이르며, 은광 유적과 광산촌인 오모리 지구, 은을 실어 나르던 가도, 그리고 도모가우라·오키도마리·유노쓰 세 항구 마을을 포함한 열네 곳의 구성 자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처음 이름을 올린 이후 2006년 정식 추천서가 제출되었고, 이듬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심사를 거쳐 최종 등재에 이르렀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근대 광산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수공업적 채굴과 정련 기술이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받은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1. 은광의 발견과 회취법의 도입

이와미 은광의 광맥이 처음 발견된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리지만, 통상 1526년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壽禎)가 본격적인 개발에 나선 것을 기점으로 삼는다. 그는 이와미 지역을 다스리던 오우치(大內) 가문의 비호 아래 광산을 경영했으며, 중국·조선과의 교역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와미 은광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결정적 계기는 1533년경 조선을 통해 전래된 회취법(灰吹法, 하이후키호)이었다. 이 정련 기술은 납을 이용해 은광석에서 순도 높은 은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그 전래 이후 오우치 가문이 조정에 바치는 은 공물량이 16킬로그램에서 800킬로그램으로 급증했을 만큼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 기술이 일본 특유의 노동집약적 수공업 체제와 결합하면서, 이와미는 근세 아시아 은 생산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광산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2. 쟁탈의 역사산성과 지배권의 이동

막대한 부를 낳는 은광은 곧 주변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오우치 가문이 처음 이와미를 지배했으나, 1550년대에는 아마고(尼子) 가문이 10년간 지배권을 쥐었고, 1561년에는 모리(毛利) 가문으로 지배권이 다시 넘어갔다. 이 쟁탈전 과정에서 광산 주변에는 방어를 위한 여러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성터들은 은광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 다툼의 물증으로 남아 있다. 모리 가문은 지배권을 확립한 뒤 유노쓰와 오키도마리로 이어지는 새로운 운송로를 개척해 광산의 유통망을 정비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정권을 잡고 에도 막부를 세우면서 전국의 금광과 은광을 몰수했는데, 이와미 은광에는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가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새로운 갱도를 개발하고 생산량을 한층 끌어올렸다. 이 시기 광산 경영은 '야마시(山師)'라 불리는 전문 경영인이 맡았으며, 이들은 채굴한 은의 일부를 막부에 수수료로 바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3. 갱도와 채굴 기술류겐지 마부

이와미 은광에는 크고 작은 갱도 '마부(間歩)'가 무려 900곳 넘게 뚫려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가운데 1715년 개발되어 실제로 사용된 류겐지 마부(龍源寺間歩)는 현재 일반에 공개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갱도로,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전동 장비 없이 오로지 사람의 손과 정, 곡괭이만으로 암반을 뚫어나간 채굴 흔적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좁고 어두운 갱도 벽면에는 채굴 당시의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광부들이 얼마나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채굴된 광석은 지상으로 운반된 뒤 앞서 언급한 회취법을 통해 정련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제련소와 정련소의 유구 역시 광산 유적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남아 있다.

 

은광의 전성기였던 1620년대에서 1640년대 이후로는 갱도가 깊어질수록 채굴 여건이 악화되고 홍수 방지를 위한 투자 부담이 커지면서 점차 생산성이 떨어졌고, 결국 1923년 조업이 사실상 멈추고 1943년 완전히 폐광에 이르렀다.

4. 오모리 지구은광촌의 삶

은광 인근에 형성된 오모리(大森) 지구는 광산 경영인과 광부, 상인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광산촌으로, 오늘날까지도 에도 시대의 거리 풍경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목조 가옥과 상점, 사원 들은 광산이 단순한 채굴 현장을 넘어 하나의 완결된 생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유산 등재 이후에도 이 마을이 관광지 개발에 치우치지 않고 주민들의 실제 거주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은 여전히 전통 가옥에 거주하며 옛 마을의 경관을 지키고 있으며, 이는 유산의 진정성을 살아 있는 형태로 보존하는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마을 인근의 라칸지(羅漢寺)를 비롯한 사원들은 광산 노동자들의 신앙생활을 뒷받침했던 공간으로, 험한 갱도 노동에 종사했던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5. 은을 실어 나른 길과 항구

채굴된 은은 내륙의 광산에서 해안까지 운반되어야 비로소 교역품으로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조성된 가도는 시대에 따라 경로를 달리하며 정비되었으며, 오모리에서 니마초를 거쳐 해안에 이르는 이 길을 따라 은광석과 정련된 은이 부지런히 오갔다. 종착지가 된 도모가우라·오키도마리·유노쓰 세 항구 마을은 각기 다른 시기에 주요 선적항으로 기능하며 한국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교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특히 유노쓰는 항구인 동시에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 마을로도 이름이 높아, 광부와 상인들이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몸을 쉬어가던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유노쓰에서는 매주 토요일 신사에서 이와미 가구라(石見神楽)라는 전통 예능이 상연되는데, 이는 광산과 항구를 오가던 이들의 삶 속에서 뿌리내린 지역 신앙과 예능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6. 자연과 공존한 산업유산

이와미 은광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결정적 이유는 대규모 채굴 산업이 400년 가까이 지속되었음에도 주변 삼림과 자연경관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채굴과 제련에 필요한 목재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면서도 산림을 벌거벗기지 않았고, 광산이 문을 닫은 뒤에는 자연이 다시 갱도 주변을 뒤덮으며 울창한 숲으로 되돌아갔다. 오늘날 옛 갱도 입구는 짙은 녹음 속에 파묻혀 있어, 이곳이 한때 세계적인 은 생산지였다는 사실이 언뜻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특징은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처럼 대규모 채굴로 인해 환경이 크게 파괴된 다른 세계적 광산 유적들과 뚜렷이 대비되며, 산업 활동과 자연환경이 장기간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로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7.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도 이어지는 삶의 터전

이와미 은광 유적과 문화경관은 화려한 궁궐이나 사원이 아니라, 땀과 정 자국으로 뒤덮인 좁은 갱도와 그 주변에 형성된 삶의 흔적을 통해 세계유산의 가치를 증명한 독특한 사례다. 조선에서 전래된 회취법이 일본 특유의 수공업 전통과 결합해 세계 은 유통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기술과 물산을 주고받으며 함께 근세를 빚어냈음을 웅변한다. 산성의 쟁탈전, 갱도 속 광부들의 고된 노동, 오모리 마을의 소박한 일상, 그리고 은을 실어 나르던 항구의 활기까지, 이 모든 층위가 겹쳐 이루어낸 것이 바로 이와미의 문화경관이다. 무엇보다 채굴이 멈춘 자리에 다시 숲이 우거지고, 그 숲을 지키며 여전히 옛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유산이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도 이어지는 삶의 터전임을 말해준다.

 

세계 곳곳의 산업유산이 흔히 채굴과 개발이 남긴 상흔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과 달리, 이와미 은광은 인간의 손길과 자연의 회복력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균형을 이루어낸 드문 풍경을 후대에 남겼다. 좁은 갱도를 걸어보고 고요한 오모리 거리를 거닐다 보면, 한때 세계 은 유통의 중심에 섰던 이 산골 마을이 지금은 그 화려했던 시절의 흔적을 조용히 품은 채 자연과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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