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 훙커우공원)
상해 홍구공원(현재 명칭: 루쉰공원, 鲁迅公园)은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虹口区)에 위치한 대형 도심 공원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장소다. 원래는 1896년 청나라 시기에 상하이 공동조계 관청이 농지를 매입해 서양식 정원 양식으로 조성한 곳으로, 1922년 ‘홍커우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56년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루쉰의 묘와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 역사적 의미
1)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일본이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및 히로히토 천황 생일(천장절) 행사를 개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과 주요 인사들이 모인 행사장에 폭탄(물통폭탄)을 투척,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 거주민 대표 가와바타 사다지를 사망하게 하고, 여러 고위 인사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의거는 조선의 항일 투쟁 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중국 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장제스 총통은 “중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했다.
2) 공원의 변화와 현재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공원 내 건물들이 파괴되고 군사용지로 사용되었다가, 일본 패망 후에는 ‘중정공원’으로 잠시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루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루쉰묘와 루쉰기념관, 윤봉길 의사 의거지 ‘매헌(梅軒) 윤봉길 기념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은 상하이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2. 주요 시설
● 루쉰묘, 루쉰기념관(중국 현대문학가 루쉰의 유해와 기념관)
● 매헌 윤봉길 기념관(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의거 관련 유품, 자료 전시)
● 홍커우 축구장, 중일우호광장 등
3. 교통
상하이 지하철 3호선 ‘홍커우 경기장역’ 인근에 위치해 접근이 편리하다.
4. 상징과 영향
홍구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은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하이 점령 전승 및 히로히토 천황 생일(천장절) 기념행사를 개최하던 공원 내 행사장 단상(사열대) 부근이다.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 주요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단상 가까이 접근해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즉,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장소는 홍구공원 내 행사장(사열대) 앞, 일본군과 주요 인사들이 집결해 있던 단상 주변이었다. 오늘날 이 자리는 루쉰공원 내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의거지’로 표기되어 있으며, 매헌 윤봉길 기념관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홍구공원(루쉰공원)은 단순한 도심 공원을 넘어, 한국의 독립운동사와 중국 현대문학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과 기념관은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방문하며, 항일과 독립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남아 있다.
매헌(梅軒) 윤봉길 기념관
1. 윤봉길 의사와 홍구공원 의거의 역사적 배경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는 일본군이 주최한 히로히토 일왕 생일 및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민간, 외교사절 등 주요 인사들이 집결한 단상 앞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하고, 여러 고위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조선 독립운동사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으며, 중국 내 항일 분위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크게 높였다. 장제스 총통은 “중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하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된다.
2. ‘매헌(梅軒)’의 의미와 윤봉길 의사의 정신
윤봉길 의사의 호 ‘매헌(梅軒)’은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 매화처럼 고고한 기품과 충의정신을 간직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윤 의사는 자신의 삶을 매화와 같이 꿋꿋하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살고자 했다. 그는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3. 매헌 윤봉길 기념관의 설립과 구조
● 위치와 설립 경위
상하이 루쉰공원(구 홍구공원) 내에 위치한 매헌 윤봉길 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기념하고,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중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한 2층 목조건물의 정자 형태의 기념관이다. 이곳은 우리 정부와 상하이시 홍구구 인민정부의 협조로 보존·관리되고 있다.
기념관은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최초 건립되었고, 2003년에는 윤 의사의 출생지부터 의거 전후의 사적을 보여주는 유품과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자료 등이 보완되어 새롭게 개관했다. 2015년에는 의거 83주년을 맞아 야외 전시물과 교육·홍보 동영상실 등 현대적 전시 공간이 추가됐다.
● 전시 및 교육 기능
- 전시실: 윤봉길 의사의 출생, 성장, 농촌계몽운동, 상하이 의거, 순국 등 일대기를 유품, 사진, 기록물로 전시한다.
- 옥외 전시물: 의거 현장에 세워진 기념비와 함께, 윤 의사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교육·홍보실: 윤 의사의 의거와 영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등을 다룬 영상과 자료를 통해 방문객들에게 생생한 교육의 장을 제공한다.
4. 한중 공동의 역사 보존과 기념사업
매헌 윤봉길 기념관은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한중 양국이 공동으로 보존·관리하는 역사적 자산이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매헌기념사업회 등 관련 기관들과 주상하이총영사관이 중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은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세계 각국 방문객들에게도 항일과 독립의 정신을 알리는 국제적 교육·기념 공간이다.
5. 매헌 윤봉길 기념관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과 기념관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 독립운동의 현장: 실제 의거가 일어난 장소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역사적 현장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한중 우의의 상징: 일제 침략에 맞선 두 나라의 연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 교육의 장: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나라사랑, 희생정신, 독립운동의 가치를 일깨우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이다.
6. 방문 및 활용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인과 현지인, 국제 관광객들은 루쉰공원 내 매헌 윤봉길 기념관을 찾아 숭고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은 매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기념식 등 다양한 추모·교육 행사가 열리며, 후세에 애국정신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7. 결론
상하이 루쉰공원 내 매헌 윤봉길 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과 독립정신을 기리는 한중 양국의 소중한 역사 유산이다. 이곳은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항일과 독립, 국제연대의 가치를 오늘날에도 전하고 있으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심과 역사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애
출생과 성장
윤봉길(尹奉吉, 1908.6.21~1932.12.19)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윤황,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이다.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전통적 유학 교육을 받았고,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발,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 공부에 전념했다.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윤봉길은 1920년대 초반부터 농촌 계몽과 부흥 운동에 힘썼다. 서당 생활을 마친 후 농민계몽운동,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을 펼쳤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청소년 교육에 앞장섰으며, 1929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해 농민운동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민 자활운동을 이끌었고, 수암체육회를 설립해 신체 단련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
1930년,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만주로 망명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5일간 투옥되기도 했으나, 만주에서 김태식, 한일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931년에는 중국 다롄과 칭다오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근거지를 모색했고,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밝혔다.
한인애국단 입단과 상하이 의거
1932년 4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장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단행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하고, 여러 일본 고위 인사가 중상을 입었다.
체포와 순국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11월 일본으로 압송되어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25세였다.
의거의 영향과 평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이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국내외 동포와 중국 각계의 지지와 지원을 이끌어냈다.
사후와 추서
윤봉길 의사는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46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리
윤봉길 의사는 짧은 생애 동안 농촌 계몽, 민족운동, 무장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그의 상하이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와 한중 연대사에 길이 남는 쾌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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