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동계고택桐溪古宅
- 이름 없는 곳에서 뜻을 지키며 산다 -
경남 거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전라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3도가 만난 지점에 위치한
경상남도 최북단의 서부지방이다.
덕유산을 비롯한 고봉준령에 둘러싸인 지형 특성상,
내륙지역이지만 여름철에 덥고 겨울에 추운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
산간분지가 지역 곳곳에 발달하였다.
그래서 산이 좋고 계곡이 좋고 물이 좋아서 누대와 정자가 많고
그 누대와 정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선비문화가 두텁게 형성되었던 곳이
바로 거창지방이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국토박물관 순례’에서 거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거창은 남덕유산을 등에 지고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멀찍이 벌린 채,
남쪽 저 멀리 황매산을 내다보며 한들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수승대搜勝臺의 거창 신愼씨, 건계정建溪亭의 거창 장章씨,
위천의 초계 정鄭씨, 갈천葛川의 은진 임林씨 등이
일찍이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서부 경남 굴지의 고을로 성장했다.
조선 전기 산청의 조식, 함양의 정여창이
경상우도 영남학파를 형성할 때,
거창에서는 동계桐溪 정온(鄭溫 1569~1641)이
이 고을 유림의 한 전통을 세웠다.”
동계 정온 선생은
선조, 광해, 인조 세 임금 대에 걸쳐서 학문을 펼친
큰 학자이자 선비이다.
동계 선생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지만,
일생을 통하여 다음 두 가지의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충절과 기개의 선비로서 영원히
추앙을 받고 있는 분이다.
그 하나의 사건은 선생의 나이 46세 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시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동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갑인봉사로 일컬어지는 상소를 올렸다.
“대비를 쫒아내는 그런 패륜을 저지르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소!”하고
준엄하게 꾸짖자 분기탱천한 광해군이
밥상을 발길로 걷어찰 정도로 흥분했었다고 한다.
선생을 아끼던 중신들의 만류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로 귀양 가서 10년 동안 위리안치의 긴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동계 선생은 절의를 지킨 선비로 중용되어서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두 번째 사건은 병자호란 때 일어난다.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임금은
항복을 요구받는다.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남한산성>에서처럼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의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서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시종일관 첨예하게 대립한다.
동계 선생은 김상헌 선생과 함께 끝까지
오랑캐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었고,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이 맨발로 엎드려 오랑캐에게 절을 하는 치욕을 당하자,
동계 선생은 칼로 배를 긋는 할복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진 목숨을 연명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지만
집을 떠나 홀로 남덕유산 산속으로 들어가서 풀과 나무로 움막을 짓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백이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만 먹고,
모리재某里齋(이름없는 곳의 집)에서 은거하다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요즘도 후손들이 동계선생의 제사상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리는 연유가 되었고,
초계 정씨를 전국적인 명문으로 각인시킨 절의와 기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동계 사후에,
초계 정씨 가문에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영조 4년, 동계의 손자 정희량이 이인좌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켜
역성혁명을 주도했다가 실패하여,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정씨 가문의 일족 30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멸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삼족을 멸한다는 대역죄를 짓고도 멸문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계 선생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라는
유림들의 절절한 구명운동 덕분이었다 한다.
실패한 혁명의 휴유증으로 이후 100년 동안
영남지방 인재들의 관계 등용의 길이 막히고,
동계선생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뒤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서,
동계선생의 조부인 승지공이 거창에 터를 잡은 이래로,
동계고택의 약 500년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왔다.
[ 사랑채 ]
동계고택은
덕유산 아래 위천강이 흘러내리는 거창군 위천면 강동마을의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고
집 뒤로는 금원산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
전체 구성은 1820년 무렵 후손들에 의하여 중창되어
대문간채, 큰사랑채, 중문간과 중사랑채, 안채, 뜰아래채, 곳간채,
사당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최근에 사랑마당에 아래채가 새로 생겼다.
대문간채 소슬대문에는 인조임금이 내린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의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다.
400년 전의 대쪽 같은 선비 동계선생을 회상하고
그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동계선생 가문의 영예로운 자부심이 담긴 선홍빛 표상이자
훈장이다.
대문에서 정면을 보이는 ㄱ자형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 그리고 ㄱ자로 꺾어져 나온 누각 부분이 1칸 반으로
측면에 툇마루가 있는 구조로서
동계고택 사랑채만의 특별함이 있다.
사랑채 누각의 독특한 겹처마를 비롯하여,
사랑채의 방들을 전후 두 줄로 나란히 겹쳐서 배치하여 겹집의 구성을 이룬 것도
동계고택 사랑채에서만 보여 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두 개의 현판도 눈길을 끄는데,
'모와某窩'라고 적힌 편액은 구한말 의친왕 이강 공이
이 집 사랑채에서 약 40일간 머물고,
‘모리의 집(某里齋)’이라는 뜻의 친필을 남겼다 한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은,
동계선생 사후에 제주도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사람들에게서 동계선생의 선비다운 처신과
유배생활에 대해 전해 듣고 감동하여,
귀양살이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거창의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후손인 정기필 선생에게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이라는 글씨를 써 주고 갔다고 한다.
......
출처 - 06. 거창 동계고택 - 이름 없는 곳에서 뜻을 지키며 산다
[ 안 채 ]
[ 사당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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