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히틀러의 동역자였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오래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 역사교과서 문제와 다시 오버랩되었다. 건축을 통해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의 지위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형량인 20년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 중에 스스로 죄를 뉘우쳤으며 히틀러와 나치의 잔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래 그는 대단히 유능한 건축가의 자질을 가졌었다. 그의 스승인 테세노프는 20세기 초 독일 현대건축의 선봉에 있던 건축가이자 학자였으며 슈페어는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 스스로 나치당원이 된 그는 나치의 뇌라고 불렸던 괴벨스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건축가로서 만개한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20세기 거장처럼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단한 족적을 남겼을 수도 있었다.
그가 한 일은, 로마제국을 잇겠다는 히틀러의 환영을 좇아 고대로마의 건축형식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미 시대는 20세기 기술문명으로 진입한 지 오래며,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이 시대정신으로서 활활 타오르고 있던 시점이었다. 특히 슈페어가 괴벨스를 처음 만나던 1932년,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는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타이틀로 내걸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의 형식이 도래했음을 선언하며 미스와 그로피우스를 포함한 건축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도착적 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흘러간 옛 시대의 건축양식에 파묻히고 만다.
베를린을 ‘제3제국’의 수도로 개조하려던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도시계획은 그 모든 시대착오의 집합이었다. 고대로마의 신전과 궁전들을 모방한 외관과 엄청난 크기의 돔 지붕, 이를 지지하는 거대한 열주들…. 시대는 철과 유리의 투명한 건축과 하늘로 치솟는 마천루로 테크놀로지 미학의 경쟁에 열광하고 있는데 그들은 전시대적 미망에 몰두하며 퇴행한 것이었다. 물론, 시대가치와 동떨어진 그들의 ‘제3제국’ 건축은 그들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유사한 시대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66년에 정부에서 중앙박물관을 현상 공모하며 내건 지침은 이러했다. “건물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콤포지션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 그리고 “여러 동이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 건축계를 비롯한 문화계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대해 대대적인 성토가 있었고 거의 모든 건축단체와 건축가가 공모에 불참하겠다는 성명과 의견을 나타내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강행된 공모에 한 나라의 중앙박물관 건축인데도 겨우 10개 작품이 응모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으며 그나마 일곱은 자격 미달이어서 3개의 안을 놓고 상을 나누게 된다. 당선작은 기괴했다. 법주사의 팔상전과 화엄사의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에 불국사 기단 등을 파편적으로 이리저리 조합한 치졸의 극치였다. 모두가 비난했지만 정부는 강행하여 완성하고 만다.
장소성과 시대성에 적합해야 하며 건축의 기능에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는 건축의 근본을 철저히 욕되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이 건축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여전히 한국건축의 수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건축은 시작일 뿐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유신독재 체제를 갖춘 군사정부가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특별한 구호, 다른 나라에는 없는 민주주의라는 말이니 보편적 가치와는 애초에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존경받던 학자들이 훼절하여 궤변들을 늘어놓고 예술에서 문화에서 ‘한국적’을 위한 표현들이 강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건축은 이 광풍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간주되었을 게다. 정부나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모든 공공건축물의 설계지침에 ‘한국성의 표현’이 첫 번째 조건으로 들어갔다.
한국성,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여서 시대를 거듭하며 수없이 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어왔고 숱한 논문들이 발표된 바 있다. 지금도 논쟁 중이며 어쩌면 우리 후대에서도 늘 논쟁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적 이슈이다. 그러나 다급한 1970년대 정부 관계자들에게 이런 논쟁이 쓸모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타난 게, 목조 흉내를 낸 콘크리트 건물에 ‘계란색’을 칠하고 그 위에 개량 기와를 얹은 밑도 끝도 없는 건물이었다. 사생아였지만 유신독재 정부의 사랑을 대단히 받아 공공청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공공건축들이 이 껍질을 뒤집어쓰며 태어났으니 대표적인 게 광주박물관, 국기원, 어린이회관 등이었다. 나의 스승인 김수근 선생은 이들을 일컬어 ‘박조(朴朝)건축’이라 부르며 냉소하였다. 정권의 홍보와 상징에 동원된 그 건축과 그 건축가의 이름은 결국 수치로 남는다.
나치의 도시 ‘게르마니아’는 그 일부가 지어졌지만 폭격으로 파괴되어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 비뚤어진 도시의 축과 맞닿은 운터덴린덴 가로변에 베벨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꽤 넓은데도 그 흔한 동상이나 조각 하나 없이 모두 비워져 있는 이곳의 한쪽에 사방 1m 남짓한 유리가 바닥에 놓여져 있고 그 안으로 백색의 비어 있는 서가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1933년 괴벨스의 충동을 받은 소년나치대원들이 유태계 지식인들의 책 2만권을 이 장소에서 불태운 것을 기념하는 설치물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마르크, 하인리히 하이네, 카를 마르크스, 아인슈타인의 저서들이 ‘더러운 정신’의 소산으로 지목당하며 화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형체도 없어 소박하기 짝이 없지만 대단히 큰 울림을 주는 이 기념비 앞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 하나가 동판 위에 새겨져 바닥에 놓여 있다. “이것은 서주일 뿐이다. 책을 태우는 자들은 결국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지금 쓰는 역사교과서들이 문제가 있다 치자. 그렇다고 이를 죄다 없애고 하나의 지식만 주입하겠다는 정부와 그 학자들, 시대를 거스른 이 발상이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지 너무도 명확한데 그래도 강행한다니 내 과문을 탓할 뿐이다.
출처 -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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