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미학’을 재론하며
나는 건축가가 본업인데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되었다. 뜻한 바도 없었고 모두 어쭙잖은 글로 채운 책들이지만 그중 몇몇은 해외에서 번역 출판되는 민망함을 겪기도 했는데, 급기야 나의 첫 책인 <빈자의 미학>도 중국에서 지난달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나온 지 20년도 지난 이 작은 책을 중국에 소개하겠다는 출판사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의 중국에 필요한 글이라고 했다. <빈자의 미학>.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단어의 나열로 반감까지 가끔 불러일으키곤 하는 이 제목은, 1992년 가을에 개최된 한 건축전시회에서 선언하듯 뱉은 말이다.
나는 한때 신학을 전공하려 했다. 나는 왜 기독교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어릴 적 내내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임에도 장남이 성직자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에게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방황하던 나를 누님이 다독여 건축과로 진학하게 했으나 대학생활은 파행이었다. 유신독재에 맹렬히 저항하는 학생운동으로 학교는 휴교와 휴업이 일상이었고 간간이 듣는 강의는 건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교를 겉돌기만 하다가 1974년 말 한국 건축계에 독보적 존재였던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야 건축을 접할 수 있었다. 군사독재의 강압이 절망처럼 느껴지던 때, 김수근 선생의 건축은 내게 구원의 빛이었다. 나는 그 속으로 도피하듯 몰두했다. 거의 매일 밤을 미친 듯이 새우며 세상과 절연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건축가로는 너무도 아쉽게 55세의 일기로 1986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몰두하던 것은 어쩌면 건축이 아니라 김수근건축이었고, 선생께서 계시지 않는 이상 그 건축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89년, 내 건축을 하겠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내 건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15년을 김수근건축 속에서만 파묻혀 산 까닭이었으니 마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선원과 같았다. 방황을 거듭하다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를 가게 된다. 깜짝 놀랐다. 내가 의문하던 건축과 도시의 모든 지혜와 해결책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는 각자 가진 게 적어 많은 부분을 서로 나누며 살 수밖에 없다. 그 나누는 삶이 집 밖의 길에서 이뤄진다. 여기 길은 통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며 모이고 즐긴다. 특히 산비탈 지형에 따라 이뤄진 길은 그 형태가 절묘하여 넓다가 좁다가 휘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내 어릴 적 살던 곳이 생각났다. 내 부모님은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하여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하신 까닭에 나는 피란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물 하나, 화장실 하나를 가운데 둔 마당에서 북새통을 이루며 모여 살던 풍경, 많은 것을 나누며 살던 내 어릴 적 정겨운 모습들이 현재화된 것이었다. 삶에 대한 진정성 가득한 이 절묘한 공간들은 어떤 현대건축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달동네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위험하기도 해서 재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건축이 우리 삶을 지속시키는 기억의 저장소인 한, 이런 아름다운 공간은 재개발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했다. 이것이라면 내가 건축하는 이유일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울의 달동네라는 곳을 모두 가보고 확인하며 내 건축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92년 가을, 새로운 건축에 뜻을 같이하며 논쟁하곤 했던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4.3그룹’이 건축전을 가지면서 서로의 주장을 내어놓자고 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빈자의 미학’이라고 이름하며 이 방향으로 내 건축을 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더러는 이 말의 뜻을 높이 사며 격려도 했지만 일부는 너무 종교적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내 건축을 미리 한정하는 데 대한 질책과 염려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갖는 아름다운 가치를 이미 감지했으므로 실천만이 내가 안아야 할 과제였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 방법론이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도시와 건축은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했으며, 20세기 초 서양에서 주장되었던 기능주의를 비판하였고 그들의 목적적 건축공간보다는 비어 있는 우리의 옛 공간이 훨씬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소란한 시대에 침묵의 건축이 더 가치 있다고 그 책에 썼다. 졸렬한 책이며 거친 글이라 해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 내용을 고칠 수 없다. 그사이 시대는 21세기로 변하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고 기술이 더욱 발달했지만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은 나아졌을까? 하루에도 마흔명이 가난 때문에 혹은 고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절망의 사회, 3백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야만의 시대…. 헬조선이며 혼용무도라고 했다. 결단코 우리는 20여년 전보다 나은 사회에 있지 않다. 그러니,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한 다짐을 나는 아직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나를 가둔 이 빈자의 미학은 때로는 위험한 무기가 되었다. 그 책에 발문을 쓴 건축가 민현식 선배는 내게 근본주의자라고 낙인하며 그렇게 살라고 일렀다. 타협하지 않아야 했으며, 내 영역이 아니면 얼씬거리지 않아야 했고 나를 더욱 달구기 위해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등을 돌려야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남은 게 무엇일까? 수많은 적들? 비아냥과 욕설들? 가난한 내 주변들? 아니다. 이런 결과는 오히려 스스로를 다듬게 하는 동기가 되니 감당할 몫이다. 요즘 들어 내가 못 견뎌 하는 것은, 내가 쏟은 말과 글이 누구에게는 상처로 남은 일이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이 칼럼을 독점하면서 뱉어놓은 글들을 들추어보며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어쩌지 못한다. 횔덜린의 글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혹시 내 글로 상처 입었을 이들에게 사죄한다. 이 마지막 칼럼마저 변명으로 맺지만, 그 누추함에도 독자들과 데스크에 감사할 뿐이다. 새해, 평화하시라.
출처 -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빈자의 미학’을 재론하며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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