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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건축 갤러리 ■/국 내

안동 원촌마을 이육사 문학관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2024.04.06)

 

 

 

 

 

 

 

 

이육사문학관

李陸史文學館

 

 

위치 760-932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

설립 2004731

성격 문학관

유형 단체

설립자 이육사기념관추진위원회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경북 안동시에 설립된 문학관.

 

개설 및 설립목적

이육사문학관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 1904-1944)와 관련해 흩어져 있던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그의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설립됐다. ‘264’는 첫수감시 수인번호로, 그의 저항의 상징이자 시세계를 암시하는 기호였다.

 

연원 및 변천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20002월이육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한 뒤 이듬해 1월 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02

11월 착공하여 2004731일 개관하였다.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7683m²의 터에 건물면적 582m², 지상 2

규모로 지어졌다.

 

기능과 역할

문학관에서는 매년 이육사 탄생을 기려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육사 백일장, 문학캠프, 육사의 밤, 기념 세미나, 시인의 육필전 등을 열고 있다. 전시관에는 시집, 연구논저와 비평문, ·박사 학위 논문, 관련자료 및 단행본, 영상자료, 사진자료 등이 비치되어 있다.

 

현황

주요시설은 문학관 2, 생가 모형, 3개 마당, 육사 동상, 시비, 잔디광장, 오솔길, 청포도 밭, 청포도 샘터 등이다.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체험 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이밖에 2층은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육사의 시를 직접 등사기로 인쇄해 가져갈 수 있는 탁본 체험 코너,

육사가 어린 시절 뛰놀던 들판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상(時想)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이육사의 생가와 작품, 관련 자료들을 한곳에 모아놓아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문향을 따라가다(문학의 집·서울/한국문학관협회 편, 어문각, 2010)

이육사문학관(www.264.or.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육사문학관의 건축

 

 

선비의 땅, 안동(安東)

 

안동은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여러종택과 고택마을들이 있어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인 봉정사 극락전이 있고, 퇴계 이황선생의 삶과 학문의 흔적이 남아있어 우리나라 유학의 본고장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안동의 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 유교랜드,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등의 건축들은 전통

유교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이다.

 

안동(安東)은 중국에서 바라보아 편안한 동쪽의 땅이었다. 공자의 탄생지 유교의 발원지보다도 유학의 경지가 높아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 높은 정신문화의 땅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도()가 동쪽으로 간곳이 도동(道東)서원이요,

달마가 동으로 간 까닭이 있었고, 당태종이 마지막으로 절터를 찾아 지은 대견사도 동쪽의 땅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고요했던 선비의 고장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를 겪게 된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과 1980년대 임하댐 건설로 오래된 땅의 고장은 물의 고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편안한 풍수지리의 땅에서 수백 년 세월을 지켰던 종택 고택마을, 마을을 지켰던 당산나무와 삶의 터전이었던 논밭들이 물에 잠기었다.

청량산과 주왕산에서 흘러내리던 강의 물줄기는 갇혀서 호수가 되었다. 호수를 바라보는 산자락 언덕에는 이주 마을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전통건축과 전통마을이 사라지고 옮겨졌다는 상실에 비할 바 아니지만, 호수와 물의 고장으로의 변모는 관광자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고전적 전통고장의 바탕 위에 현대를 아우르는 시설공간의 동행은 미래적 삶의 바탕을

이루기도 할 것이다.

 

최근 건립된 '이육사문학관' (2008년 개관)'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2017년 개관)은 그동안 널리 알려져 있었던

안동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이육사의 저항문학과 독립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문화콘텐츠이다.

 

 

 

 

 

 

 

 

 

 

 

 

 

 

 

 

 

 

근대의 상실, 강점기

 

19C 서양에서의 근대는 문명의 혁신으로 변화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시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반도는 초토화 되었다. 대원군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궁궐 경복궁 복원에 온 국력을 쏟지만 결과적으로 조선

붕괴의 길을 걷는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잠깐의 근대국가 대한제국도 쓰러져 버렸다. 희망의 20C가 열려야 할 1900년 조선은 일본에게 강점을 당하며 나라를 잃고 말았다. 근대기의 유럽은 세기말의 혼돈과 구시대에서 탈피, 현대의

전단계로서의 다양성의 근대기였다. 르 꼬르뷰제 등 근대 건축가들의 활동들은 현대건축으로 이어지고, 시장경제의 발달, 국제화는 각 나라들의 도시와 건축이 정립되는 근대의 시기였다.

 

나라를 잃고 근대를 상실한 일본강점기 그 불행한 시기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심훈 등의 저항시인들과

고귀한 문학을 탄생시켰다. 고난과 역정의 삶이었기에 미처 해방을 맞기도 전에 문학만을 남기고 그들은 생을 다하였다.

생전에는 시집 한 권 간행도 어려웠다.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들은 그 험난한 시대를 살고 간 시인들의 삶과 문학을

기억하고 현창해야하는 것이다. 남겨져 있는 또 다른 근대의 불행이 있다. 친일파라는 지나간 시간의 멍에에 갇힌 문인

예술가들은 아직도 이 땅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있다.

 

 

 

 

 

 

 

 

 

 

 

 

 

 

 

 

 

 

 

 

 

 

 

 

 

 

 

 

 

 

 

 

이육사문학관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시 광야’ ‘청포도는 온 국민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이요 안동선비 가문이 바로 고향이라는 것을 이곳 문학관에 와서야 세삼

실감하게 된다. 이육사문학관은 도산서원 길을 지나 퇴계종택 바로 인근 원천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퇴계의 학문 선비정신과 이육사의 문학 독립정신은 도산면 토계천을 따라서 바로 몇백미터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문학관이 없었다면 원천마을에 까지 외부인의 발걸음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고난의 시대에 탄생한 거친 서사문학은 평화시대의 서정문학보다도 강렬한 빛과 감동을 더욱 발하고 있다.

일본강점기 독립투쟁에 몸으로 저항했던 시인은 삶과 몸의 언어가 자체가 곧 그의 문학인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며 시는 곧 의미예술이라고 하겠다. 목숨이 스러져 갔어도 남겨진 글과 시는

영원히 남겨지는 강력한 무기이다. 난중일기, 징비록, 윤동주, 이육사의 글과 시는 고난의 시대를 표현하는 저항의

무기인 것이다.

 

원천마을 초입길 왼편의 이육사문학관은 작은 계곡을 따라서 앉아있다. 건물 첫 만남은 날카로운 모서리 기둥의 노출과

면벽의 입면이다. 건축 조형적 표현은 온난하지 않았던 고행적 작가의 삶을 표현하는 침묵 속에서의 외침으로 해석해본다. 계곡 산세를 따라서 남북으로 앉은 건물 도로면은 1층이다. 벽면을 따라 왼편으로 오르면 서측 마당에서는 2층 입구로 진입하게 된다. 앞마당에는 절정시가 세겨진 바위 앞에 이육사는 책을 들고 앉아서 손님을 맞이한다. 마당 안쪽 계곡 가까이에는 발코니가 있는 문학생활관이 별동으로 배치하고 있다.

 

로비 홀에 들어서면 바깥 자연을 배경으로 시인의 흉상이 있어 방문객들은 인증사진을 찍는다. 홀을 중심으로 왼편에

다목적홀, 오른편으로 전시공간이 배치한다. 1(지하) 벽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는 공간은 2개 층이 트인 오픈

전시공간이다. 마치 지하 감방으로 내려가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문학관의 전시실 내부평면과 동선은 대체적으로 사각형 삼각형 사선 조합으로 구성된다. 그 중앙은 중정공간이 자리하여서 내부에 빛과 바람 자연적 요소를 제공하며 동선을 유도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치열한 민족정신으로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일본 중국 만주 등 타국을 떠돌며 항일투쟁에 매진했던 저항시인의 삶을 기록하고있다. 잦은 옥고 고문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뒤에는 총칼 대신 날카로운 펜을 휘둘러 싸웠던 항일투사로서의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17차례의 투옥생활로 그의 이름조차도 수인번호 264 李陸史로 살았다.

광복을 한 해 앞둔 39세 마감한 그의 생은 짧았다.

 

문학관의 꽃은 육필원고이다, ‘이육사육필전에는 빛바래고 얼룩진 편지, 엽서, 일기, 원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국내

유명시인들의 육필 원고와 시 작품이 액자 속에서 전시되어 있었다. 현대의 컴퓨터 인터넷시대에는 손으로 쓰는

육필(肉筆) 상실의 시대에 살고있다. 연필과 만년필 땀 냄새가 밴 손 글씨가 사라졌기에 시인의 체온으로 쓴 육필 원고지와 시는 더욱 그리운 것이다.

 

2층 남측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원천마을 겨울들판이 멀리 펼쳐져 있다. '하늘이 처음 열리고 닭 우는 소리 들렸던 광야(曠野)' 바로 여기가 광야가 아니었던가!

 

출처: .문화대로.文化大路. (최상대의 건축공간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思空 최상대

 

 

 

 

 

 

 

 

 

 

 

 

 

 

 

 

 

 

 

 

 

 

 

 

 

 

 

 

이희국시인선-별들을 따라걷다

 

(시인선 4) 강철 같은 무지개 이육사

 

- 이희국

 

 

조국 광복에 대한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애국시인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가족구성원 대부분이 독립투사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 한시도 비굴하게 숨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하다가 23세인 1927년 첫 수감을 시작으로 1944116일 새벽 5시 베이징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순국하는 순간까지 무려 17회나 투옥되었다. 그는 시인임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애국자이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대표적 실천문학인이며 쉼 없는 열정으로 독립된 조국을 그려내던 강철 같은 무지개였다.

 

1. 탄생과 성장

 

이육사 시인은 1904518(음력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아버지 이가호(퇴계 이황의 13대손)와 어머니 허길(의병장 허형의 딸)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이원록李源錄, 이명은 이원삼李源三이다.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문학을 수학했으며 조부가 교장이었던 보문의숙(뒤에 도산공립보통학교)을 졸업한 후, 16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17세에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 후 대구 교남학교(현재 대륜 고등학교)에서 수학한다. 친가와 외가 쪽 모두 엄숙하고도 애국적인 가풍 속에 성장한 시인은 졸업 후 19살 때인 1923년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킨죠예비학원을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한 후, 1925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 상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 재학 중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백형 원기와 숫제 원일과 함께 가입한 후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무대로 항일활동을 벌이기 위해 중퇴한다. 1926년 잠시 귀국해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애국지사들과 신문화강좌를 연 것이 공식적인 구국활동의 시작이며, 이듬해 봄 이정기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지사들과 독립운동과 자금모집방법에 대해 협의하고 돌아온다. 1927년 형 이원기와 두 명의 동생(이원일, 이원조) 4형제가 함께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류 되어 함께 수감되었으며 시인은 3년형을 받게 된다.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기, 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 거꾸로 매단 채 고춧가루 탄 물 붓기 및 쉼 업는 구타 등 온갖 고문을 수시로 당했지만 시인은 언제나 꼿꼿하였다. 1929년 장진홍 의사의 검거로 26개월 만에 풀려난 이육사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한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난다.

 

1931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3월 퇴사하였고,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의 핵심인원인 윤세주를 만나 가입하였다. 1932년 이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조선군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 후 졸업에 이른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과 폭약, 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 변장법, 무기운반법 등을 배웠고, 특히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상하이를 거쳐 신의주로 입국한 그는 1934조선군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때 다시 투옥되어 7개월 만에 풀려난다. 구국을 향한 시인의 일념은 일제의 모진 탄압과 감시에도 쉬지 않았다. 1936년 다시 검거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는 등에도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다가 1943년 모친 초상으로 귀국 후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4116일 아침 5시 순국하기까지 17회의 체포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의 시 절정에 나오는 강철 같은 무지개의 삶이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전문

 

 

 

 

 

 

 

 

 

 

 

 

 

 

 

2. 작품 활동과 생애

 

1929년 형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그는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였고 문예운동창간지에 전시를 발표한 이후, 1930 1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시 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시인은 1930년 베이징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학문과 독립운동 활동을 겸하게 된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과 교류하며 문학적 자극을 얻어 국내의 대중공론에도 시를 보내 게재한다. 이 시절, 훗날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게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을 설립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었다 한다. 수차의 고문 후유증으로 각종 병에 시달리던 무렵에도 육사는, 행동할 수 없다면 글로서라도 항일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본격적인 창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4년부터 각종 언론계에 기자로 종사하며 다양한 평론과 시조 및 번역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내었고 1937년 신석초, 김광균, 윤곤강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내며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치열한 정치활동이나 지난한 항일투쟁 속에서도 그의 시는 소망이나 신념은 호소하되 직설적이나 선동적 구호는 찾아보지 못한다. 전통적이고 목가적인 어조와 더러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징과 은유가 그의 시를 이끈다. 맑고 깨끗하며 반듯함에 정통 선비의 품격까지 갖춘 그는 베이징 유학시절에 접한 중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지사적인 품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시풍에 대해 혹자는 유교적 선비정신을 벗어나지 못한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시라는 비판도 하지만, 도리어 직설적 저항 시들이 빠지기 쉬운 치졸하고 좁은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3. 문학사적 의의

 

이육사는 생을 통틀어 36편의 시만을 남겼지만 그의 시는 청년기 된 이후, 거의 전 생애를 걸친 투옥과 온갖 고문의 와중에서 써내려간 귀중한 유산이다. 이 중 대여섯 편의 시는 윤동주와 함께 일제 말 우리 민족문학기의 공백을 메워준 대표적인 절창이다. 억압된 현실, 민족말살의 참담한 역사적 상황을 비굴하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한 투쟁의 삶을 살았고, 대쪽 같은 곧은 의지를 시로 승화시켜낸 시인의 소리이며 구국의 노래였다. 생전에 시인의 시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해방 이듬해인 1949 1020일 신석초를 비롯한 문우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었고 아우인 이원조가 광복이후인 1946년 서울출판사를 통해육사시집을 발간한다.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의 낙동강 곁에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자랑스러운 그의 일생과 시 광야가 새겨져 있다. 광야는 그가 사망한 뒤 동생이 수습한 절명시다.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전문

 

 

 

 

 

 

 

 

 

 

 

 

 

 

 

 

4. 남겨진 이야기

 

. 이육사의 집안 자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가 많기로 유명하며, 그 중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경성 트로이카로 유명한 이병희와 이효정이 있다.

 

. 형제 중 4째인 동생 이원조는 동란 후 좌파문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서 고위직에 임용되기도 했지만 훗날 박헌영과 함께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 속에서도 1955년 정치법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이육사의 막내인 딸 이옥비여사(1940-)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외삼촌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간 뒤 고문에 못 이겨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거나 다치자, 크게 분노한 이육사가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려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외삼촌 안병철은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으며, 부인 안일양 여사도 미안함과 수치심으로 수차례 음독자살을 기도 했으나 시어머니의 위로와 온갖 배려로 모진 시간을 견뎠다고 한다.

 

. 잦은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몹시 쇠약해진 이육사는 한학자인 사촌형 이종형이 살던 경북 포항시 남구 청림동에 잠시 휴양 왔는데, 이곳에 있던 60만평 크기의 동양 최대 청포도 농장을 보며 그의 시 청포도를 창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 대구교도소 수감 당시의 수감번호 이육사는 한자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담았는데

초기에는 한국을 침탈한 일제를 증오하는 의미로 (죽일 육) (역사 사)  일제의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로 썼는데, 일본경찰의 더욱 심한 탄압을 걱정한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뜻을 순화한 육사陸史로 사용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제가 한글 사용을 규제하자 이에 저항해 한시漢詩를 쓰기도 했다. 많은 문인들이 오랜 탄압과 기대할 수 없는 막연함으로 신념을 버리거나 변절하여 친일의 물결에 휩쓸려갈 때도, 조국의 미래를 강건히 지켜낸 민족의 양심이자 광복의 그 날을 향해 끝까지 불태운 그의 신념은 강철 같은 의지였다. 시인임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이육사는 진정한 애국자이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문학인이다.

 

. 그의 형제는 형 이원기와 남동생으로 이원일, 이원조, 이원창, 이원홍이 있었으며 자녀로 이동윤, 이옥비 11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어려서 세상을 떠난 후 양자로 이동박을 두었다.

그의 묘소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산 4-1에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북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청포도 전문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는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 갔소.

 

- 강 건너간 노래 전문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라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 자야곡子夜曲 전문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2009.09.09.)

2. 이육사-투사의 길과 초극의 인간상 (조창환, 건국대학교 출판부1998)

3. 한국현대시대백과

4. 두산백과

5. 이육사 문학관http://www.264.0r.kr

6.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글쓴이;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 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 문학생활관 ]

 

 

[ 문학정신관 ]

 

 

 

 

 

 

[복원된 이육사 생가 - 육우당]

 

 

 

 

 

 

 

 

 

 

 

 

 

 

 

 

 

 

 

[ 원촌마을 ]

 

 

 

 

원촌마을

 

 

이육사 시비(詩碑)와 생가터가 있는 원촌마을은 퇴계 선생의 5대손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 1681~1761)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세간명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속진(俗塵)과 치욕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이곳을 원촌(遠村)이라고 부른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에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어 옛날의 정경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목재고택(穆齋古宅)과 원대구택(遠臺舊宅)을 비롯한 몇 곳 정도이다. 이육사 생가와 치암고택은 안동 시내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목재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의 옛집으로서, 이만유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사은 이귀운(仕隱 李龜雲, 1681~1761)의 증손자인데,1858(철종 9)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여 종2품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특히 그가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기에 택호를 '영해댁(寧海宅)' 또는 영감댁(令監宅)’이라 하였다고 한다

목재고택은 정면 5칸에 측면이 6.5칸이나 되는데, 팔작지붕을 이고 있어. 특이한 점은 대문채(행랑채)가 안 보인다는 것인데, 옛날에는 솟을대문을 가진 대문채(행랑채)가 있었지만 수몰로 유실됐다고 한다. 사랑채는 전면 5칸 가운데 맨 오른쪽의 광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반 칸의 툇마루를 설치한 후에 왼쪽부터 1칸 크기의 작은 방 2개와 2칸 크기의 사랑방 1개를 들였다. 그리고 맨 왼쪽 작은 방 앞 툇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러 품격을 높였다. 사랑채의 쪽마루에 위에 아주 굵은 해서체로 '목재(穆齋)' 그리고 이헌(怡軒)’이라 적힌 두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 사은구장  ]

 

 

 

 

사은구장

仕隱舊庄

 

요약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도산면(陶山面) 원천리(遠川里)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 가옥이다.

 

 

정면 5, 측면 6, 후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귀운(李龜雲, 1744~1823)이 살던 집으로 별도의 문간채 없이 정침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앞면의 건물은 중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3칸의 사랑채가 있으며 왼쪽에 1칸의 마구간이 있다. 2010년 안동시가 비지정 문화재 중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안동시 문화유산으로 추가 지정할 때 함께 지정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앞면의 3칸을 1칸 반씩 나누어 각각 온돌방과 마루를 들였으며, 마루 뒤에는 다시 1칸 크기의 방을 들였다. 각 칸마다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마루와 만나는 측면에는 들쇠에 걸 수 있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방 처마 밑에는 창암(昌庵)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안방은 대청과 직교하여 놓여 있으며 안방과 연접하여 부엌을 배치시켰다. 안방에는 앞면과 뒷면에 띠살문 여닫이를 달았으며 대청 우측에 있는 1칸의 상방에도 앞면과 뒷면에 띠살문 여닫이를 달았다. 상방에 연결되어 1칸 크기의 광이 있으며 광 옆에는 띠살문 여닫이를 설치한 1칸 크기의 방이 있다. 이 방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중문이 있어 밖으로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귀운은 본관 진성(眞城), 자 응서(應瑞), 호는 사은(仕隱)이다.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벼슬길에서 숨는다는 뜻으로 사은(仕隱)이라 하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李滉)8세손으로 1786(정조 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포서직장을 거쳐 병조정랑,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조정랑(吏曹正郞), 영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801(순조 1)에는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양산군수,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호조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만년에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두피디아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 시인 이육사와 딸 옥비 여사의 고향 마을 안동 원촌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이름이 옥비인 분이 경북 안동에 살고 있다. 한자로는 沃非. ‘기름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윤택하게 살지 말라는 당부가 담긴 이름이다. 시인이고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1941, 막 백일이 된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3년 후 중국 베이징의 추운 감방에서 고문받은 흔적이 역력한, 피투성이의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광복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 세 살짜리 딸을 껴안고 아빠 갔다 오마!”라고 볼을 비볐다. 그 아기 이옥비가 올해 일흔 살이 되었고 여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안동 원촌의 이육사문학관을 지키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이옥비 여사에 관련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해마다 116일 조촐하나 진지하게 열리던 순국 추모행사에도 참석하곤 했다. 동지 지나고 한 달 후쯤이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 그날 육사를 추모하는 이들은, 들어올 땐 추위에 퍼렇게 질렸다가 곧이어 회한과 참담과 자괴로 다시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그들은 곁에 앉은 사람과 베이징은 안동보다 얼마나 더 추웠겠느냐, 이런 날 감옥에서 온몸에 피가 낭자하도록 얻어맞으며 버틴 힘은 과연 무엇이었겠느냐,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이뤄낸 독립인데 우린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 거냐같은 말을 낮은 소리로 두런거렸다. 그럴 때 이옥비 여사는 단상 아래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해맑을 정도로 담담히 감정을 갈무리하는 육사의 한 점 혈육을 보며 참석자들은 섣불리 눈물을 보일 수도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딸

 

육사 이활, 또는 이원록! 그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남긴 시로 청포도광야절정이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이육사가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그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후손들은 어떻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 팍팍하거나 너무 여유가 없다. 또 우리는 역사에 무관심하다. 하긴 역사랄 것도 없다. 바로 엊그제같이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1943년 봄에 베이징에 가셨는데 7월 할머니와 맏아버지 소상에 참여하러 안동에 오셨다가 붙잡혀서 다시 베이징으로 끌려가신 모양이에요. 국내가 아니라 베이징으로 압송된 걸 보면 충칭과 옌안 등지에서 무기를 사서 국내로 반입하려는 계획이 탄로난 것 같아요. 체포되기 전 어머니께 세상이 좋아지면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러시아 지폐를 몇 장 주셨대요. 아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난생처음 받아본 돈이었을 거예요. 그것도 나중에 순사에게 뺏겨버렸다지요.”

 

내가 옥비 여사에게 듣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 육사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관한 기억과 딸인 옥비 여사 자신의 삶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남자들이 서울로, 만주로 떠나간 후 빈집과 조상과 아이들을 지켜야만 했던 여자들의 사연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버린다. 옥비 여사가 더 나이 들기 전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해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독립운동 하는 남편을 둔 요시찰 인물이니 순사가 자꾸 어머니를 찾아왔대요. 어머니는 나는 소박데기다. 설령 남편이 조선에 와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대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잡혀가서 면회를 갔더니 그 순사가 소박데기가 어찌 면회를 오느냐고 따졌대요. 어머니는 조선은 예가 높은 나라다, 암만 소박을 맞아도 남편이 고초를 당하는데 돕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면 소데스까하면서 물러선대요.”

 

2004년 육사문학관 개관 당시 옥비 여사는 일본에 있었다. 니가타 총영사관 사택에서 한식(궁중음식)과 꽃꽂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막 위암 수술을 끝낸, 38의 몸으로. 궁중음식은 어머니께 배운 솜씨였고 꽃꽂이는 평생 의탁해온 취미였다.

 

남편(양진호씨)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쌍둥이 손자들이 왔다가서 배웅하고 들어오니 방금 멀쩡하던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더군요. 우린 평생 참 의좋게 살았어요. 제가 하겠다고 하면 뭐든지 밀어줬고 언제나 제 기를 살려주는 남편이었어요. 평생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견딜 수가 없데요. 암 걸린 나를 살려놓고 자기만 가버렸으니. 마침 총영사관이 직원을 구하고 있다기에 지원을 했지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가 옥비 여사 나이 쉰아홉이었다. 영사관에서 3년을 일했고 일본 전역에 김치를 판매하는 대리점에서도 일했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들이 둘 있지만 혼인해서 각자 살고 있으니 내가 필요할 시기도 아니고! 기념식에 참석하러 잠깐 나왔던 거예요. 그러나 원촌에 와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산천도 좋고 인심도 좋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지요.”

 

이육사문학관 지킴이

 

처음엔 일어통역관의 자격으로 문학관 식구가 됐고, 요즘은 상임이사의 직함을 갖고 있다. 예약을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직접 나서서 아버지의 삶과 정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 내려올 때 미리 동박이한테 양해를 구했어요. 문학관에서 오라고 하는데 내가 가도 네 마음이 섭섭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지요. 동박이는 아버지의 양자입니다. 실제 어머니를 모시기도 했고, 지금도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아들이지요.”

 

오래되고 사연 많은 가문이니 이야기는 돌돌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베이징 감옥에서 아버지 시신을 인수한 사람이 이병희 선생이에요. 고향이 부포이고 저희 집안이신데 백부가 백농 이동하 어른이고 부친이 이경식 어른으로 모두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와 최후를 함께한 동지로 같은 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 먼저 풀려나와 있었대요. 매우 미인이시고 아버지와 베이징 주소가 같이 돼 있어 나중 독립운동사 공부하는 이들은 둘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지만 안동에서 집안끼리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해요? 이병희 선생은 그날 아버지가 소개해준 군사간부학교 후배와 선을 보기로 돼 있었대요. 그런데 감옥에서 안면이 있는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고 연락이 왔대요. 달려가 봤더니 옷이 피로 낭자하게 젖었더래요. 눈을 못 감고 계시더래요! 불과 며칠 전에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시집을 가라고 권하던 사람이!”

 

그날 이병희 선생은 베이징 근처 화장장으로 육사를 실어 날랐다. 가진 돈이 없어,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죽여놨으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간수를 협박해 화장장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 간수는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이었대요. 시체를 그냥 없애버려도 무방했겠지만 자기 딴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하도 애통해서 이병희씨에게 연락했던 거겠지요. 그러나 이병희 선생은 화장해서 유골함을 받아 안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대요.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이고 친척인 이귀례씨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며칠 전에 해산을 했대요. 그 집으로 유골을 안고 가서는 신생아의 머리맡에 아버지 유골을 두고 둘이서 통곡을 했답니다. 이귀례씨는 소설가 임화의 부인이지요.”

 

독립운동가 양산한 땅

 

한편 소식을 들은 서울에서는 동생들이 모여 다섯째 집 원창의 셋째아들 이동박을 육사의 양자로 삼자는 논의를 끝내고 유골을 모시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유골은 수유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이곳 원촌의 고향 뒷산에 모셔진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향으로. 옥비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소복을 입으라고 해서 입긴 했지만 아버지의 이장보다는 산천에 가득 핀 진달래가 아름다워 탄성을 질러대던 소녀였다.

 

원촌은 특별한 땅이다. 앞에 강이 흐르고 뒤에 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풍수적 길지로 퇴계의 후손들이 대대로 군자 되기를 염원하며 살아왔다. 육사는 퇴계의 14세손이다. 성리학의 경지가 높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족지조일 것이다. 자족은 문학이 되고 지조는 저항이 된 것 같다. 안동은 돌뿌리 하나에까지 퇴계학맥이 흐르던 곳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이 여기서 열렸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다.

 

안동 1개 시가 320명이라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어요. 1910년 국치를 전후해 자결 순국한 90명 중 10명이 안동 사람이지요. 거기다 이곳 원촌과 이웃마을 하계는 독립운동가를 양산한 곳이에요. 일제강점 이후 비분강개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치암 이만현이 바로 이웃에 살았고 아버지와는 8촌이었죠.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하계의 향산 이만도도 집안 어른이셨어요. 그러니 그 어른의 동생, 아들, , 며느리 손자들이 모조리 항일 투쟁의 대열에 나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이곳에서 항일은 나라를 찾으려는 애국이라기보다 차라리 가문의 자존심이었고 가족 간의 단합에 가까웠다. 아무도 눈앞의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육사의 외가 역시 이름난 의병장 집안이었다. 외조부 허형도, 외종조부 왕산 허위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의병장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여섯 아들을 어떻게 길렀을지 손에 훤히 잡힌다. 내 죽거든 울지 마라. 나라 잃은 백성은 부모 죽음에 눈물 흘릴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안중근에게 옥에서 죽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가 있었듯 육사에게도 일경에 붙잡혀가는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육사의 외숙들도 모조리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육사에게 영향을 미친 이는 외삼촌 허규였다고 한다.

 

우리 진외가인 허왕산의 후손들은 독립운동 하느라 모조리 만주나 소련으로 떠나버렸어요. 지금 국내에 남아 있지 않아 산소를 돌볼 사람조차 없어요. 아버지의 외사촌 여동생 허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됐지요. 그 시어머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영감집 이만유 어른의 따님이시고! 안동 독립운동의 중심인 임청각(석주 이상용의 본가)이 아버지에겐 외사촌집이고 재종고모가였어요. 아버지는 폐가 안 좋으셨는데 요양하느라 한때 임청각에 머물고 계셨대요. 그때 서울에서 나운규 선생이 내려와 영어를 가르쳤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세요?

 

두 가지가 기억나요. 토종 계란빛이 나는 양복을 입으시고 가운데 가르마를 타신 모습! 꿈결처럼 그런 영상만 남아 있었는데 나중에 신석초 선생이 가져온 사진을 보니까 아버지가 실제로 그런 양복을 입고 계시데요. 또 하나는 포승에 묶여 용수 같은 걸 쓰신 모습이었어요. 전에는 죄수를 이감할 때 얼굴에 길쭉하게 생긴 통을 씌웠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인데 그날은 잊히지도 않아요. 삼덕동 집 앞에 나갔는데 죄수들이 한 무리 포승줄에 묶여 용수를 쓰고 지나가는 거예요. 정신이 아득해져서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어요. 그 죄수들의 모습이 어려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와 똑같았거든요. 어머니한테 말했더니 니가 그걸 기억하는구나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셔요. 이감된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라도 보자고 어머니가 형무소 앞으로 달려 나갔는데 이웃에 살던 종조부가 옥비도 데려가라. 마지막 길일지도 모르는데 애비 얼굴이라도 보게하셨대요. 그래서 세 살 난 나를 업고 가셨대요.”

 

그게 뇌리에 남아 있다가 십수 년 후 용수 쓴 죄수를 보자 돌연 살아난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현실에서 사라졌지만 아예 흔적도 없어진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집안을 들락거리며 육사에 관해 온갖 얘기를 했다.

 

신석초 선생이 문단에선 아버지와 제일 친했대요. ‘너 아버지는 말술을 마시는 호주가였는데도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밤에 불을 끄고 15분 만에 권총 6자루를 조립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아버지는 난징 근처에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1기 졸업생이었어요. 그때 학교에서 백발백중 소문난 명사수였대요. 체포되기 직전에 베이징에 가셨던 건 아마도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반입해서 누군가를 암살할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이병희 선생을 만나 아버지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어요. 일본대학 전문부에서 공부하실 때는 그곳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곧잘 독립선언문을 낭송하셨대요. 선언문이 선동적이고 치열하잖아요. 학생들의 애국의식을 북돋우려고 애쓰셨던 거지요.”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그렇게 신화가 되어갔지만 머리 한번 쓰다듬어줄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었다.

 

남들은 아버지가 시인이고 독립운동가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속으로 늘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죠.”

 

옥비 여사는 제일여중과 대구여고를 다녔다. 해마다 국어 선생님이 바뀌면 네가 육사의 딸이냐고 묻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싶었다. 늘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아이들은 내가 서울서 전학 온 줄 알았대요. 하도 말을 안 해서! 1학년 때 공민선생이 시를 읽게 하고 친구를 만들어줬어요. 그분 덕분에 저도 모르게 성품이 밝아졌어요.”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니 외로우셨겠어요?

 

웬걸요. 우리 집은 밥 먹는 식구가 언제나 스물이 넘었어요. 대구 살 때 주소가 삼덕동 88번지였는데, 우리 집을 다들 88여관이라고 불렀지요. 어머니 생업이 하숙 치는 일이었는데, 친척이 시골에서 올라오면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왔거든요. 어머니는 13남매의 맏딸입니다. 큰 집안의 맏딸답게 배포가 크셨어요. 아마도 가을에 쌀을 사뒀다가 봄에 파는 일도 한 것 같은데 방에 쌀가마니가 가득했어요. 그래서 난 우리가 부자인 줄 알고 이웃집에 그걸 몰래 퍼다주곤 했지요. 어머니 윗대 외할아버지 형제도 13남매였으니 이모와 이종들이 다 모이면 외가는 식구가 100명도 넘었어요.”

 

강철 무지개 같은 삶

 

가족이 지금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이었고 씨족이 집단적 힘을 가질 때였다. 형제와 사촌과 육촌, 심지어 팔촌까지가 한 지붕 아래 자라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머니는 집안에 계셨으나 돈을 모르는 분은 아니었어요. 하숙도 치고 삯바느질도 하고! 그래도 늘 여자 벌이는 쥐벌이고 남자 벌이는 소벌이라고 하셨어요. 여자가 버는 돈은 모이지가 않는다는 거지요.”

 

어머니 안일양씨는 15세에 육사와 혼인했다. 영천 화북면 오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대구에서 백화점도 운영하는 부잣집 딸이었다. 원촌 양반과 영천 부자의 결합이었던 것 같다. 육사는 처가에서 설립한 백학학원에도 잠시 다니고 한때 그곳의 교사 노릇도 한다. 그러나 뜻을 멀리 둔 남편이었다. 잃은 나라를 찾겠다고 평생 바깥을 떠돌았으니 알콩달콩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친정 집안을 우습게 여겼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큰외삼촌이 아버지와 군사간부학교 1회 동기생이에요. 그런데 외삼촌이 일경에 잡혀가서 고문에 못 이겨선지 겁이 나서인지 동지들의 명단을 불었고, 외삼촌 검거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줄줄이 잡혀갔대요. 아버지는 이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나 봐요. 장인과 처삼촌에게 봉장, 소장 보시오라고 편지를 써서 비겁한 핏줄과는 함께 살 수 없으니 안일양을 데려가시오했대요. 어머니는 이때 하도 수치스러워서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고 했답니다.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으면 살 수가 없었대요. 어머니는 할머니를 시어머니가 아니라 스승이었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나중엔 결국 할머니 때문에 두 분이 화합하셨지요.”

 

육사는 1904년생이다. 1944년 옥사했으니 딱 마흔 해를 살았고 그동안 무려 17차례나 일경에 검거된다. 시가 그렇듯 삶도 강철로 만든 무지개같을 수밖에 없다. 육사의 시 절정을 읽으면 나는 몸에 온통 소름이 돋는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절정이 쓰여진 곳이 원촌 마을 앞에 높이 솟은 바위벼랑 칼선대라고도 하지만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할지, 한 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던 그의 쫓기는 심상이 선연해서 머리칼이 곤두선다. 그랬으니 허튼 처남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어요. 그 후 어머니는 평생 백의만 입고 사셨어요. 비단도 걸치지 않고 무명만 입으셨죠. 내가 자꾸 색옷을 권해드려서 환갑 지내신 이후 처음 무색옷을 입으셨어요. 처음엔 회색 옷을 입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긴 했지요.”

 

남의 옷을 바느질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옷은 물론 손수 지어 입으셨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빼어나기로 이름이 자자했다.

 

대구의 김태원씨라고 교남학교를 설립했던 부잣집에 잠시 침모로 들어가신 적도 있어요. 비단 두루마기를 한 달에 40~50벌 지으셨대요. 나 어렸을 때 몇 번은 만주에도 왔다갔다 하신 것 같아요. 외삼촌이 거기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옥비 주라고 사 오신 빨강색 비단 원피스가 있었어요. 분홍색 모자하고! 그 옷을 입고 만주 가는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어요. 눈 아래로 두만강 황토물이 출렁출렁 흘러가던 것도 기억나고! 중국거리에서 수박장수가 시괄러’(수박 사려)하면서 지나가던 것은 지금도 생생해요.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순사가 다가오면 나 혼자 앉혀두고 얼른 화장실로 피신해버려요. 기차 천장 아래 짐칸에는 어머니가 올려놓은 짐들이 하나가 아니라 아주 여러 개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어찌나 걱정되던지! 더구나 내 바지 허리춤엔 어머니가 바늘로 꿰매어 놓은 돈이 들어 있었거든요. 그때 하도 가슴을 졸여놔서 나중에도 경찰만 보면 늘 가슴이 졸아붙곤 했어요.”

 

6형제의 육우당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방이 10칸인 대구의 삼덕동 집을 샀다고 한다. 어머니의 큰 집안 장녀다운 기질은 전쟁 중에 여실히 드러났다.

 

할머니 셋에 외사촌, 이종해서 모두 25명이 함께 피난을 갔어요. 어머니는 미리 헝겊으로 수건을 만들어 미숫가루와 주소 쓴 쪽지와 수건을 넣어 한사람이 하나씩 매게 하셨어요. 어머니가 엄하니까 아이들은 아무도 징징거리지 않고 비행기가 뜨면 부엌바닥에 깔아둔 양단이불 속으로 일사불란하게 숨었어요! 덕분에 전쟁이 끝날 때 25명이 다 무사했지요.”

 

육사 6형제의 우애는 안동 인근에서 소문난 것이었다. 여섯 형제의 우의를 잊지 말자고 집 이름도 육우당(六友堂)이라고 붙였을 정도다. 원래 원촌에 있던 육우당은 안동댐으로 수몰돼 시내로 옮겨졌고 지금 육사문학관 뒤쪽의 육우당은 나중에 그걸 본떠 새로 지은 집이다. 여섯 형제는 하나같이 재주가 빼어났다. 맏형 원기는 이름난 한학자로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고 둘째 원록이 바로 육사였고 셋째 원일은 빼어난 서화가로 역시 여러 차례 투옥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넷째 원조는 도쿄 법대 불문과를 졸업한 평론가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며 다섯째 원창도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했고 막내 원룡은 전국 미술경연에서 일등을 하던 날 형제들과 축하잔치를 벌인 후 아깝게 요절한다.

 

그러다가 육사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버렸으니 형제들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삼촌들은 어린 옥비를 만나기만 하면 끌어안고 울었다.

 

그때는 전화가 없을 때잖아요. 서울서 삼촌이 내려온다고 편지나 전보를 쳐요. 요즘처럼 교통이 편리할 때도 아닌데 어머니와 저를 보러 걸핏하면 내려왔어요.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겠지요. 그러면 나는 삼촌들이 끌어안고 우는 것이 싫어서 미리 이웃으로 도망을 쳐버리곤 했어요.”

 

그러나 이 아름답고 재주 많은 육형제를 우리 역사는 산산이 부숴버린다. 둘째 육사는 옥사했고 셋째 원일과 넷째 원창은 광복 후 남로당원으로 북으로 올라가서 권력투쟁의 와중에 숙청당했으며, 베이징에서 육사의 유골을 안고 왔던 다섯째 원창 또한 6·25 무렵 해주 어디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셋째 집은 사촌이 둘이었는데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사촌언니는 당시 아홉 살이었는데 한지로 두루마리를 만들어 가사를 줄줄 지어내곤 했어요. 그 두루마리를 보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까워요. 그 언니는 어려서 죽고 그 아래 동선이란 오빠는 아버지를 찾아서 나중에 북으로 올라갔어요. 동선오빠가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시장이 됐다는 말도 한때 들렸어요. 거기서는 독립운동 했던 이력을 우대해주니까 본인이 육사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모양이에요. 육사의 아들이 북한에 있다는 말을 추적했더니 동선 오빠더래요. 물론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얘기가 아니지요. 큰집 사촌오빠가 부산대학의 이동녕 교수예요. 그 오빠가 우리 집 내력을 제일 많이 알지요.”

 

바느질과 궁중음식 전문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옥비 여사는 옛이야기를 디테일을 정교하게 살려가며 옮겨놓는 재주가 있다. 원촌의 밤은 깊어가는데 지치지도 않고 도란도란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도 원래 글을 쓰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느질을 배워 시집가라고 재봉틀을 사주셨어요. 콩단지에 돈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걸 훔쳐서 서울로 올라가 이화여대에 갈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지요. 내가 그런 배짱이 없어요. 어머니가 걱정되기도 하고! 대신 2년제 경북여대에 갔어요. 돈이 없으니 장학금을 주는 학교를 찾았던 거지요.”

 

그러다 시청에 다니던 외사촌 오빠가 소개해준 남자를 만나 혼인한다. 경산 자인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신랑감을 맘에 들어 하셨다.

 

신부 옥비에겐 혼인 조건이 있었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 당시만 해도 처부모를 모시는 것이 생소할 때였다. 그러나 신랑 양진호는 쾌히 승낙했고 평생 장모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았다.

 

우리 남편은 장모를 통해 인생을 새로 발견했다고 말하곤 했어요. 원래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머니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차츰 마음을 열어가더라고요. 나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우리 집에도 늘 친척들이 서너 명씩 같이 살았어요. 처음엔 그걸 불편해하던 사람이 나중엔 마음을 넓게 쓰게 됐지요.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인데 휴가를 가도 꼭 이종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즐거워했어요. 처음엔 시청 공무원이었는데 당시 도로공사가 처음으로 공채를 했어요. 1300명이 응시해서 3명을 뽑았는데 남편이 거기 합격했지요. 그래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고 나중엔 건설회사로 옮겨 사장까지 하고 퇴직했습니다.”

 

옥비 여사는 어머니의 바느질과 음식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한때 청담동에서 옥비당이란 상호로 폐백음식을 만드는 가게를 연 적도 있다.

 

장사가 곧잘 됐지요. 그랬는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가 없데요. 비자가 나오자마자 일본으로 떠났으니까. 우리 어머니는 음식을 엄상궁에게서 배웠대요. 넷째 숙모는 덕혜옹주의 6촌 동생이었어요. 궁에서 자랐지요. 당시 궁중에선 음식 먹을 때 입는 수라복이 따로 있었다고 하대요. 숙모 집에 엄상궁이 자주 와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우리도 명륜동에 살아서 눈썰미 있는 어머니가 곁에서 거들며 궁중음식을 배우셨대요. 나중엔 어머니 솜씨를 내가 물려받아 신선로니 구절판이니 문어오림 같은 궁중요리를 모조리 할 줄 알게 됐지요.”

 

다시 발견한 고향

 

일본에 있을 때 옥비 여사는 구약과 신약을 꼼꼼하게 세 번을 필사했다. 두 번을 베껴 쓴 노트를 덮을 때 비로소 헤매 돌던 마음이 안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로 녹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새롭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 같다고 했다. 전에는 불편하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의 위대성을 재발견하게 됐다. 요즘 옥비 여사는 육사문학관 주변에 꽃을 가꾸고 시비(詩碑)와 동상을 돌보며 화평과 자족을 맛본다.

 

어려서 그토록 아쉽던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듬뿍 받고 있어요. 육사문학관에 오시는 분들이 아버지의 시와 삶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내게로 흘러오는 것을 느껴요. 이제 비로소 육사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며 간디처럼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 옥비잖아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엔 어림없지만 그 뜻을 잊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육사문학관이 놓인 원촌은 안동댐 수몰지역이다. 즐비하던 기와집들은 사라지고 고지대의 몇 집만 남아 있다. 그런데 막상 댐을 만들고 보니 원촌 들이 잠길 만큼 댐 수위가 높지는 않았다.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고 육사가 노래했던 바로 그 들이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울 광야이기도 한 그 들을 태연하게 수몰해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뒤늦게 반성이 일었다. 지금 안동시는 마을앞 쪽으로 제방을 찾아 그 땅을 되살려낼 계획이라 한다. 더디겠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도 이렇게 실수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 김서령의 여기 사는 즐거움

글출처 -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신동아 (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