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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밀도: 미래농원과 사유원 답사기

공간의 밀도: 미래농원과 사유원 답사기

 

  •  제295호 11면
  • 입력 : 2024-01-01 13:26
  • 수정 : 2023-12-2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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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농원은 「대구 북구 호국로 300-22」 소재의 전시·문화·예술 등 다양한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사유원은 「대구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50」에 위치한 수목원으로서, 오랜 나무들과 석상, 아름다운 건축물이 함께하는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다.

 

 삶에는 때론 멈춤의 계기가 필요하다. 폭주 기관차처럼 맹렬히 질주하는 삶의 흐름은 어느 순간 쉼표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급작스레 멈출 때, 이 틈으로 솟아난 고요의 순간을 마주할 때 사유는 열린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사유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정지도 포함된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이런 생각의 정지, 사유의 촉발에 건축이 이바지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사유란 고요하고 차분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유란 폭력과 같은 것이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어떤 대상과의 마주침을 통해 발생한다. 이 우발적 사건이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나에게 폭력을 가할 때 사유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이는 연애에 비유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연인의 이별 통보는 우리를 격렬한 사유의 소용돌이로 몰아세우기 마련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진실을 찾는 자는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의 기호를 알아채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프루스트와 기호들』) 훌륭한 건축은 우리 모두를 질투에 빠지게 만든다. 좋은 건축은 사유를 촉발하고, 이에 자극받은 이들은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진실을 찾아 나서게 된다. 미래농원은 이런 진실을 찾아 나서는 신세대의 성지요, 사유원은 기성세대의 성지라 할 만하다. 유쾌한 수다냐 무거운 침묵이냐, 미래농원과 사유원의 건물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래농원은 가느다란 기둥 위에 부유하는 매끈한 노출콘크리트의 투명함과 가벼움이, 사유원의 건물은 지하로 가라앉은 거친 노출콘크리트의 질감과 짙은 어둠이 지배한다 모두 노출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물성을 극대화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각각 미니멀리즘과 브루탈리즘 건축을 떠올리게 한다. 르코르뷔지에의 유명한 돔-이노 시스템은 기둥과 슬래브로만 이루어져 있다. 보를 없애고 점토질 블록을 이용해 중공슬래브처럼 만들었는데, 이 블록은 슬래브를 평활하게 만들기 위해 평슬라브에 묻었다.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후대 건축가들은 이런 평평하고 단절 없는 슬라브에 매료되어 자유 평면의 연속성과 미니멀한 건축적 조형성에 몰두하였다. 그들이 택한 주요한 디테일 전략은 중간 레벨의 디테일을 제거하거나 일부 요소를 숨기거나 일부 요소를 과장하는 것이다. 미래 농원의 경우가 그렇다. 보를 숨기되 기둥은 45도 돌아서 마름모꼴로 강조되고, 중간 레벨에 해당하는 수벽, 돌출된 처마, 회랑, 벤치같은 건축적 요소는 과장된다. 이 모든 것은 조각같은 조형성과 시각적 강렬함을 위한 것이다.

 

 건축사사무소 SOA(강예린, 이치훈)가 설계한 대구 미래농원은 오래된 조경수 농원에 카페와 전시관을 겸한 문화복합 공간이다. 건축은 땅을 자르고 구획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알려주듯, 건물 하나를 넘어 대지 전체를 주변 도로의 소란스러움을 차단하는 담장으로 두르고, 타원형과 사각형의 단순 기하학 매스를 통해 정리해 내는 과감함과 탁월함을 보여준다. 직사각형 안에 타원형, 타원형 안의 직사각형 매스가 교차하는 건물 두 동은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이 엇갈리며 나란히 배치되어 서로 교차한다. 특히 번잡한 대지의 조건들을 하나로 묶는 타원형의 중정은 흐드러진 조경수와 대비를 이루며, 하나의 질서로 묶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정을 통해 받아들인 하늘의 빛은 실내로 투명하게 스며들고 다시 외부의 숲으로 발산된다. 타원형의 중정을 둘러싸고, 수벽을 내려 띠를 두른 듯 타원형의 선형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중정을 둘러싼 회랑과 계단은 건축적 산책로를 형성하며 주변의 환경과 마주치는 건축적 경험을 만들어냄으로써, 노출콘크리트의 조형성과 미니멀함을 동시에 부각하고 있다.

 

 미래농원이 잘 가꾸어진 큰 정원이라면, 사유원은 거대한 장원이다. 사유원은 여러 유명한 건축가, 조경가, 조명가, 석공, 서예가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진 거대한 원림과 같다. 1950, 60년대 브루탈리즘 건축의 목적은 에드워드 R. 포드의 말을 빌리면, ‘순수한 콘크리트 또는 순수한 벽돌로 일종의 폐허를 짓는 것’이었다.(『디테일이란 무엇인가』) 사유원의 건물들의 거친 콘크리트 질감은 거대한 폐허처럼 파편화되어 있다. 팔공산 일대의 고즈넉한 산세와 다양한 나무와 풀이 빚어내는 풍경을 느리게 걸으며 폴리처럼 흩뿌려진 건물을 경험하는 일은 도시 속 번잡함에서 물러나 비로소 숨을 쉴 여유를 맞이하는 경험이다. 성지를 찾는 순례객처럼 그리 급하지 않은 산을 오르면, <소대>라 이름 붙은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솟대처럼 이정표의 역할과 이곳이 어디인지 전체 산세를 조망할 수 있게 하며 이웃한 <소요헌>으로 안내한다.

 

 사유원에서 가장 압권은 역시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와 카를로스 카스타네이라의 <소요헌>이다. 이 건물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원래는 마드리드에 세워질, 피카소의 그림 두 작품(게르니카, 임산부)을 전시할 전시관으로 계획되었지만 무산된 계획안이었다. 여기에 지형에 따른 조정과 스케일의 변화를 거친 후 건립되었지만, 장소성을 중시하는 건축가의 지론을 생각하면 다른 지형과 다른 프로그램에 대입시킨 것은 다소 의아하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특유의 단순한 선형의 매스와 우아한 곡선이 만드는 공간은 거대한 동굴과 같다. 신중하게 의도된 바에 따라 극히 부분적으로 빛과 풍경을 받아들인다. 한 갈래 직선은 지형을 따라 서서히 상승하고, 한 갈래 곡선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각각의 끝엔 피카소의 두 작품 대신 여기엔 탄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시자의 두 조각상이 있다. 무엇보다 거대한 볼륨감과 거친 노출콘크리트 질감이 뿜어내는 느낌은 압도적이다. 어둠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태초의 빛이라 했던가. 여긴 빛보단 어둠이 주제이다. 빛은 물질을 사라지게 만든다면, 어둠은 물질을 더욱 짙게 물들인다. 아울러, 공간을 다룬다기보다는 시간을 다루고 있다. 내부를 걷다 보면 공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지만, 그 시간은 일상의 흐름에 벗어나 있다. 공간의 틈 사이로 어느 순간 새로운 시간이 침범하고, 어느샌가 지붕과 벽체를 찢고 쏟아지는 빛을 보다 보면 시간이 멈추어 선다.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멈추고 정지하는 시간, 침범하는 시간 즉 사건적 시간이 도래한다. 건축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건축에서 공간은 시간이다. 건축에서 빛은 형태를 정의한다. 건축에서 동선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건축에서 거친 재료는 우아함을 전달한다. 건축에서 기능은 그곳에 존재한다. 건축에서 그림자는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건축이 사유를 촉발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특정한 개념에 대한 강요나 보충적 설명이 아니라, 건축이 만드는 감각의 우글거리는 힘들, 공간과 시간적 경험을 통해서이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를 통해 더 깊은 생명의 직관으로부터 솟구치는 거대한 힘들을 포착하는 것, 이런 점에서 진정한 사유는 기성의 확립된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 되지 않은 것, 비사유를 지향한다. 달리 말하면, 건축이 사유를 유발할 가능성이란 감각적인 것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건축적 강렬함을 담지 못한다면 어떤 사유도 촉발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지 못하면, 사유를 강요하는 무거운 이름들에 짓눌려 손쉽게 종교적 명상이나 SNS의 이미지로 도망가 버릴 것이다. 과시적 여가와 청교도적 청빈함 사이 어떤 모순도 느끼지 못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함마저 빼앗아 소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 MRNW(미래농원) (출처: 네이버)  

 

 

 

 

 

 

 

△ 사유원 (출처: 사유원 홈페이지)

  • - 이경창 건축사ㅣ구와미로 건축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