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삼릉숲
- 천년의 솔숲에서 신들과 노닐다
노천 박물관으로 유명한 경주의 남산은
보물 13점을 비롯해 숱한 문화재를 품고 있는 신라 문화유적의 보고다.
특히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불상과 탑은 세계 불교문화의 성지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런 신라의 보물 남산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곳이 남산 초입에 자리한
삼릉숲이다.
남산에는 소나무가 많은데, 특히 삼릉의 소나무숲은
신비한 분위기의 풍경을 연출해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모여드는
명소로 유명하다.
천년의 고도 경주를 더욱 빛내주는 삼릉숲으로의 아름다운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천년의 고도가 더 아름다운 이유
길었던 겨울이 가고, 입춘도 지나
계절은 어느새 봄의 문턱으로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잿빛이고, 무성한 신록은 아직 요원하다.
이럴 땐 늘 푸른 소나무 숲이 보고 싶다.
변덕스런 날씨에도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는
예로부터 지조의 상징으로 알려졌고,
애국가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네 정서와 밀접하고 그래서 친근하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1호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솔숲은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풍경으로 꼽힌다.
옛 문인들의 산수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흔하던 솔숲의 풍경을 요즘에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땅의 무성했던 솔숲들이 일제의 남벌, 6·25전쟁, 산업화 등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우리 곁에서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솔숲을 보려면 왕릉이나 사찰처럼 특별히 관리되는 숲을
찾아가야 한다.
보통 소나무 중 으뜸은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금강송을 친다.
금강송은 백두대간 금강산에서 경북 영덕에 걸치는
산악지대에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최근에는 광화문·숭례문 등 우리 문화재 보수에 쓰이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금강송을 보면 참 잘 생겼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삼릉의 솔숲은 좀 다르다.
늠름해서 장대한 소나무가 아니라 이리저리 구불구불 못생겼다.
그런데 이 못생긴 소나무들이 모여 정말로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은 마치 천년의 유물을 보호하듯
남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풍경이 절묘하다.
삼릉 앞 도로는 가로수가 소나무다.
배동 삼릉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반대편 남산자락 삼릉 입구로 건너 가려면
이 소나무 가로수길을 지나야 한다.
소나무가 가로수인 길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이탈리아의 고대도시인 로마에 갔다가
구름처럼 생긴 잎사귀가 인상적인 소나무들이 길가에 높게 늘어선 것을 보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분위기는 좀 달라도 경주와 로마, 두 나라의 대표적인 고대도시에
소나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혼자서 신기했다.
-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춤을 추는 숲
길을 건너 삼릉으로 이어진 진입로에는
굵직굵직한 소나무 수십그루가 산책로를 따라 도열하듯 서있다.
늠름한 그 소나무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곧 오른쪽으로 삼릉이 보인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 천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수한 노송들이 구불구불 춤추듯 서있다.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이웃해서는 55대 경애왕의 무덤이 있다.
이들 4개의 능 가까이에 늘어선 노송들은 마치 왕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호위무사처럼 보인다.
능쪽으로 비스듬히 얼굴을 내민 소나무들이 있어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실상은 햇빛을 좇아 비스듬히 자란 것이라고 한다.
삼릉숲의 소나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나무와는 생김새가 좀 다르다.
쭉쭉 뻗어 잘생긴 소나무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굵으면서 구불구불 제멋대로 휘어진 못생긴 노송들이다.
재미난 것은 이렇게 구부러진 소나무가 오랜 생명을 유지하며
남산의 터줏대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재미있다.
신라인들이 당시 서라벌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조성하다보니
곧은 소나무는 죄다 베어내 목재로 써버렸고,
휘어진 소나무만 남아 그 자손을 퍼뜨려서 지금의
울창한 숲을 이뤘다.
당시대에는 못생기고 쓸모가 없어 외면받았던 소나무들은
지금 남산을 대표하는 명물이 됐다.
이곳의 소나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현대판 솔거’로 불리는 사진작가 배병우씨다.
‘카메라로 소나무를 그린다’는 배병우 작가는
삼릉 소나무숲을 즐겨찾아 작품에 담았는데, 2005년엔 그의 소나무 사진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가수 엘튼 존에게 고가로 팔렸다.
그 뒤부터 촬영장소인 삼릉숲은
아마추어 사진작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른 새벽이면 그윽한 삼릉숲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 모여든다.
그렇지만 소나무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한 그루는 허전하고 여러 그루는 산만해 보이기 일쑤다.
배 작가의 작품만 떠올리고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실망을 안고 돌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나마 그런 실수를 만회해주는 것이 안개낀 새벽 풍경이 아닌가 싶다.
이른 새벽에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면 삼릉의 소나무들은
마치 무대에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모습을 두고 누군가는 ‘마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한 잔 거나하게 취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라고 했다.
두 팔을 벌린 채 잔뜩 흥에 취해 있는 신들의 모습이
삼릉숲을 더욱 신비롭게 해준다.
장구한 세월 함께 한 노천 불상과 소나무들
남산에는 삼릉 주변 뿐 아니라 산 전체에 소나무가 많은 편이다.
곳곳에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바위 암릉 사이에도 소나무가 울창하다.
또한 수많은 노천 불상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삼릉 위로 이어진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가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산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삼릉에서 시작하여 금오봉을 정점으로 절터가 가장 많은 용장골로 내려오는 코스로,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놓치면 아깝다.
대략 6.3㎞, 4~5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된다.
삼릉에서 500m쯤 올라 처음 만나는
머리없는 석불인 석조여래좌상에서부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용장사곡석불좌상.
‘미스 신라’로 불리는 마애관음보살상,
널찍한 바위에 선으로 여섯 불상을 새긴 선각육존불,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바위속에서 부처님이 튀어나오다 멈춘 것 같은 마애석가여래좌상
그리고 절벽 위에 장엄한 용장사지 삼층석탑까지,
밤 하늘 별처럼 빛나는 보석같은 유물들이 남산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그리고 그 곁을 장구한 세월을 함께 하며 소나무들이 지키고 있다.
소나무는 햇볕을 많이 받아야 살 수 있는 나무다.
내버려 두면 활엽수 등 다른 수종이 가만히 놔두지 않아
도태되기 쉽다고 한다.
앞으로 100년 뒤엔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학계의 주장은 믿기 싫지만
소중한 친구 소나무에 닥친 현실이다.
솔숲을 보존하려는 인간의 노력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다.
소나무가 사라진 삼릉숲 그리고 남산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천년의 세월을 소나무로부터 위안 받았던 것처럼
이제 인간이 소나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 글 출처 : 유인근 스포츠서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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