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건축 07 아야 소피아 박물관 2020.8
2023. 1. 18. 09:08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mmortal architecture 07
Ayasofya Museum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기독교를 탄압하던 로마제국에 변화가 생겼다. 306년 그리스도인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서방 정제로 추대된 것이다.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향했고 경쟁자들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서방에서 최고 실력자임을 확인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만나 상호 간의 동맹을 유지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이 여기서 발표된다. 하지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324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는 로마의 패권을 두고 일대 결전을 벌인다.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가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의 군대를 맞아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승리하자 로마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힘의 균형이 깨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잔인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나간 정치적인 사건들 때문에 기독교적 측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제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펼친 적극적인 기독교 진흥책으로 기독교의 위상이 새롭게 정립된 것은 분명하다.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로마와 같이 원로원과 공공건물을 세우고 새로운 로마 New Roma라고 불렀다. 비잔티움은 그의 사후에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되었다. 현재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고 황제가 된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360년 아버지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정교회 대성당을 건설한다. 몇 번의 재축과 증축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1700년 간 자리를 지켜온 이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지금의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고, 종교와 인종, 국적을 떠나서 세계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이 대성당이 바로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의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다. 지금은 터키어로 아야 소피아(Ayasofya)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전히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로 부르기도 한다.
첫 번째 아야 소피아는 360년 동방정교회 대성당으로 건립되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모습과 규모는 알 수 없고, 목조 지붕을 갖춘 건축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첫 번째 대성당은 불운하게도 50년을 못 넘긴다. 404년 총대주교를 추방하는 과정의 충돌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것이다. 10년 만인 415년(테오도시우스 2세) 다시 정교회 대성당으로 재축된다. 두번째 대성당은 첫 번째 대성당보다 오래 자리를 지켰지만,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532년 반란 중 발생한 큰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세 번째 대성당은 불과 5년 만에 재축이 완료된다. 세 번째 대성당을 재축한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는 이 세 번째 대성당에 정치와 종교,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상을 부여했다. 종교적으로는 정교회의 제일 격식을 갖추게 했고, 정치적으로는 황제를 상징하는 성당으로 동로마 제국 최고의 건축물로 재축한 것이다. 건축가 안테미우스(anthemius)와 수학자 이시도르(isidore)가 성당 축조에 참여했다. 이 세 번째 대성당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야 소피아(Ayasofya)와 가장 가깝다. 1500년 전인 537년의 일이다.세 번째 대성당이 완성된 6세기 모습은 성모 마리아, 예수, 기독교의 성자들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황금처럼 빛나는 모자이크는 비잔틴 문화의 결정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8∼9세기 성상파괴 운동(iconoclasm) 때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1202년∼1204년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구성된 4차 십자군은 이집트가 아닌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약탈한다. 십자군은 비잔틴의 보물과 대성당의 황금 모자이크도 약탈해서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정교회 대성당은 십자군의 침략으로 1204년부터 1261년까지 약 60년간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전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한다. 1453년 이전 대성당의 모습은 몇몇 그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네 개의 첨탑(미나렛)이 없는 모습이 조금 어색하지만,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로 불렸던 15세기 이전의 본래 모습은 첨탑이 없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대성당을 크게 변경한다. 외관상으로는 네 개의 미나렛(첨탑)을 증축한다. 겉모습이 달라졌고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내부는 총대주교 자택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를 철거하고, 메카 방향을 나타내는 마흐라브를 추가했다.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던 때보다는 큰 변화였다. 이름도 고대 그리스어 표기인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에서 터키어인 아야 소피아(ayasofya)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이슬람의 예배공간인 모스크(mosque)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되어 사용되면서 수천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예배공간이 증축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도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꾸어 사용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비잔틴의 화려한 황금 모자이크나 장식들은 회칠로 가려지기 시작했다. 17세기 아야 소피아를 방문한 여행자의 기록에서 예수 이미지에 대한 묘사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회칠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십자군의 훼손과 약탈과는 달랐던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겠다.
1차 세계대전 후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지금의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국가들은 대성당의 반환과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종교적 복원을 해야 한다고 터키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성당이 본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선 것은 미국인 토마스 휘트모어(Thomas Whittemore)였다. 그는 미국 비잔틴 연구소 (Byzantine Institute of America)를 이끌고 있었는데,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스탄불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회칠로 덮여 있던 모자이크 벽화를 복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조금씩 복구되며 드러난 모자이크 벽화를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야 소피아(Ayasofya)의 화려한 돔 내부
1934년 터키 공화국은 이 대성당을 인류 모두의 공동 유산으로서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이슬람 모스크에서 아야 소피아 박물관(Ayasofya Musesi)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가 모두 금지되었다. 천오백 년을 견뎌온 세 번째 대성당은 정교회 대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대성당으로 잠시 사용되었다가 정교회 대성당으로 복구되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개조되었다가 이제 모두에게 열려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동서와 종교를 떠나 모든 세계인에게 고마운 일이다.
아야 소피아(Ayasofya) 모습
최근 아야 소피아는 다시 정치와 종교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2020년 7월 10일 터키 최고 행정법원이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정한 1934년의 터키 내각회의 결정을 취소하는 결정을 발표한 것이다. 이 발표 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종교시설인 모스크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이 모자이크에 회칠했던 것처럼 터키 정부가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겠지만, 동서양의 문화와 종교의 결절점으로서 86년간 박물관이었던 아야 소피아가 종교시설인 모스크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걱정과 우려가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1700년 전 정치적 혼란 속에 두 번의 재축을 거쳐 부활한 아야 소피아. 국가와 종교가 바뀌는 혼란의 역사 속에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며 1500년을 이어온 세 번째 아야 소피아는 다시 정치와 종교의 태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부디 이번 시련도 잘 이겨내고 불멸의 건축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 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 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 젊 은건축가(문화체육관광부) 수상자이며, ‘얇디얇은집’으로 서 울시건축상(2019)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 겸 골목건축가이다.
불멸의 건축 07아야 소피아 박물관 2020.8 (kiramonth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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