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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잉카 02 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2020.7

 

안녕, 잉카 02 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2020.7

2023. 1. 17. 09:06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2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고지대와 저지대 유적으로 이뤄진 초케키라우

 

꼬마 마추픽추 초케키라우(3,033m) 유적지는 은둔의 신전이다. 잉카의 서쪽 관문으로, 3박 4일의 트레킹으로만 갈 수 있다. 살칸타이봉(6,271m)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마추픽추(2,430m)가, 남으로는 초케키라우가 서쪽 밀림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 마추픽추가 우루밤바강을 두르고 있듯이, 초케키라우는 아푸리막강을 두르고 있다. 
1572년까지 에스파냐 침략자의 추격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초케키라우는 지금도 아푸리막 협곡 위에 독수리처럼 앉아 쿠스코의 서쪽을 지키고 있다. 초케키라우 여정은 포장되지 않은 원시의 길 그대로다. 오로지 걸어서만 갈 수 있다. 20세기 초 하이럼 빙엄은 이 루트를 통해 초케키라우를 발견하고서 마추픽추라고 믿었다. 

 

밀림을 뚫고 만나게 되는 초케키라우


초케키라우와의 첫 만남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헤쳐 왔고 앞으로도 함께 갈 것을 맹세했다. 그 맹세가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릴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는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낀다...” 
체 게바라(1928~1967)의 시, <먼 저편>의 글귀는 초케키라우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오늘날 여행자가 오르는 출입구는 잉카 시대의 출입구가 아니다. 에스파냐 정복 군대가 초케키라우를 물어뜯고 버려놓은 유적지를 최근 성글게 복원해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그 흔한 석조 대문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초케키라우 테라스


가파른 절벽에 이 거대한 테라스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협곡의 테라스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치 이중섭(1916~1956)의 그림 <황소>처럼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테라스의 석축 길이와 넓이와 각도에 따라 그로테스크한 그림처럼 보였다. 두 개의 다리처럼 보이는 아래쪽 테라스의 석조 건축물에서는 어떤 의식을 치렀을까.

개울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지나는 순간 테라스는 꼬리를 감추고 절벽 뒤로 숨었다. 길은 세 갈래다. 아래쪽 길은 테라스 와 야영장으로, 직진하는 길은 초케키라우 유적지로, 오른쪽 산허리로 오르는 길은 야나마 설산 계곡으로 이어진다. 

허리 높이의 나무 게이트를 지나 숲길을 가는데, 저만치 석축 앞으로 평탄한 길이 나타난다. 절벽길을 따라 험난하게 도달할 수밖에 없는 초케키라우를 에스파냐 침략자는 황금 보물이 숨겨진 신전으로 착각했다. 석축 앞으로 테라스가 길게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갖가지 모양의 돌을 가지런히 쌓아놓은 벽체가 성큼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에 나무 두 그루가 유적의 일부처럼 서 있고, 길게 흐르는 테라스 끝에 초케키라우 우스누 언덕이 봉긋하게 도드라져 있다. 잘 다듬어진 3단의 석축 아래쪽 테라스 길에는 푸른 풀밭이 우스누로 이어진다. 석축 사이마다 수직으로 놓인 계단이 테라스와 테라스를 연결하지만 사람이 오르기에는 너무 거칠다.

테라스가 끝나고 오르막길에 접어들면 아래쪽 내리막길은 피키와시 방향이고, 오른쪽 오르막길은 초케키라우 광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초케키라우로 가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오른쪽으로는 아난으로 향하는 언덕이, 왼쪽으로는 우스누 앞을 지키는 승리의 벽이 V자를 그리고 있다. 마침내 잉카의 신전에 도착했다.

 

고지대에서 바라본 저지대 유적, 봉긋 솟은 언덕에 우스누가 있다.

 


근엄하고 엄숙한 고지대 유적

 

마추픽추가 밀림 속에서 깊은 잠을 자는 사이 초케키라우는 갈기갈기 찢겨지며 만신창이로 버려졌다. 초케키라우는 케추아어로 ‘황금의 요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유적은 산등성이 위에 쟁반처럼 박혀있는 고지대 유적지와 그 아래 오각형 광장을 둘러싼 저지대 유적지로 나뉜다. 

고지대와 저지대 유적지가 다른 잉카의 유적처럼 완벽한 기하학적 테라스 체계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산마루에 뚝 떨어져 서로 딴청을 부리고 있다. 고지대를 아난, 저지대를 우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퓨마 형상의 쿠스코가 떠올랐다. 하지만 저지대 유적지 남쪽으로 봉곳하게 솟아오른 우스누를 퓨마의 머리라고 가정할 때, 우린과 아난으로 이어지는 형상은 지나치게 길어서 퓨마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우스누와 우린과 아난으로 연결된 일련의 유적지를 멀리서 바라보면 야마가 길게 목을 빼고 누워 있는 형상에 가깝다.

고지대 유적지가 층을 달리하며 박혀있다. 가장 꼭대기 산등성이에 자리한 신전 건물 앞에 작은 광장이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우물, 통로, 계단이 서로 높이가 다른 두 유적지를 묶어준다. 고지대 유적지는 상, 하 두 블록으로 엮여 있지만 누가 봐도 하부 건물은 상부 신전의 부속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지대 유적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

 

아난의 상부 건물은 퓨마의 주둥이가 물을 마시듯 설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관입되는 수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놓여 있다. 신성한 의식 공간이었을 것이다. 물줄기는 의식용 신전을 가장 먼저 통과하고 전면 광장 동쪽으로 난 수로를 따라 오각형 광장의 샘으로 흘러내린다.

고지대 유적지 앞 접시마당 남쪽 끝에 여러 개의 의식용 방이 마당 선에 지붕 높이를 맞추고 서쪽 절벽에 기대어 있다. 광장보다 한 품 낮게 자리한 건물은 서쪽 절벽을 끼고 계단으로 내려가게 돼 있다. 진입 축만으로도 상부 신전의 부속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건물이 다양한 미라의 안치 장소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한다. 풍요 의식과 물 숭배 의식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지만, 각 공간의 자세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곳에 서면 우스누가 오름처럼 내려다보이고 동서남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고지대 유적지 작은 광장 동쪽 수로 아래 잘 마름질된 낮은 벽체가 마치 로마의 수도교처럼 우뚝 서 있다. 건물과 건물이 어깨를 마주하고 직선으로 연이어 서 있어 강한 직선의 축이 강조된다. 높고 긴 벽체는 그림자를 두르고 무표정하게 산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질서정연하게 뚫린 창문으로는 햇살이 길게 늘어진다. 강력한 직선 축을 이룬 벽체가 여러 개의 직사각형 방을 품고 동쪽 사면으로 경사 지붕을 이루고 있다. 지붕조차 상부의 신전을 향해 예를 표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세련된 이 건물이 초케키라우 유적지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인다. 통으로 비어 있는 넓은 공간은 다목적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내부에 특별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신전의 의식에 참여하는 사제와 귀족의 거처라는 주장도 있지만, 잉카가 남긴 이 공간은 말이 없다.

그 앞으로 한 단 낮게 긴 직사각형 건물이 산등성이에 길게 앉아 있다. 케추아어로 카양카(직사각형 형태의 건물로 잉카의 건축 구조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긴 벽체가 좁은 폭의 공간을 감싸고 있다. 기차의 선로처럼 달리는 무심한 벽체는 동쪽으로 가지런하게 뚫린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바닥에 빛의 선을 그린다. 

이곳의 방은 사람이 살기에는 그 폭이 턱없이 좁아 군사용으로 사용됐다는 주장과 상부 종교 시설에 관련된 의식용 부속실이라는 의견이 맞서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 할 수 없다. 종교 의식용 부속 창고거나 미라 숭배 장소라는 추정은 잉카 문화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창문의 인방(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가로재를 말한다. 기둥을 상중하에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보)을 돌이 아니라 시멘트 콘크리트로 급하게 마무리했다. 잉카인의 재료와 공법으로 시공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고지대 유적지의 신전을 관통하는 샘물은 숲에 내린 이슬이 만들어내는 물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물길은 끊어지고 마른 향기만 남았다. 아마 산기슭 안개 속 이슬 방울과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가 이리저리 모여 수로로 연결됐겠지만 오랜 시간 관리가 되지 않아서 수로에 물이 흐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른 수로에 신성한 물이 흐르는 순간 초케키라우는 마침내 잉카의 문화로 되살아날 것이다.

편안하고 아늑한 저지대 유적

마른 수로를 따라 산등성이를 내려오면 오각형 형태의 광장을 품은 저지대 유적지에 이른다. 고지대와 저지대 유적지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오각형 광장에 서면 온몸을 감싸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고지대 유적지는 아버지처럼 근엄하고 어딘가 모르게 엄숙하지만, 저지대 유적지는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다.

광장의 3면은 건물들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에 가까운 광장과 각각의 건물 접근 동선은 거의 평면적이다. 광장 지하의 배수시설을 고려하면 건설하는 데 아주 많은 정성을 쏟은 흔적이 보인다. 이 광장을 처음 본 순간 아주 특별한 종교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군사적 목적이나 감옥, 집, 작업장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잉카 광장과는 달랐다.

 

고지대 유적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
저지대의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건물

 

한눈에 봐도 이곳의 구조와 규모와 장식은 최고 권력자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배치상으로도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건물 동측으로 별도의 출입구가 나 있고, 각 건물마다 동쪽 벽에 기대 나무 계단을 설치했던 2층 계단참이 캔틸레버(한쪽 끝은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아니한 상태로 있는 보)로 돌출해있다. 건물 2층에도 벽에 정교한 벽감을 따로 설치한 점을 볼 때 사람이 거주하던 곳으로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이 건물에 상당히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살았던 공간으로 짐작된다. 전면 광장을 향한 두 개의 출입문 사이에는 벽감이 있고, 그 벽감 안에 아름답게 장식된 작은 창문이 나 있다. 아마 내부에서 광장을 엿보기 위한 창문으로 보인다. 광장을 향해 열린 좌우의 문은 오로지 1층 출입을 위한 용도로 쓰였다. 2층으로 가려면 동쪽 별도의 입구로 들어가 나무 계단을 이용한다. 2층 동쪽의 출입구도 보통의 문과 다르게 이중 사다리꼴 모양의 문설주로 장식되어 있다.

비슷한 모양의 건물이 줄지어 세 채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장과 마주한 건물에 왕이 거주하고 그 뒤의 건물에 왕비와 후궁이 살았을까. 잉카의 왕은 많은 여인을 거느렸다. 

 

저지대의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건물

 

궁전의 동쪽에 면하여 카양카라고 하는 긴 직사각형 건물이 있다. 카양카에는 여섯 개의 출입문이 있고, 내부에는 많은 벽감이 있다. 이 건물 북쪽 뒤에는 궁전과 카양카를 위한 부속실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건물이 무너진 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궁전의 서북쪽에도 외벽에 네 개의 출입구가 있고 출입구 사이에 각각 벽감이 놓인 카양카가 있다. 옆에서 보면 출입구가 연속적으로 나 있다. 카양카의 내부 벽에는 출입문 크기의 벽감 세 개가 있고 그 속에 다시 작은 벽감이 겹으로 장식되어 있다. 배치 구조로 보면 카양카가 왕궁을 보좌하는 공간으로 추측 가능하다. 또는, 왕국의 제사장을 비롯한 고위관료, 학자, 장수의 거주 공간일 수도.

카양카의 남북 방향 벽에는 각각 출입문 크기의 벽감 세 개가 있고 그 안에 작은 창문 크기의 벽감이 2중으로 장식되어 있다. 서쪽 벽에는 잘 정제된 일련의 벽감이 있다. 내부 벽 상부에는 돌출된 원형 봉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세 개의 건물 벽이 비정형으로 서쪽 절벽 가까이 서 있다. 그중 하나는 반원형이다. 잉카 시대에 초케키라우의 상부 신전으로 유입된 신성한 물줄기는 긴 수로를 통해 흘러내려 세 개의 건물을 통과한 다음 가장 서쪽에 자리한 의식용 샘에 도달했다. 이 건물의 정확한 목적은 알려져 있지않지만 이 공간에서 제사장들이 땅의 풍요를 비는 것과 관련 있는 물 숭배 의식이 진행됐을 것이다.

초케키라우의 진실은 비밀에 싸여 있지만 독특한 형태와 공간이 가파른 산비탈에 기하학적인 질서로 박혀있다. 오늘날 각 공간의 기능은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구조와 디테일을 살펴보면 각각의 공간 기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건축가는 목적을 초월하는 공간을 최신 공법으로 조영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잉카의 건축술이 뛰어난 이유는 청동기 시대 도구와 사람의 손만으로 톱날처럼 가파른 산정에서 석재를 채취하고, 옮기고, 재단하여 신전과 궁전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잉카의 건축은 돌을 다루는 정교한 기술과 상상력이 응집된 기념비이다. 잉카 건축가에게 상상력이란 그들의 신을 섬기고 왕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신성을 독창적인 공간에 담아내는 그릇이다.

산비탈에 곧추 서 있는 초케키라우 유적을 바라보고 있자면 잉카인들이 믿었던 신과 신의 아들인 왕의 위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잉카 장인들의 초인적인 열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초케키라우는 수많은 장인들의 무덤 위에 올라타고 있는 돌의 꽃이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벽

 

&lsquo;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벽


오각형 광장에서 남쪽의 우스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건물은 승전벽으로 불린다. 광장과 마주하면서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승전벽은 작은 공터를 안고 저지대 유적지와 고지대 유적지를 바라보고 있다. 1850년 탐험가 사르티헤스(1809~1892)가 이름 붙였지만, 잉카 시대의 이름과 기능은 알 수 없다. 이곳을 연구한 고고학자와 탐사원은 ‘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벽’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의식을 올리는 장소인 우스누가 남쪽 정상에 있기 때문에 승전벽은 의식을 진행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전실 개념으로 여긴 것이다. 우스누로 향하는 동쪽 출입문은 특별히 낮고, 네 개의 벽감을 가진 거대한 벽은 지면의 높이가 서로 다르다.

모든 문과 벽감은 사다리꼴 형상이다. 많은 의문이 있지만 승전벽은 종교 의식용으로 대단히 잘 지어진 건축물이며, 불가사의한 잉카 건축의 특징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두 개의 벽감은 출입문으로, 두 개의 벽감은 창문으로 균형 있게 설치돼 있다. 승전벽의 실제 높이는 다른 건축물에 비해 상당히 높다. 아마도 초케키라우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2층 구조의 건물 높이로 벽을 쌓았을 것이다. 

출입문 반대편에 우스누와 마주한 낮은 벽의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의 뒷벽에는 여러 개의 작은 벽감이 있는데, 이는 광장에서 벌어지던 의식 활동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승전벽의 동쪽에 낮게 위치한 대문을 지나 계단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야외 종교 의식을 벌이던 우스누가 나타난다. 승전벽에서 바라보면 언덕 위로 불쑥 솟아 있지만 고지대아난에서 바라보면 낮은 언덕 위에 올라탄 둥근 마당이 아푸리막 협곡을 콘도르가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적, 군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한 우스누는 낮은 돌담이 둥글게 둘러싼 광장이다. 우스누에서는 초케키라우의 전 유적지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쿠스코를 향해 뻗은 안데스 산맥도 바라볼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다.

광장 왼쪽의 의식용 샘으로 불리는 건물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야마 모양의 돌이 박힌 테라스로 향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절벽길을 따라 숲을 벗어나자 우스누 서쪽 하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층층의 테라스가 수직으로 걸려 있다. 각각의 테라스 돌담에 잉카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야마 그림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야마가 새겨진 테라스



초케키라우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야마가 들려줄 것 같다. 야마의 이미지로 도시를 건설한 오얀타이탐보처럼 초케키라우 역시 야마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일까, 이 절벽에 테라스를 설치한 목적은 무엇일까.

야마의 갈비뼈처럼 수직으로 깎아지른 테라스 곁으로 난 톱날길을 따라 내려간다. 야마테라스 허리에 섰지만 테라스의 전체적인 경관을 볼 수 없다. 절벽 난간에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그림자 속에 앉아 있다.

전망대로 걸어가는 길, 덤불 속에는 아직 개발하지 못한 테라스 벽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곳에는 야마 모양이 없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야마 모양은 초케키라우 테라스를 복원하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초케키라우 테라스는 신전에 올리는 음식을 특별 재배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초케키라우 서쪽 자락을 감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한 것일까. 

오로지 인간의 발로만 오를 수 있는 거친 잉카의 길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다리다.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이 돌로 만든 천국의 계단보다 절벽의 지문 사이로 교묘하게 오르는 지그재그길이 천 배는 더 인간적이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 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 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 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 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출처 - 안녕, 잉카 02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2020.7 (kiramonth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