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잉카 01상상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Ⅰ2020.6
2023. 1. 16. 09:07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1 Trek to Machu Picchu, the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Ⅰ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공중 도시 마추픽추
인류 문명은 탄생과 멸망의 표지로 묶인 한 권의 경전이다. 15세기 불꽃처럼 일어나 16세기 바람처럼 사라진 잉카. 그 주인공은 콘도르의 영혼을 품은 바람의 아들, 파차쿠텍이었다. 그는 신성한 강줄기를 두른 천혜의 산정에 콘도르를 닮은 바람의 신전을 지었다.
그 신전이 안데스 산맥 배꼽에 자리한 잉카의 걸작, 마추픽추다. 안데스의 영혼 콘도르가 돌의 화신으로 굳어버린 인류의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마추픽추는 인류의 타임캡슐이다.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할 때면 마추픽추에 가라. 마추픽추에 오르면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돌의 신전과 마주하고, 그 위대함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산봉우리 끝 절벽에 겹겹의 테라스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가 구름 아래 놓여 있다. 신비한 돌 건축물이 계단식 테라스를 따라서 하늘로 팔을 벌리고 있다. 한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결코 저열하지 않음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돌과 인간의 손만으로 건설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건축공학의 승리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된다. 잉카는 비록 에스파냐 정복군 피사로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오늘도 안데스 협곡 위의 마추픽추에 남아 있다.
잉카 제국 개념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구 반대편 잉카와의 마주침은 누구에게나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자 미래의 창문을 여는 통찰의 시간이다. 마추픽추는 과거를 변조할 틈도 없었다. 망각을 자책할 그 어떤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추픽추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상상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는다.
잉카의 유적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남쪽에 제국의 심장이자 수도인 쿠스코 영역이 자리하고, 쿠스코 북쪽의 우루밤바강변을 따라 곡창 지대가 펼쳐져 있고, 식량 창고 서쪽에 우뚝 솟은 산정에 마추픽추(2,430m) 요새가 이민족을 감시하고 있다. 그 남쪽에 자리한 초케키라우(3,033m) 요새가 쿠스코의 서쪽 변방을 철통 같이 지켜주었다.
제국의 심장인 쿠스코는 왕궁과 신전을 중심에 두고 네 부족의 귀족 주거지가 둘러싼 도시 영역이 퓨마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곡창 지대는 강줄기를 따라 피삭, 친체로, 모라이, 오얀타이탐보로 이어져 있다. 서쪽으로 밀림이 시작되는 경계선에 마추픽추와 초케키라우 요새가 제국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태양 신전 코리칸차는 어디에
쿠스코는 와타나이강과 투유마요강 사이에 끼인 가늘고 긴 고산 분지로, 퓨마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다. 쿠스코 관광 지도에는 솔 거리와 투유마요 거리를 따라 몸을 움츠린 퓨마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북서쪽의 삭사이와만 요새는 퓨마의 머리, 아르마스 광장은 심장, 와타나이강과 투유마요강이 합류하는 푸막추판은 꼬리에 해당한다. 오늘날 아르마스 광장을 포함한 위쪽은 아난(고지대) 쿠스코, 아래쪽은 우린(저지대) 쿠스코라고 일컫는다.
쿠스코의 심장인 아르마스 광장에 잉카의 궁전이 모여 있었고, 허리 부분에 태양 신전 코리칸차가 있다. 쿠스코를 상징하는 퓨마의 뒷다리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던 코리칸차의 웅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허물진 석축만이 빈 광장을 지키고 있다. 한때 남미 안데스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 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거느린 잉카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처참한 모습이다.
잉카인은 성스러운 장소를 ‘와카’라고 했는데, 오늘날 코리칸차 자리와 쿠스코 대성당 자리 역시 잉카 시대의 ‘와카’였다. 잉카인은 와카에 제단을 마련해 라마, 알파카 등을 올리거나 금, 은, 돌로 작은 상을 만들어 바쳤다. 라마상과 함께 주로 바친 제물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치차주와 코카 잎이었다. 코리칸차는 케추아어로 황금을 뜻하는 ‘코리’와 울타리를 의미하는 ‘칸차’가 조합된 말로 ‘황금의 울타리’라는 뜻이며, 저지대 주거지의 중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코리칸차는 초대 왕인 망코 카팍 때부터 대대로 왕이 살던 궁전이다. 잉카 제국을 창시한 망코 카팍이 건설한 신전은 인티칸차라고 불리는 비교적 작은 건축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전과 궁전과 새로운 주거지를 포함한 일군의 건물 전체를 태양 신전, 즉 ‘코리칸차’라고 부르게 됐다. 태양 신전 본체는 가로 70m, 세로 60m 규모로 북서쪽으로 난 태양 광장으로 통했다. 광장 주변에는 태양 신전 외에도 각기 달, 별, 천둥, 뱀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광장에는 옥수수밭과 다섯 개의 분수가 있었다. 왕과 그 일족이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여기서 수확한 옥수수는 태양신에게 공물로 바쳤다. 분수는 잉카의 왕비가 혼인 의식을 치르기 전에 몸을 씻는 장소로, 태양신이 묘사된 순금 부조가 있었다.
에스파냐 정복 군대를 따라온 역사학자와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코리칸차의 벽은 황금으로 덮였고 광장은 황금으로 만든 나무와 식물, 동물 조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 보고서에는 ‘믿음을 초월한 화려한 건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쿠스코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아르마스 광
황금으로 덮여 있던 태양 신전 코리칸차는 에스파냐 정복 군대의 손에 모두 훼손됐다. 궁전과 신전의 황금을 뜯어 에스파냐로 보내고, 궁전은 파괴됐다. 정복자들은 태양 신전을 파괴한 그 자리에 바로크 양식의 성당을 지었다. 현재 태양 신전 자리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성당과 부속 건물은 초기에 지은 건축물이 아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이후 잉카 신전의 기초 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태양 신전의 주춧돌과 벽만이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잉카인의 성스러운 장소, 태양 신전 위에 지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
코리칸차 고고학박물관에는 잉카인이 건설한 태양 신전 유적 일부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황동으로 주물을 뜬 조각처럼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잉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서 있다. 어제 시공한 듯한 모습의 석조 구조물은 그들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하나같이 완벽한 건축술을 자랑한다. 다른 곳의 벽보다 이곳 신전의 돌은 높은 정밀도를 보이는데, 어느 돌과 돌 사이든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잉카의 네 부족(수유)을 상징하는 평평한 사각형 모양의 돌
희생 제물을 바쳤다고 추정되는, 퓨마 가죽을 펼쳐놓은 모양의 사각형의 평평한 돌은 잉카의 네 부족을 상징한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리던 곳으로 보이는 이 방의 벽체는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다. 네 개의 사다리꼴 벽감(벽면을 우묵하게 해서 만든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조각상이 놓여지나 장식용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이 설치돼 있고 남서향 벽에는 빛이 들어오는 일련의 창이 카메라 렌즈처럼 열려 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마감이다. 마치 기계로 갈아낸 듯하다.
잉카의 전형적인 돌 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린 벽은 하나같이 안쪽으로 15도 기울어져 있다. 벽과 벽이 서로 어깨를 마주하며 튼튼하게 지지하기 위해서다. 출입구와 벽감은 모두 사다리꼴 형상으로, 지진에도 안전한 구조를 갖추었다. 동서쪽 코리칸차 신전 벽에는 정복자가 파괴하다 그만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돌담이 너무 치밀해서 허물 수 없었던 것이다.
검은 예수상이 간직한 슬픔
코리칸차를 뒤로하고 다시 솔 거리(태양의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건물이 성큼 막아서고 좌우로 길이 열린다. 오른쪽으로 거대한 광장이 길목 사이로 펼쳐진다. 쿠스코의 상징인 퓨마의 가슴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한 아르마스 광장이다. 오늘날 아르마스 광장은 쿠스코의 중심이자 축제의 장소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태양제 인티라이미와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지는 곳도 이곳이다. 이 광장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건물은 동쪽 언덕 위에 우뚝한 쿠스코 대성당이다.
대부분의 에스파냐 대성당처럼 동쪽에 제단을 두고 서쪽에다 출입문을 두었다. 광장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관광객 사이로 중앙 분수대를 지나 대성당으로 향했다. 대성당 자리에는 원래 잉카인이 창조의 신으로 섬기던 ‘비라코차’가 자리하고 있다. 잉카인이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는, 창조의 신이 바로 비라코차다. 잉카인은 비라코차와 더불어 태양신 ‘인티’를 최고의 신으로 섬겼다. 비라코차를 허문 자리에 쿠스코 대성당을, 태양신 인티가 자리한 코리칸차를 허물고 산토 도밍고 성당을 세운 것이다.
지진의 신으로 불리는 검은 예수상
바로크 양식의 쿠스코 대성당은 중남미 식민 시대 건축물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지붕 위의 반원형 조각까지 치밀하게 세우고서 좌우의 낮고 투박한 종탑의 위계를 조심스럽게 흐트러뜨린다. 전면 출입구 좌우에서 지붕까지 이어진 섬세한 장식 부조는 특별히 공을 들인 흔적이 돋보인다.
쿠스코 대성당에서 들어서면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지진의 신이라는 검은 예수상이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붉은 천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검은 예수상을 가운데 두고 왼쪽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 상과 오른쪽 아래에는 산티아고 상이 나란하게 있다.
1650년 쿠스코에 큰 지진이 있었을 때였다. 성모 마리아와 산티아고에게 기도해도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잉카의 후예가 검은 얼굴의 예수상을 만들어 기도하니 지진이 멈췄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검은 얼굴의 예수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성당 안에 걸린 마르코스 사파타(1710∼1773)가 그린 <최후의 만찬(1753)>. 만찬 음식으로 그려진 것이 쿠스코 잉카 원주민의 대표 음식인 쿠이다. 검은 얼굴의 예수와 쿠이는 잉카의 토착 신앙과 그리스도교가 결합된 대표적인 ‘싱크리티즘’이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싱크리티즘은 흔히 ‘종교혼합주의’라고 해석한다. 검은 얼굴의 예수는 안짱다리에 인디언의 고유 의상인 치마를 입었다. 우측 마리아와 좌측 산티아고의 머리 위에는 각각 태양과 달이 그려져 있다. 잉카의 신성인 태양과 달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는 마마차 숭배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마차는 성모 마리아와 대지의 신, 파차마마와의 혼교를 의미한다. 수도원 회랑 서쪽에 자리한 코리칸차 박물관에서 전시된 마마차는 ‘브로카테아도’라고 하는 금색 옷을 입고 있으며 왕관 위에는 잉카 왕의 깃털 장식이 붙어 있다. 이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는 흔히 수용하는 자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지의 어머니와 성모 마리아는 둘 다 모성을 자극하는 인간의 어머니와 친밀하게 연결된다.
쿠스코는 도시 전체를 돌로 빚은 성채도시다. 신에게 의식을 올리던 신전은 물론이고, 궁전과 귀족의 저택,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물건을 교환하던 광장과 시장을 비롯해 크고 작은 길과 골목 그리고 집까지 모두 정교하게 가공한 돌을 사용해 만들었다. 높이가 1∼3m에 이르는 거대한 돌을 최대한 원래 형태 그대로 아귀를 맞추어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그러나 오늘날 쿠스코에는 잉카 유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저 돌담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툰루미욕 거리 돌담
돌을 다루는 데는 세계 최고라는 칭송을 받는 잉카의 석공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돌을 수평으로 자르지 않았다. 본연의 형상을 존중해 최소한의 가공만으로 큰 돌에 작은 돌을 끼워 맞추었다. 따라서 12각형 돌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냥 12각형으로 보일 뿐 어느 한 곳도 직선은 없다. 거친 돌이 울퉁불퉁 맞물려 쌓아올려진 자연스러운 돌담에 그들이 신성시한 퓨마와 뱀의 형상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남아 있다.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돌을 쪼아가며 이음새를 맞춘 잉카인의 정성이 꿈틀거린다.
쿠스코의 골목을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다. 원주민의 활기가 느껴지는 골목에는 형형색색 잉카의 유산이 흐른다. 남미의 어느 곳에서도 사라진 문명의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들려주는 도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잉카의 심장을 지키다, 삭사이와만
코리칸차를 뒤로하고 쿠스코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삭사이와만 요새에 오른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인티라이미 기간 제단이 놓였던 광장 중앙에 서서 삭사이와만 유적을 쳐다본다. 거대한 석축이 톱니 모양으로 3단의 테라스 위에 열을 지어 서 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형태에 맞추어 정교하게 짜 맞춘 석축이 목이 잘린 채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삭사이와만 유적지 정상의 무육 마르카(동심원 석축으로 이루어진 원형 탑)를 중심으로 높이가 서로 다른 테라스 위에 3중의 성벽이 둘러쳐 있다. 이곳은 무육 마르카를 중심으로 그 양 옆에 사각형 건물이 호위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태양 신전으로 추정된다. 겹겹 쌓인 우람한 성벽은 지그재그 모양의 톱날 형태로 방어와 공격에 탁월했다. 지면을 받치는 거대한 돌은 마치 어제 쌓은 것처럼 단단하게 결속돼 있지만 성벽의 상부는 온통 목이 잘렸다.
벌판 위 우뚝 솟아있는 삭사이와만
쿠스코를 처음 방문한 에스파냐의 피사로 군대는 마치 유럽의 성처럼 세 망루가 세 겹의 성벽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요새를 발견하고 놀랬다. 그곳이 오늘날 삭사이와만이다. 케추아어로 삭사이와만은 ‘배부른 송골매’라는 뜻이다. 이는 잉카 제국에서는 ‘콘도르’를 의미한다. 하늘의 신인 콘도르가 잠시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곳이 삭사이와만이다. 퓨마의 머리 부분에 콘도르가 앉아 있다는 것은 송골매처럼 지각하고 감시하며 통제하려는 의미다.
고작해야 곤봉을 닮은 막대기와 돌을 묶은 볼라의 끈을 휘둘러 원거리의 적을 제압하는 잉카 전쟁에서 이렇게 무지막지한 성벽을 쌓은 것은 놀랍다. 이는 상대의 심리를 일시에 제압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군이 거대한 삭사이와만 광장에 서는 순간 전면 길이 300m가 넘고, 전체 둘레는 1,000m가 넘는 거대한 성채를 보고는 압도당하고 말았을테니.
성채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 것 없이 적을 막는 기능과 동시에 제국의 신민에게 안정감을 심어주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잉카의 통치자들 역시 거대하고 단단한 성채를 만들고 그 안에 태양 신전을 배치해 적의 침입에도 안전하게 왕국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중앙 광장에서 삭사이와만 성채를 바라보고 있으면 성벽의 하부를 지지하는 돌 하나에 300톤이 넘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석회암이 빈틈없이 맞물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 큰 돌을 어떻게 옮기고, 무슨 재주를 부려 끼워 맞추었을까.
퓨마 발 형상으로 돌을 다듬어 쌓았다
삭사이와만 성채를 광장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거인이 쌓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거대한 석재를 옮기는 일은 물론, 정밀하게 돌을 재단해 빈틈없이 아귀를 맞출 수 있다니. 이는 기적이다. 광장에서 3단의 성벽이 포개지는 곳은 높이가 18m에 이른다. 웅장한 성채 위에 병사들이 서서 함성을 지른다면 적은 일시에 기가 죽고 말 것이다. 오늘날 목이 잘린 성벽을 바라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꼭대기에 성채가 우뚝 솟아 있다면 어땠을까.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무육 마르카의 돌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면 삭사이와만은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을 것이다. 흔적만 남아 있는 무육 마르카는 4∼5층 높이의 원뿔 모양으로 지름이 약 23m다. 양옆에 있는 두 개의 건물은 높이가 거의 같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원뿔 형태의 돌탑을 호위하고 있었다. 탑 아래에는 방어벽보다 더 멀리 뻗어나간 비밀 굴이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광장에서 삭사이와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잉카 시대 쿠스코 주민 모두가 성채 안으로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고개가 저절로 끄떡인다.
삭사이와만 요새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은 수만 명, 공사 기간은 자그마치 83년으로 추산하지만,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적지 건설에 사용한 거석은 근처의 석회암 광산에서 밧줄을 이용해 가져왔다. 8m 높이의 성벽을 지지하는 거대한 크기의 돌을 밧줄로 가져왔다니, 잉카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오늘날 삭사이와만은 목이 잘린 상태로 반쯤 허물어져 있다. 에스파냐 정복군이 태양 신전의 위력에 놀라 이 장엄한 성벽을 헐어서 그 돌을 모두 바로크식 성당과 수도원을 짓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중앙에 둥근 탑 형태의 태양 신전이 높이 솟아 있었으나 에스파냐 군대는 그 웅장함에 압도된 나머지 이를 군사 목적의 성벽으로 오해하고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남쪽 관문의 절경
남쪽 관문의 절경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 티폰행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렸다. 쿠스코 동남쪽 27km, 푸노로 향하는 국도에 면한 작은 마을 티폰이 나타났다. 티폰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동쪽으로 10km 지점에 고대 와리 문명의 중심 피키약타 유적지가 있다. 티폰은 피키약타의 일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키약타는 케추아어 피키(벼룩)와 약타(도시)의 합성어로 ‘벼룩의 도시’, 버려진 도시였다는 뜻이다.
티폰에서 택시를 타고 10여 분 달리면 계곡 언덕에 티폰 테라스가 장엄하게 나타난다. 잉카 시대처럼 물줄기가 거침없이 수로를 따라 흘러내린다. 북서 방향으로 기울어진 테라스는 곳곳이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계단식 테라스 외에 신전, 운하와 수로를 포함한 다양한 시설이 존재했지만,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 건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거대한 직사각형 테라스가 잉카 시대처럼 보존된 티폰은 고고학적으로 잉카의 대표 유적지 열여섯 곳 중 하나다.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완벽한 수로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진 전체 테라스에 물을 공급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테라스의 높이에 따라 미세하게 온도가 차이난다고 한다. 이곳은 완벽한 농작물 실험실이었을 것이다.
오솔길을 따라 상부 유적지에 오르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티폰 분수가 나온다. 잉카 유적지 가운데 가장 거대한 관개 수로다. 분수가 벽을 타고 흘러 네 개의 물줄기로 연결된다. 이는 다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잉카 제국의 네 부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티폰 유적지는 제국의 동남쪽 식량 기지로 탐보마차이에 버금갈 정도로 물의 신에게 경의를 표하던 신성한 장소이다. 탐보마차이가 북방 민족이 쿠스코로 진입하기 전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다면, 티폰 유적지는 남방 민족이 쿠스코에 진입하기 전에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쿠스코는 완벽한 도시 계획으로 무장한 신성한 도시였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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