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트래블⓫ 순흥 봉도각
- 목여 김만용 화백과 함께하는 화첩 나들이
《순흥 봉도각逢島閣》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위치 한 봉도각逢島閣은
옛 순흥도호부 청사 인 조양각朝陽閣 뒤뜰에 조성 된 연못 공원으로
순흥 고을의 흥망성쇠와 함께 해 온 대표적 명소로서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천년 노송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영조 30년 순흥부사 조덕상趙德常이 승운루勝雲樓 라는 누각을 짓고
그 서편에 논을 파서 사각형의 연못을 조성 하였는데, 이는 땅의 모양이 네모남을 의미하며
그 옆에 둥근 모양의 연못을 나란히 조성한 것은 하늘의 모양이 둥금을 의미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근거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연못의 가운데에는 흙과 돌로 둥근 모양의 섬을 쌓은 후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봉도각逢島閣이라 했는데,‘봉도逢島’는 신선이 산다는‘봉래蓬萊’를 뜻하며,
봉도각 현판과 나란히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는 뜻으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연못 오른편에는 순흥 경로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때는 약국의 기능을 하며‘경로국敬老局’으로 불리다가
그 후 지역의 어르신들이 모여 각종 대소사, 가문의 다툼, 이웃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향촌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며 400여년을 이어 온
전국 유일의 ‘경로소敬老所’이다.
봉도각에서 순흥을 보다!
300년 전 부사府使 조덕상趙德常
하늘 땅 닮은 연못 파서 섬 쌓고
그림 같은 정자亭子 정성껏 세우니
신선 사는 곳 ‘봉래蓬萊’와 잇닿은
‘봉도각逢島閣’ 비로소 태어났네.
순흥도호부 조양각朝陽閣 후원後園
사각형 연못 파서 땅을 새기고,
둥근 모양 연못은 하늘을 닮았으니
‘천원지방天圓地方’ 오묘한 원리를
오롯이 그 안에 담았네.
어진 임금 다스리는 이 땅에서
솔개는 하늘을 내 세상인 듯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활개 치며 뛰 노니
나라는 ‘태평’ 하고 왕조는 ‘성대’ 한
‘연비어약鳶飛魚躍’ 또한 머금었네.
순흥고을 백성들 금성대군 손 맞잡은
단종대왕 향한 충절 물거품 되어 스러진
정축년 분탕도륙焚蕩屠戮 피맺힌 그 한
생생히 기억하고 선 노송들의 흐느낌
오늘도 흐적흐적 들리네.
순흥 고을 흥망성쇠
연못 한켠에 비켜서서 지켜 본 경로소는
어르신 함께 모여 고을 대소사 걱정하고
가문 다툼, 이웃 싸움 서로 좋게 해결하며,
수 백년 한 결 같이 그 곳에 서 계시네.
코스모스 애처롭게 가는 손목 흔들며
형형색색 파스텔 가루 흩날리는 초 가을날
돌다리 건너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니
순흥 고을 영화榮華가 연꽃으로 핀 그 곳
봉도각에서 ‘순흥’을 다시 보네!
- 2017. 9. 18 -
(글 및 그림 출처 : 영주시민신문)
[한국의 보호수-①경상북도편] 영주 읍내리 왕버들(98)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영주 읍내리 왕버들은 한눈에도 엄청난 규모의 위용을 갖추고 서 있다.
높이가 20m나 되고,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훨씬 넘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왕버들 가운데 하나다. 읍내리 왕버들은 지역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나무다.
나무줄기 껍질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은 역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듯하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영주에서는 역사의 흔적을 지닌 노거수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봉도각 연못 앞의 왕버들은 그중 첫 손에 꼽히는 노거수다.
읍내리 왕버들이 서 있는 순흥면사무소 뒤뜰에는 오래전에 순흥도호부 관아(順興都護府 官衙)가 있었다.
순흥은 크게 부침(浮沈)을 겪었던 역사를 가진 고장이다.
고려시대에 순흥부였던 이 지역은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457년 단종복위운동 사건 때 순흥도호부가 혁파됐다.
이후 200여 년이 흐른 숙종 때에야 단종이 복권되면서
숙종 9년인 1683년 이곳 주민들이 상소를 올려 다시 순흥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그 뒤 영조 29년인 1754년에 순흥도호부 부사 조덕상이 관아 뒤뜰에
승운루(勝雲樓)라는 누각을 지었다.
이때 누각 서쪽에 연못을 만들어 그 가운데 섬을 쌓고, 그 위에 봉도각(鳳島閣)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세웠다.
왕버들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봉도각이 있는 연못 가장자리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되는 나무이니, 1754년 조덕상이 관아 뒤뜰에 정원을 조성할 때,
왕버들은 이미 130년 이상 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버들을 풍경의 움직일 수 없는 조건으로 놓고 누각과 연못과 정자의 위치,
방향, 모양을 결정해 정원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버들 한 그루가 건축의 중심이 된 것이고, 순흥 지역 재건의 상징이 된 것이다.
순흥도호부 승격과 혁파, 재설치의 곡절을 겪었던 지금의 영주 지역은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지역이다.
조선 초 수양대군이 폐위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이른바 ‘단종복위운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세조가 왕에 오른 지 3년째인 1457년, 순흥도호부에 유배되어있던
세종의 아들이자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이
향민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금성대군, 이보흠, 단종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바로 이때 단종복위운동의 주 무대였던 순흥도호부가 혁파되고 순흥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됐으며,
순흥도호부의 영역은 갈가리 찢겨 인근 영천, 봉화, 풍기에 속해지게 되었다.
순흥도호부가 다시 설치될 때까지는 무려 200년이 넘게 걸렸다.
왕버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연못을 돌아 순흥면사무소 쪽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되는데, 왕버들과 비슷하게 수령이 400년쯤 되는 느티나무 노거수다.
왕버들처럼 이 느티나무 역시 1754년 정원을 조성할 때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을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높이가 18m쯤이고 가슴높이 둘레도 6m를 넘는 큰 나무다.
줄기 안쪽이 텅 비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나무지만, 여전히 푸른 잎을 싱그럽게 틔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면사무소 앞 유적공원의
도호부관아 출토 석물, 석불입상, 선정비 등 역사의 흔적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느티나무의 품새는
옛 선비의 단정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느티나무 곁으로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을 지나 순흥면사무소 앞으로 가면
다시 큰 느티나무 두 그루를 볼 수 있다.
느티나무 두 그루 역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다.
수령이 각각 200년, 150년쯤 되고, 높이는 두 그루 모두 14m 정도 된다.
혁파된 후 재설치된 순흥도호부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이고, 순흥면사무소의 풍광을
싱그럽게 하는 나무다.
400년 된 느티나무를 비롯한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삼각형으로 연결했을 때
그 한가운데 특별하고 신비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이 100년쯤 된 나무이고 ‘영주 읍내리 연리지송’이라고 불린다.
연리지는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만나서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가까이 붙어서 자랄 때 나타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주 읍내리 연리지송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연리지가 형성됐다.
둘로 나뉜 줄기가 배배 꼬이듯 솟아오르다가 10m쯤 높이에서 아예 하나로
완전히 붙어버렸다.
연리지도 보기 드문 현상인데 이런 형태의 연리지는 더욱 드물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됐고, 이 지역 사람들은 두 가지의 금실이 좋다 해서
‘금슬송(琴瑟松)’이라고도 부른다.
읍내리 왕버들과 주변의 노거수들은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옛 순흥도호부 관아 터에 서서,
이 지역 옛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기상과 정신을 전해주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들이다.
(글출처 : 뉴스케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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