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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군북 어계고택 및 채미정 (2022.11.20.)

 

 

 

 

 

 

 

 

 

 

함안 어계고택 (咸安 漁溪古宅)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조선 전기의 문신 어계 조려(14201489)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조려 선생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단종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영월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뒤

왕의 얼을 동학사에 모셨다.

그 후 어계 선생은 이곳에서 낚시로 여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후손들의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채·재실·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문채는 3칸으로 가운데 문을 높여 세운 솟을대문을 두었고

양쪽은 방으로 만들었다.

 

재실은 앞면 4·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자형 평면으로 부엌이 없이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양쪽은 툇마루를 둔 방을 1칸씩 만든 후 주변에는 담을 둘렀다.

 

사당은 3자형 평면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집이다.

비교적 장식이 섞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로 어계 선생과 부인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대체로 건물의 구조·재료·형태들이

조선 후기 민가의 평범한 양식을 갖추어 간결하고 검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글출처 : 문화재청)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어계고택과 채미정

 

 

방어산 마애불 입구인 하림삼거리에서 진주로 난 길은

경전선 철도와 함께 하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원북리는 함안땅 어디나 그러하듯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어 보이나

이곳은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 조려(漁溪 趙旅, 1420~1489)가 태어나고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을 곳곳에는 어계고택과 채미정, 서산서원 등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조려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의 아들로 자는 주옹(主翁)이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올바르고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가 총명하였고 의리를 중히 여겼는데,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곳 함안으로 물러나

죽을 때까지 낚시와 소요로 은거하며 단종을 연모하였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 등 다른 생육신들도 다 그러했지만,

 특히 어계는 낙향 후 철저히 은거함으로써 세상과 다시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이러한 어계의 삶을 함안사람들은

중국 주나라 때 불사이군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면서

원북리 뒷산인 서산(西山)을 백이산(伯夷山)이라 불렀다.

 

 

 

 

 

 

 

 

 

 

 

 

 

숙종 15(1689)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어계 또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숙종 29(1703)에는 경상도 유생 곽억령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의 사당을 세웠으며, 

숙종 39(1713)에는 손경장 등의 상소에 의하여 서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02년 어계 선생의 종중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 사촌리에 다시 서산서원을 건립하였으며,

1980년에는 현재의 자리로 새롭게 지어 이전하였다. 

현재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서산서원의 역사이다.

 

 

서산서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 선생을 모신 사액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다시 세웠다.

서원을 지나면 길 왼쪽으로 옛 서산서원의 부속정자였던 채미정(采微亭)이 나오고, 

오른쪽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어계고택, 즉 어계생가가 나선다.

 

현재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하는 어계고택은

대문채와 원북재(院北齋)라 불리는 재실(齋室), 그리고 사당인

조묘(祖廟)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삼문으로 된 대문채를 지나면 원북재이다.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형 평면 팔작지붕집인데, 

중앙 2칸은 넓은 대청마루이고 좌우는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다. 

부엌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북재 뒤 삼문을 지나면

퇴칸이 있는 3 자형의 평면에 맞배지붕을 한 조묘가 나온다. 

원북재에 비해 연화문 초각 등 비교적 장식이 많이 섞인 모습이다. 

조묘 안에는 어계 선생이 짚고 다니던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

보관되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어계고택은

건물의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고 검약한 편이다. 

배흘림이 뚜렷하고 높은기둥으로 인해

시원스런 멋을 보이는 조선 초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그밖의 건물 구조와 형태, 재료로 보아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평범한 민가 양식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계고택이라 부르나 어계 선생 생전 당시의 건물이 아니라

시대가 한참 내려온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다.

 

원북재 왼쪽 담장가에는 수령이 약 25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가을이 되면 단풍이 원북재 앞뜰을 가득 덮는다.

 

 

 

 

 

 

 

 

 

 

 

 

 

 

 

 

 

 

 

 

 

 

 

 

 

 

 

 



 

 

 

 

 

 

 

 

 

 

 

 

 

 

어계고택에서 다시 마을 입구로 나오면 채미정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산서원이 훼철될 때

서원의 부속정자였던 채미정만이 홀로 남았는데, 

이 또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옛터에 복원되었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주나라 때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살았다는 고사를 따랐다. 

예전에는 솟을삼문을 지나 작은 연당을 건너 채미정에 오를 수 있었는데, 

솟을삼문 앞으로 경전선 철도가 지나게 된 지금은

정자를 둘러싼 담장 왼쪽에 만든 작은 쪽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주나라 때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붙인 이름의 정자로, 

어계 선생은 낙향한 후 이곳에서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진 채미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자리해 있고 나머지는 모두 툇마루로 구성돼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처마 밑에는 百世淸風’(백세청풍) 현판이 걸려 있는데

글 내용은 어계의 곧고 맑은 충정을 상징한다.

 

 

 

 

 

 

 

 

 

 

 

 

 

 

 

 

 

 

 

 

채미정 안 처마 밑에는 백세청풍 이외에도 여러 현판이 걸려 있다. 

그중 어계 선생의 9대손이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采微亭記’(채미정기) 현판이 눈에 띈다. 

조영석은 어계의 글들을 수집하고 부록을 붙여 어계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채미정기 현판

 

 

 

어계 선생의 9대손인 관아재 조영석이 쓴 현판으로, 

이곳에 사당을 건립하고 생육신을 제사지낸 사실이 기록돼 있다.

채미정과 붙어 있는 언덕 위를 청풍대(淸風臺)라 부른다. 

청풍대에는 문풍루(聞風樓)란 육각정이 있는데, 

더운 여름날 이곳에 앉아 있노라면 한줄기 청아한 바람이 온몸에 젖은 땀을

말끔히 씻어낸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하림삼거리에서 원북리로 가다보면 길 왼쪽에 수려한 바위절벽이 보인다.

어계대라 씌어 있는 이 바위절벽 밑으로는 어계천(漁溪川)이 흐르는데, 

지금은 작은 개천이지만 조려가 은거할 때만 해도 폭이 넓고 물도 깊어 물고기가 많았으며, 

조려가 낙향 후 이곳에서 즐겨 낚시를 하였다고 한다. 

조려의 호()인 어계는 이곳 어계천에서 따온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때 함안 이곳으로 내려온 어계 선생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가 있던 단종에게 수시로 문안을 드렸는데,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문상을 하러 청령포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어 통곡을 하니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등에 업고 건네주었다고 한다. 

 

영월 장릉(단종의 묘)에서 청령포로 가는 도중 만나는 흰재에

그 내용을 기록한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어계고택과 채미정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