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소산정사
固城 疏山精舍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3호
고성 소산정사는 집안의 글방으로 사용하던 서재 건물이다.
정사의 이름은 주변에 있는 소흘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890년에 처음 세웠으며 1915년에 크게 고쳐 지은 후 여러 차례 수리를 하였다.
이 정사는 함안 이씨 문중의 소호공(小湖公), 군수군(郡守君)이 세웠다.
소호공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아들인 군수군은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후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였다.
시루봉의 남쪽 비탈면 끝자락에 남서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소산정사가 있으며,
정자인 한루정과 창고, 부속 기와집이 각각 1채씩 있다.
한루정과 같은 규모의 호은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1999년에 소실되었다.
소산정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중앙의 마루 2칸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온돌방 2칸,
오른쪽에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온돌방에는 방을 중심으로 앞뒤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툇마루가 발달한 겹집구조라고 할 수 있다.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처마와 기둥 사이에 짜 맞추어 댄 나무인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부재를 끼운 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서까래를 놓도록 하는 나무인 도리는
5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리의 받침 역할을 하는 장여와 기둥들을 연결하는 창방 사이에는
화반 2개가 놓여 있다.
한루정
한루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소산정사의 동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마루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여 등의 밑에 받치는 됫박 모양의 네모진 나무인 소로를 받쳐서 장식한
소로수장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도리는 3개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간채는 앞면 5칸·옆면 1칸으로 ,
가마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좌우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설치한
솟을대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소산정사로 드나들 수 있는 대문을 비롯하여
각 건물과 통하는 대문이 따로 있다.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 건물의 실용성에 맞춘
다양하고 변화있는 건물의 특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함안 이씨 약사
한자 : 咸安 李氏
이칭/별칭 : 파산 이씨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 류진희
[정의]
이상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
[개설]
함안 이씨는 이상(李尙)을 시조로 하고 고려조부터 함안에 토착하여 대대로 살아온 성씨이다. 이를 '파산 이씨(巴山李氏)'라고도 한다. 함안의 성씨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공통으로 이씨·조씨(趙氏)·채씨·윤씨·유씨(劉氏)·정씨(鄭氏)·최씨·김씨·강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씨’는 그 시기상으로 함안 조씨보다 먼저 함안에 세거했던 함안 이씨를 지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원]
고려 고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진 이상을 시조로 삼고 있다. 고려 초기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지낸 이원서(李元敍)를 원조(遠祖)로 하여 이탕취(李湯就)·이광주(李光柱)·이용기(李龍起)를 거쳐 시조 이상으로 이어졌다고 하나 상계(上系)는 실전되어 고증할 수 없다. 시조 이상의 두 아들 이청(李淸)과 이원(李源)은 각각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이청의 아들은 문화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홍(李弘)이고, 충의공이원의 아들은 고려말 상장군을 지낸 충렬공이방실(李芳實)[? ~ 1362]이다. 이방실은 홍건적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 부사가 됨으로써 함안 이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렸다.
조선조에 이르러 8세 이미(李美)는 명관으로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들 이인형(李仁亨)·이의형(李義亨)·이예형(李禮亨)·이지형(李智亨)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인형은 문과에 장원하여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하였다. 이의형은 집의를, 이예형은 예조 좌랑을, 이지형은 대사간을 지냈다. 이인형의 셋째 아들 이령(李翎)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서 기묘사화 때 피살되어 기묘명현(己卯明賢)에 들었으며, 이의형의 넷째 아들 이익(李翊)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9세 양간공(襄簡公)이세응(李世應)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호조 참판·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세응의 세 아들 여주 목사 이진(李震)·대사간 이림(李霖)·충훈부경력 이제(李霽)도 함께 을사사화에 피화(被禍)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 운포(雲圃)이달(李達)·송암(松巖)이복(李福)·신천재(新川齋)이응성(李應星) 등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모두 선무원종공신으로 책훈되었다. 경상도 수군우후 이엽(李曄)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끝내 자진하여 『국조인물고』에 실렸다. 11세 이석형(李碩亨)은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있던 중에 아들 이민(李旻)·이승(李昇)·이안(李晏) 삼 형제와 더불어 네 부자가가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이민·이승과 함께 세 부자가 전사함으로써 양대에 걸쳐 삼정려(三旌閭)가 내려졌다. 함안 이씨 집안은 가히 조선 전기 전국적인 명문으로 부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향 경위]
원래부터 함안에 거주했던 토착 사족이다. 『함안 이씨 세보』임술[1862] 중간본에는 고려 초기 이원서로 부터 함안에 거주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도 함안현 병곡면 내동리 두봉(兜峰)[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에 세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황]
2000년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함안 이씨는 총 1만 1803가구에 3만 7597명이며, 경상남도에 1만 32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대부분이 고성에 모여 살고 있으며, 함안에는 105가구에 270명이 살고 있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자손은 시랑공파 이의형의 증손인 계공랑(啓功郞) 이세평(李世平)의 후손으로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와 가야읍 말산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지형의 5세손 이몽서(李夢瑞)의 후손들은 대대로 함안군 산인면 운곡리 어현동(魚峴洞)에 세거해 왔다. 충의공파에서는 이천공(伊川公)이돈흡(李墩洽)이 지금의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로 이거한 후 자손들이 소포리와 중암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오늘날에도 가야읍과 산인면 등지에 거주하면서 이방실 장군의 사당 충렬사를 수호하며 봉사해 오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에 위계 서원(葦溪書院)이 있다. 이인형·이의형·이익인(李翊仁)·이현(李顯)·이응성 등의 위패를 모신 문중 서원으로, 1844년(헌종 10)에 창건되었다. 1869년(고종 6)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4년에 다시 세웠다. 이방실 장군의 영정이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남강 서원(南岡書院)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방실 장군 기마 동상이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함안 공설 운동장 앞에 있다. 이 외에도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봉곡에 이방실 장군 태역비(李芳實將軍胎域碑)가 있다.
[참고문헌]
『함안 이씨 세보』임술(1862) 중간본
『함안 이씨 대동보』(1986)
『함안 이씨 약사(咸安李氏略史)』(함안 이씨 종친회, 2003)
『함안의 인물과 학문』(함안군·함안 문화원, 2005)
『함안 군지』(함안 군지 편찬 위원회, 2013)
(글 출처 : 디지털함안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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