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양산 통도사 안양암
한눈에 내려다본다는 것,
그것은 대단히 짜릿한 우월.
총총 안달난 마음이 산길을 달려 통도사(通道寺) 안양암(安養菴)으로 향한다.
절집이 앉은 자리는
안양동대(安養東臺)라 하여 통도8경 중 제2경으로 꼽히는데,
통도사 13개 산내암자 중 가장 전망이 좋다고 했다.
해발 1천m가 넘는 영축산(靈鷲山)에서 그저 고도 200m가 조금 넘는 자리지만,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그곳에서 활을 쏘려다 눈앞에 보이는 경관이
너무 빼어나 활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길을 휘돌아 주차장에 선다.
아름드리 소나무 길을 조금 걸으면 단정한 지붕선이 하늘을 가르고
이미 시야는 거침없다.
안양암은 솔숲과 대숲에 폭 안겨 있고,
조막만 한 화강석 계단이 안양암 안마당으로 내려선다.
계단참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햇살 속에 서 있다.
동백나무 곁에서 ‘안양암’ 현판을 단 커다란 전각의 얼굴을 본다.
중심법당이다.
정면 5칸 중 한가운데를 조금 더 넓게 구성했고,
섬세하면서도 큼직큼직하게 조각한 꽃살문을 달았다.
불교에서 안양은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곳이다.
그래서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다.
아미타불을 봉안한 전각은 극락전, 미타전, 무량수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니까 이 법당은 극락전이다.
안양암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통도사 사적기에 나오는 안양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충렬왕 21년인 1295년에 찬인대사(贊仁大師)가 창건 또는 중건했다는 것이다.
이후 고종 2년인 1865년에 중창이 있었고 1968년에 우송화상이 중수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근래의 것이다.
법당 옆으로 요사채인 고금당(古金堂)과 청송당(靑松堂)이 자리한다.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양암과 마주보는 것은 북극전(北極殿),
그 뒤에는 큰 스님의 거처인 심우실(尋牛室)이 있다.
심우실 위쪽에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독성각(獨聖閣)과
산신을 모신 산운각(山雲閣)이 하나의 건물에 자리한다.
마당 앞쪽에는 사주문이 서 있다.
환한 전경을 향해 앞장 선 듯하다.
그러나 문 앞은 돌담,
문은 나아가지 못하고 덩그러니 오브제로 자리한다.
현판은 정토문(淨土門)이다.
정토는 번뇌가 사라진 청정한 세계,
부처의 땅, 곧 극락을 뜻한다.
극락, 정토, 안양, 피안 등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 말들이다.
돌담 앞으로 가파른 길이 내려간다.
통도사와 안양암을 연결하는 옛길이다.
길가 석축이 고아하다.
◆북극전과 심우실
북극전은 중창이 이루어진 1865년에 건립된 것으로
안양암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상암(寶相庵)이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북극전만을 안양암이라 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 간격이 2m가 되지 않을 만큼 작다.
기둥 아래에는 황토빛의 자연석 주추를 소박하게 놓았다.
그 작은 몸 위에 커다란 팔작지붕이 올라 있다.
육중한 지붕은 탄탄한 활주가 받치고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화강석 주추가 지극히 정성스럽다.
넓은 기단에는 포방전을 깔고 가장자리를 화강석으로 둘렀다.
건물의 내외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여래도, 화훼도, 운룡도, 주악비천도, 연화도 등이 빼곡한데
이들은 모두 북극전 건립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북극전은 사람의 장수를 도와주는 북두칠성을 봉안하는 불전으로
칠성전이라고도 한다.
복을 기원하는 칠성신앙이
우리 민중 속에 얼마나 뿌리 깊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북극전 뒤에 자리한 심우실은 ‘마음을 찾는 방’이란 뜻이다.
심우는 사람의 본성을 찾는 과정,
즉 마음 속에 일어난 생각을 버리기도 하고 그 생각을 따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으로 비유한다.
스님이나 동자승이 소를 찾는 모습을 그린 것을 심우도(尋牛圖)라 하는데
사찰 벽화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스님이 큰 스님이 되어도 심우의 과정은 끝이 없는 것일까.
큰 스님의 방이 낮은 담장을 앞에 두고
훌쩍 아래를 내려다본다.
◆안양동대에서
안양암이 앉은 평평한 자리를 안양동대라 한다.
혹은 청송당 위쪽 안양암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안양동대라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는 안양암 입구에 쌓아 놓은 석축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해가 떠오를 때
안양암에서 통도사 대웅전쪽을 바라보는 경관이라고도 한다.
그저 안양암 곳곳 발길 닿는 모든 자리, 안양암에서 보이는 모든 세상이 안양동대가 아닐까.
영축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가 안양동대 아래에서 합류해
통도천의 동구를 이룬다.
결국 안양동대는 영축산 통도천 계곡의 전망대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경찰의 감시 하에 있던
만해 스님이 이곳 안양암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것을 주선한 이가 구하(九河) 스님이다.
구하 스님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1884년 겨울에 13세의 나이로 출가해
이후 통도사 주지, 동국대 학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08년 통도사 내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현 부산해동고)와 통도중(현 보광중)을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 안양암에서 만해 한용운에게
논 60두락(3만9천600㎡)에 해당하는 기금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건네주었다고 한다.
구하 스님은 한국의 승려 중 유일하게 일왕을 만나고,
제자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친일파로 여겨졌다.
이후 구하 스님이 행한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내역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오명을 벗었다.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로 와야지.”
구하 스님이 1965년 11월24일 한낮,
입적에 들기 전에 남긴 말이다.
통도사로 돌아오셨습니까?
심우실 앞에서 통도사를 내려다본다.
불과 500m 정도의 거리다.
짜릿함도 우월도 없이,
왜구가 활을 떨구듯 어쩐지 갈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
심우를 부르는 동대다.
(글출처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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