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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함양 일두(정여창)고택 - 6 (2018. 04.01.)















 

 선비와 정자의 고장, 경남 함양은 

한때, ‘내륙의 섬’이라 불릴 만큼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었다.

서쪽엔 백두대간, 남북으로는 지리산과 덕유산이 첩첩이 벽을 두르고,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때문에 함양은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청정지역으로서,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자연보호와 전통계승의

기회로 활용한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맑고 기품 있는 군자君子정신이 살아있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좌 안동 우 함양, 좌 퇴계 우 남명’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안동이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고, 낙동강 서쪽에서는 함양이 그런 땅이며,

퇴계 이황에 필적하는 대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함양에 있다는 자긍심이 가득한 자랑이다.

 그런데, '우 함양'의 기틀을 확립한 이는,

조선시대 동방오현 중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이다.

그는 세종 때에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나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김굉필과 함께 영남사림의 거두인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갔던 선생은, 

세자에게 강론을 하는 시강원 설서를 지냈고,

안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 했어나,

연산군 시절에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1498년)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뒷날 후학들이 그를 기려서 신축한 남계서원이 근처의 수동면에 남아 있는데,

이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다음으로, 2번 째로 건립된 역사 깊은 서원이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원 뒤에는 선생의 산소가 있다.......







주거건축-008. 함양 일두 정여창고택 - 백세청풍, 선비의 기품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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