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문학관
- 이하 글 출처 : 강 문 석 -
남해의 수평선과 맞닿은 곳의 문학관은
해안에서 밀려오는 갯냄새로 바다의 정취까지 느끼게 해준다.
이제 막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들판에 얼굴을 내민 갈대꽃이 청순하고
무리지어 청초하게 피어난 코스모스가 소슬바람을 타고 하늘거린다.
소설가 김승옥과 아동문학가 정채봉 두 인물을 기리기 위해 만든 한옥구조의 문학관은
부속건물과 마당까지 합치면 축구장 두 개 넓이는 족히 될 듯하다.
하지만 이제 막 문을 연 때문인지 문학관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내용은 빈약했다.
순천만정원에 도착할 때까지 난 문학관이 그곳에 생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정원을 들어섰을 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성안내원들이
스카이큐브를 타야만 넓은 경내를 하루에 다 둘러볼 수 있다고 아내에게 귀띔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두 차례 정원을 찾았지만 늘 시간에 쫓겨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터라 그 말에 귀가 번쩍 열렸다.
그랬지만 8천원이나 되는 승차요금을 받으면서 노인들에게 할인혜택을 주지 않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많은 인력을 풀어 안내를 그렇게 한 때문인지 일요일인 이날 정원을 찾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승강장으로 꾸역꾸역 몰려들면서 대기하는 줄까지 길게 생겼다.
탈것에 올랐지만 정원을 빠짐없이 탐방할 수 있다는 안내는 사실이 아니었다.
잘 꾸며놓은 정원단지를 벗어난 전동차는 부락과 들판이 차례로 나타나는 평야를 가로질러
순천만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4.6킬로미터를 12분 동안 내달려 열차가 당도한 곳은 그 이름도 생소한 ‘문학관역’이었다.
문학관 입간판과 관리소격인 한옥 건물 그리고 담장을 낮게 두른 두 개의 문학관이 있을 뿐
아직은 그 흔한 기념비석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관리소 앞 자그만 판매대에는 세 종류의 책들이 큼직한 글자로 된 가격표를 매달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책들을 거들떠보는 이는 없었다.
아내가 저만큼 처마 밑에 떨어져 서있는 것도 책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표시였다.
책 ‘순천만’은 국판으로 150쪽 분량인데 많은 면을 차지한 생생한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나머지 46판 두 권은 김승옥의 소설집이었다.
각각 단편 6,7편을 싣고 있는데 문학관을 만들면서 급하게 찍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대부분은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 읽은 것들이지만 난 그 책들을 구입했다.
말은 안 해도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오늘도 해댄 것이다.
이제 있는 것도 버리고 떠나야 할 사람이 허욕을 부린다는 아내의 지적엔 딱히 답할 말이 없다.
다소 생뚱맞게 들리겠지만 가장 여행을 잘하는 사람은 여행지의 음식을 먹어주고
그곳 물품을 사주는 이라고 여행고수들은 말한다.
어느 때부터 난 그 말에 동의하면서 자주 아내와 그 일로 마찰을 빚었다.
관리인은 요구하지도 않은 저자의 친필서명을 책에다 받아주겠다고 한다.
그럴 테니 다른 곳을 더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그때서야 ‘아! 그래, 맞아. 저자가 이순 무렵 쓰러졌단 말만 들었었지….
아직 생존해 있는 게로구나…’ 그의 친필을 만날 수 있다니 내심 반가웠다.
프랑스 낭트 시와 자매결연으로 꾸민 이국풍의 ‘낭트정원’도 문학관 마당과 붙어있었다.
낭트정원엔 유럽풍의 단층 건물 외벽을 친환경에 맞추어 푸른색으로 칠한 카페도 들어서
젊은이들이 연신 드나들고 있었다.
문학관에선 순천만 갈대숲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용산전망대도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입장하여 둘러보지 못한 정원을 떠올리며 전망대를 찾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렀다.
저자 김승옥은 방문을 반만 열고 한손으론 문고리를 잡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방객을 맞았다.
관리인이 미리 "작가선생님이 오늘 서울 집에 가는 날이라 지금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길게 잡고 얘기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걸 알고 만났다.
그의 실제 나이인 일흔 중반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얼굴로 봐선 혈색도 좋고
소년처럼 천진스러워 보이는 미소까지 보이니 오래 친숙하게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정감이 갔다.
“대부분 출간 당시 읽은 작품들이지만 이곳 방문 기념으로 구입했다”는 말을 건넸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웃음으로만 일관했다.
중풍을 맞은쪽이 글자를 쓰는 팔이었던지 책에다 20글자씩 써준 글씨가
지렁이처럼 흐느적거리며 책의 앞장에 붙어 있어서 애잔한 마음이 생겼다.
김성옥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광복과 동시에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와
고등학교까지를 이곳에서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나의 삶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묶겠다고
퇴직과 동시에 B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소설 창작을 공부했다.
그때 ‘한국의 소설가론’에서 김승옥을 만났다.
그의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에다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로
구성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높다는 평도 들었다.
그의 문학은 비정상적인 삶에 대한 연민이나 윤리적 패배의식의 극복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은 당시 시대상황이 지식인들의 고뇌와 자기비판으로 점철되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지식인들이 고뇌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었고
새로운 필치로 언어학 면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가 문단에 나오기 이전인 구세대 작가들에게는 일본어로 생각하고
한자가 섞인 문장을 써서 다시 한글로 옮겨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설문장이라는 사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글인 한글로 쓰는 진정한 한글세대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문학사뿐만 아니라 언어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겠다.
거기다가 그는 남다른 서정성으로 감성적 이미지를 물씬 풍기며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후기로 갈수록 그의 소설은 퇴색하고
수려했던 필체는 점점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24년 간 절필하면서 뇌졸중까지 겪게 되고 발병 이듬해인 2004년에야
‘내가 만난 하나님’을 썼다.
그는 이 책에다 절필하고 난 뒤 겪은 초현실적인 종교적 체험을 실었다.
내가 대략 알고 있는 이러한 인물을 직접 대면한 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구상중인 소설이 완성되면 보내드리겠다며 건승을 당부했고 명함을 내밀면서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학관의 정채봉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로
지난 1995년에 순천시에 합병된 승주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고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서 본다면 아까운 나이인 55세에 떠났다.
문학관 주변엔 벤치와 원두막도 마련되었고 군데군데 잔디밭도 있다.
이러한 쉼터나 잔디 위에서 우리도 외국처럼 독서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카메라를 들고 인근의 자연생태공원까지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문제는 스마트에 있었다.
아베크를 즐기는 청춘들은 물론이고 초등학생 꼬마들로부터 중년들까지
약속이나 한 듯 손에는 화면이 켜진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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