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雲門寺)
[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개설]
운문사는 호거산 아래 넓은 장군평의 평지 자락에 있는 고찰이다.
산지 가람에 속하는 운문사는 형태면에서는 평지 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쪽은 운문사, 북동쪽은 호거산, 서쪽은 억산과 장군봉이
돌아가며 절을 감싸고 있다. 이 모양이 연꽃 같다고 해서
흔히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기도 한다.
[건립 경위 및 변천]
1. 창건
557년(신라 진흥왕 18) 한 신승(神僧)이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절을 짓기 시작하여 동쪽에 가슬갑사[폐사],
남쪽에 천문갑사[폐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폐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다. 이때 왕이 승지에 절이 창건되었다는 말을 듣고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2. 신라·고려 때의 중창
600년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고, 가슬갑사로 옮겨 귀산과 추항 등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930년 보양 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973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도운 보양 국사에게 보은의 뜻을 담아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대작갑사의 명칭을 운문사로 부르게 되었다.
1105년 송나라에서 천대 교관을 배운 뒤 귀국한 원응 국사가 3차 중창을 하여
전국 제2의 선찰(禪刹)로 만들었다.
1277년부터 일연 대사가 5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을 시작했다.
일연 대사의 행적비가 운문사 동편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3. 조선 후기의 중창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시대 운문사의 변천 과정을 전하는 정확한 문헌은 없다.
다만 2006년 운문사 비로전[구 대웅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의
가람배치도에 따르면 1655년 운문사에는 크고 작은 27개의 전각이 있다고 전해진다.
18세기 들어와서 설송 연초(雪松 演初)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 어떻게 중창되었는지 정확한 내용을 기록하는 바는 없으며,
1694년 운문사의 부속 암자인 내원암이 중창되었으며, 27개의 주요 전각에 대한
중수 불사가 거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운악 두안(雲岳 斗晏)에 의해 1839년 오백 나한전이 중수되고,
1840년에 응진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미타전이 중수되었고,
1840년에 산내 암자인 내원암과 북대암이 중수되었고, 1841년 청신암이 중수,
1842년 금법당이 중수되었다.
4. 일제 강점기 중창
일제 강점기에 운문사는 초대 주지 유긍파(兪肯坡)로부터 8명의 주지가 승계했다.
1930년대 당시 전각은 대웅전, 광명대, 탑, 금법당, 작압전, 칠성각, 관음전, 지장전,
만세루, 주지실 및 사무실, 정문과 협문, 십육전, 목사실, 영각급고방, 설송대사와
원응국사 비각 등이 있었고, 소속 암자는 청신암, 북대암, 사리암, 내원암 등이 있었다.
5. 현대 중창
광복 후 운문사는 대처승이 거처하였다. 1954년 이후 불교 정화 운동으로
대처승이 물러나고 비구니 승려가 수행하는 현재의 비구니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1955년 금광 승려가 비구니 초대 주지로 부임한 후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명성 승려가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까지 대웅보전, 청풍료, 삼장원 등
30여 동의 전각과 요사채를 신축, 중수하는 등 도량의 면모를 크게 일신하였다.
[활동 사항]
운문사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현대 비구니 도량이 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 한국 불교사의 최초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서 운문사는 비구니들의 승가 교육을 위한 강원으로서 운문사의 활동이 있다.
이를 위하여 운문사는 일찍이 1958년 운문사 강원을 설립하고
2011년 현재 제47회 졸업식으로 1,7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국내 최대 규모와 학인 수를
갖춘 운문사 승가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 외 2008년 부처의 지고지순한 계행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기 위하여
보현 율원이 개원하여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한문 불전과 경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설립한 한문 불전 대학원이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운문사의 가람은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입구 쪽 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33개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있는 운문사에는 운문사 승가 대학과 운문사로 구분되는데,
2012년 현재 운문사 승가 대학의 학장은 일진 승려이다.
운문사에는 약 300여 명의 비구니들이 있으며,
승가 대학에는 학과별로 사미니과에 약 4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1. 불전 구역의 건물
대웅보전은 입구 범종루에서 우측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1994년 건립되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하고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삼세불상과 함께 사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 맞은편에 위치한 만세루는 1105년 원응 국사가 제3차 중창할 시기에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구 대웅보전이라 불리는 비로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105년 원응 국사가 창건했고, 현재의 건물은 1653년 중창되었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해서 대웅전으로 불린다.
비로전 좌측에 위치한 오백전은 원광 국사가 창건한 이래 창건과 중수를 반복한 것으로
법당 안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상이 있다.
작압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으로 단출하게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석조여래 좌상과 사천왕 석주가 봉안되어 있어 대작갑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관음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서 작압전 옆에 있다.
명부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칠성각은 1890년 박선원 승려가 창건한 것이다.
응진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조영당은 정면 2칸으로 창건주 원광 국사를 비롯하여 여러 대덕 승려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2. 요사와 강원 건물
운문사에는 비구니들의 요사와 강원으로 사용되는 건물들이 별도로 있으며,
이곳은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다.
이곳에는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요사로 금당이 위치한다.
원광 국사가 건립한 건물로 1842년 중수한 뒤 1912년 개축하였다.
삼장원에는 화엄경을 비롯한 고서 5,000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이 외 1996년 조성된 수목원 다실과 초정이 있으며, 1982년 중창한 죽림헌과
목우정이 있다.
대웅보전의 왼편에 위치한 불전구역에 위치한 유일한 요사인 전향각이 있다.
3. 부속 암자
운문사에는 동쪽 사리암, 북동쪽 내원암과 청신암, 북쪽 북대암이 자리 잡고 있다.
사리암은 930년 보양 선사가 창건하고, 1845년에 정암당 효원 승려가 중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증축하고, 중수하였으며, 1980년 3층의 요사를 신축하고
1983년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다.
현재 천태각, 관음전, 자인실, 3층 요사채가 있다.
100인의 학승이 모여 수학했던 곳 내원암은 운문사의 북동쪽에 있다.
운문사 산내 암자 중 제일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원응 국사 학일이 창건하였다.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 당시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 도량이 되었으며,
1992년 무량수전과 멱우선실, 삼성각, 요사 등이 신축되고
1998년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관련 문화재]
운문사에는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을 비롯하여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 청도 운문사 동호[보물 제208호],
청도 운문사 원응 국사비[보물 제316호],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317호],
청도 운문사 석조 사천왕상[보물 제318호],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보물 제678호],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연 기념물 제180호],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 삼신 불회도」[보물 제1613호] 등 8개의 보물과
1개의 천연 기념물이 있다.
운문사 승가대학장 일진스님
[글 출처] 불교신문 청도=장영섭 기자
“스님이 되지 않았더라면 여군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공부에도 웃음에도 각이 잡혀 있다.
운문사승가대학장 일진스님의 삶은 법명대로 ‘일진(一眞)’다웠다.
평생이 불교를 공부하고 가르쳐온 외길이었다.
위로 받들고 아래로 다정한 대중생활에도 온힘을 다했다.
하긴 수고라고 할 것도 없이 체질에 가깝다.
“함께 하는 삶이 어려서부터 즐거웠다”며 웃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세밑, 첫차를 타고 아침 일찍 운문사를 찾았다.
경북 청도 호거산(虎踞山) 자락에 안긴 운문사 주변엔 유원지도
그 흔한 사하촌도 없다.
믿음직한 고립의 공간엔 학인들의 독경소리만 견실하다.
일진스님이 <화엄경> 강의를 마친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스님은 올해로 출가 46주년을 맞았다. 충남 서산이 고향으로 1남6녀 가운데 막내였다.
“발심출가가 가장 위대한 출가이지만 자신의 경우엔 인연출가”라고 몸을 낮췄다.
그만큼 자연스러웠고 당연하게 여겼다. 서산 개심사가 지척이었다.
당시 개심사는 운문사처럼 비구니 강원(講院)이었고, 신심이 돈독했던 모친 덕분에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집을 드나들었다. 이모 같고 사촌 같던 수행자들은
집안의 딸들을 곁에 앉혀두고 “너는 나중에 내 상좌, 너는 이 스님 상좌하라”며 농담을 던졌다.
농담의 절반은 정말로 실현됐다. 여섯 자매 가운데 셋이 머리를 깎았다.
용인 화운사 혜준스님이 일진스님의 셋째 언니이고 서울 양지암 성업스님은 다섯째 언니다.
출가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행자 일이 어려워 다들 녹초가 되는데 자기는 외려 살이 쪘다”고 술회했다.
남들은 가혹하다던 규칙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지금도 밥은 제 시간에 여럿이서 발우에 먹어야 제 맛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커간다.
혼자 서려면 둘이 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일진스님의 은사는 재석스님이다.
조용히 묻혀간 스님이지만, 어른 스님들 사이에선 ‘공양주 잘 산 스님’으로 기억되는 스님이다.
은사의 꿈은 ‘내 상좌 강사 만들기’였다.
“신심이 충만했던 그 시절에 법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새벽에 숙소로 내려오는데,
산을 오르는 비구 스님 몇 분을 마주쳤어요.
‘여자가 백년을 해 봐라. 깨달을 수 있나’라며 갈 길을 갔지요.”
‘여성은 과연 성불할 수 없는가’라는 회한 섞인 의문이 그날로 화두가 됐다.
팍팍한 살림에도 제자의 공부를 끈질기게 뒷바라지하려 했던 재석스님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책을 사서 보냈다.
“진실한 즐거움은 ‘바름’에서 나온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운문사 승가교육 현장.
운문사에서 자라며 운문사를 일으킨 일진스님은 곧 운문사다.
그전의 주역은 운문사 회주이자 비구니계의 큰 별인 명성스님이다.
재석스님이 공부의 원력을 심어주었다면, 명성스님은 공부의 내공을 안겨주었다.
재석스님과 명성스님은 도반지간이었고, 재석스님이 약관의 일진스님을 명성스님에게 부탁했다.
명성스님은 운문사의 역사다.
1970년 운문사 강주로 부임한 이래 폐사지나 다름없던 절을 지금의 운문사로 일으켜 세웠다.
1985년 명성스님의 첫 전강(傳講) 제자는 일진스님이었다.
비구니 강단사 최초의 일이었다. 운문강원 화엄경반(4학년) 학인 신분으로
치문반(1학년) 학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해서 8년간 중강소임을 본 끝에 돌아온 결실이었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던 명성스님은 “모난 그릇조차 싫어한다”고 할 만큼
화합과 법도를 강조하던 스승이었다.
“언제 어느 때나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한다”며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하지 말고
큰일이라고 두려워 말자”고 기자에게도 말했었다.
깐깐해서 되레 인자함이 빛을 발하는 어른이었다.
“공부하다 큰스님 방에 들어 스님의 편찮으신 다리를 이따금씩 주물러 드리면
장난삼아 물으셨어요. ‘너 이다음에 뭐될래?’라고. ‘강사될 겁니다’하면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일진스님은 2014년 <승만경을 읽는 즐거움>을 펴내며 세간에 이름을 알렸다.
부처님 당시 승만부인이 무상정등각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한 행적을 담은
<승만경>에 대한 해설서다.
<승만경>은 대장경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이 설한 경전으로 주목받으며
남성중심주의로 왜곡된 불합리한 여성관을 바로잡았다.
스님의 저서는 40여 년 전 품었던 화두에 대한 도전이자 해답인 셈이다.
이 책이 주가를 올리면서 종교인 초청 방송프로그램에도 간간이 출연해
시청자들의 슬픔을 들어주고 다독였다.
스님은 “세상에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성이, 어머니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희망찬 앞날이 열릴 것”이라며 여성불자들의 지속적인 수지(受持) 독송(讀誦) 실천을 권했다.
물론 그렇다고 남성에 적대적인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각자의 장점과 역할이 다를 뿐”이라며 차분하게 말했다.
교단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던 근원은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 덕분인 듯싶다.
8년 전에도 운문사에 왔었다. ‘학림성사(學林盛事)’란 제목의 기획물을 연재하며
전국 강원의 현황과 역사를 취재하던 길이었다.
그때 “2007년 6월 현재 256명의 학인이 공부하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은 정확히 반 토막이 났다.
출가자의 감소, 특히 여성 출가자의 급감은 종단의 심각한 문제다.
한편으론 여성의 ‘삶의 질’과 사회적 인권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진스님은 ‘소수정예’에 희망을 걸었다. “숫자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는다”고 했다.
숫자가 줄었을 뿐 원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이 반세기에 걸쳐 쌓아온 불교는 튼실하다. 뼈대는 견고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것이 불교적인 삶입니다.
순간순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스스로 행복하고 밝은 미래가 열리는 법입니다.”
이제는 거의 불교계 유행어가 된 중국 당나라 운문(雲門) 선사의
‘날마다 좋은 날(一日是好日, 일일시호일)’이 겹치는 대목이다.
전통과 원칙이 선사하는 복락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기보다 배운 것을 철저히 익히는 것이 승가교육의 갈 길”이라는
지론이다. 각이 잡힌 공부의 민낯은 정직이다.
“내가 즐거울 때 남들도 즐거운 것이고 진실한 즐거움은 ‘바름’에서 나온다”는 설명은 미덥다.
스스로 부처인 만큼 보다 겸손하고 보다 청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본래부처’는 이념이기에 앞서 윤리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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