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문화와 어울림 ‘돌의 예술 금둔사’
[글 : 한국NGO신문 정진해 문화재 전문기자]
문화재 : 순천 금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945호)
순천 금둔사지 석조불비상(보물 제945호)
소재지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의 금전산 자락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의 금전산 자락에 위치한 금둔사는
우거진 숲속에 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일주문이 좌우로 돌담을 두르고
‘금전산 금둔사’ 현판을 달았다.
다포로 짜인 공포에 맞배지붕을 하고 비바람을 막는 풍판을 달았다.
6계단을 올라 일주문을 들어서니 수목이 울창하게 앞을 막는다.
깊은 계곡에 흐르는 물은 작은 소리를 내고 휘어진 방하교에는 담쟁이가 휘감고 있다.
박석이 깔린 방하교 입구에 서서 긴 숲속 터널 사이에 보이는
대웅전의 현판이 금둔사의 베일을 벗는다.
금둔사는 금전산 서쪽의 계곡을 끼고 자리 잡은 사찰이다.
아래로 보이는 낙안읍성과 그 주변의 크고 작은 논과 밭, 과수원이 한 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확 트인 평야를 안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넓은 들판에 내려앉을듯한 이곳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대웅전이 둘러볼 시간을 가졌다.
정면 5칸에 달린 빗살창문과 화려한 금단청은 우아하면서 무게감을 느낄정도이다.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높은 기단위에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웅전의 규모가
옛 모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곳곳의 숲속에 하나 둘씩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을 둘러보려면
다리품을 팔아야 할 규모이다.
대웅전을 빗겨 삼층석탑과 석조불비상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방하교를 건너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면서 걷다보면 한번 꺾인 돌계단 좌우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담 사이로 뻗는 골목이 보인다. 한사람이 넉넉하게 오를 수 있는 계단의 폭에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놓은 계단을 만들고
그 옆으로 자연석으로 담을 쌓고 평기와와 숫기왓장을 올려 고행의 길을 표현 하였다.
많은 사찰을 다녀 보았지만 이곳만큼 자연석으로 적당하게 활용한 곳이 없는 듯하다.
어디 하나 돌을 이용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금둔사는 돌의 사찰이라 불러도 어울릴 듯한 사찰이다.
계단 담 사이로 비쳐지는 삼층석탑과
경사진 암벽 앞에 세워진 석조불비상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금둔사가 이곳에 창건한 것은 백제 위덕왕 30년(583)에 담해화상이
일본에서 10여명의 승려를 양성시킨 뒤 귀국하여 이곳에 금둔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의상대사가 신문왕 2년(682)에 중창하였고,
825년에 철감국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사 9산선문중 사자산문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 징효대사와 함께 중창하면서 삼층석탑(보물 제945호)과 석불입상(보물 제946호)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층석탑은 동국여지승람에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 석조불비상과 함께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의 전면에는 긴 배례석이 놓여있는데
각 면에는 2개씩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앞에 놓인 석탑은 2중기단 위에 3층 석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에는 하층기단 면석 둘레에는 장대석 8매로 지대석을 만들고
하대중석은 하대석과 한 돌로 조성되었는데 5매로 구성되었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하대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있고 상면에는 원호와 각형의
상대중석받침이 각출되었다. 상대중석은 4매로 짜여 있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고
이들 탱주를 중심으로 좌우 8면에는 8부중상을 양각하였다.
상대갑석은 2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부상, 상부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각출되었다.
탑신부에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매석이며, 1층 몸돌은 우주가 새겨져 있고
전·후면에는 문비와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좌우 면에는 다과를 공양하는 공양상이 양각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우주만 새겨져 있으며
각 층의 지붕돌은 지붕돌받침이 각각 5단씩이며 낙수면 하단은 수평으로 되어 있다.
낙수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네 귀에서 반전이 강하게 나타나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륜부에는 지붕돌 중앙에 노반만 보이고 그 중앙에 찰주공이 보인다.
석탑 우측에 큰 보개와 대좌를 갖춘 석조불비상은 장방형 대형 판석에 양각되어 있다.
신부와 보개석, 대좌석이 분산되어 있던 것을 이곳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머리 위에 놓인 보개는 마치 석탑의 지붕돌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며
하부는 2단의 각형 층급이 있고 후면 쪽으로 홈을 파서 판석을 끼울 수 있도록 하여
불상판석을 끼워놓았다. 전면의 불상은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낮게 솟았고,
이마에 백호공이 깊게 나 있다.
이목구비와 얼굴 형태는 특별히 크거나 작게 표현되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고 목은 짧으면서 삼도가 있으며 두광이 선각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습은 평행단상이나 형식화되어 있다.
하부의 군의는 무릎 부분에서 1단이 겹쳐있고 발끝이 노출되어 있다.
수인은 양손을 가슴위로 들어 가르침의 뜻을 지닌 전법인을 결하고,
판석 뒷면에는 풍화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중앙에는 연화좌에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든 보살상과 코끼리상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 앙련석, 복련석, 방형지대석을 갖추고 있는데 대좌 앙련석은 복원을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세부표현이 정교하고 양감이 풍부한 반면
다소 경직된 인상과 투박한 옷자락 등의 표현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올라왔던 반대쪽으로도 자연석 돌로 촘촘히 쌓아 만든 담과 계단을 따라
다시 계곡의 간이 다리를 건너보니 깊숙한 계곡 위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다.
계곡 옆에 돌로 쌓아 만든 3단의 석탑과 큰 바위 위에 마련된 관음보살상과
일정한 넓이로 쌓아 올린 석벽이 주변의 나무와 바위가 조화롭게 풍광을 만들어 놓았다.
옛 동림선원터 자리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우거져 사람의 발길이 닫지 못하고 있다.
높은 계곡에는 물소리가 사라지고 촉촉이 젖은 바윗돌 사이로 스며드는 물의 잔해가 비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금둔사의 야생 홍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피는 사찰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다시 경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돌담 옆에 자리 잡은 석등 간주석만 남아 무거운
바윗돌 하나를 올렸다. 한 구비를 돌아보면 나타나는 돌담과 그 옆에서 자라고 있는 대나무가
스님들의 수행정진에 도움을 주는 오솔길로 남아 있다.
태고선원 건물 벽에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를 마라”는
당나라 때 백장청규 스님의 말씀이 신선한 느낌을 준다.
“우리 절은 반농반선(半農半禪)합니다. 절에 필요한 일이 있어 오신 분은
손 전화 연락바랍니다. 010-9887-69xx. 이 절 스님들 작업장은 절 가까운 뒷산이나 차밭입니다.”
라고 스님을 찾을 때는 뒷산이나 차밭, 그리고 손 전화를 하라는 글이 신선함을 주고 있다.
이곳 금둔사는 우리의 전통차를 보급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에는 차밭이 있다는 것을 이 안내판에 소개하고 있다.
또한 안내판에는 ‘조주’와 ‘어떤스님’의 대화가 적혀 있는데
“<조주> 이 우주 생기기 전에 이 성품이 있었고 이 우주 멸망한 뒤에는 이 성품은 멸망치 않으리라.
<어떤스님> 어떤 것이 성품입니까?
<조주> 지·수·화·풍과 색·수·상·행·식 이니라.
<어떤스님> 그것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 성품입니까?
<조주> 색·수·상·행·식과 지·수·화·풍이니라. 이것이 마음은 한가하고
몸은 일하는 길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질문과 답변이 적혀 있어 오늘의 큰 수확이 아닌가 한다.
다듬지도 않으면서 하나하나의 돌을 공들여 쌓아 만든 담과 축대, 계단,
그리고 자연석 돌탑이 서로 마주보며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돌담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과 돌담 사이사이에서 돋아난 야생초가 어우러져
사찰의 경내를 자연의 숲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높은 축대 아래 웅크리고 자리 잡은 작은 약사전은 앞에 약수가 넘치고
4줄의 기왓골에 3줄의 기왓등, 높은 용마루로 작은 집을 한 채를 꾸미고
그 속에 약사여래불을 친견하였다. 금둔사 하면 차밭이 먼저 떠오른 곳이다.
차나무를 보기 위해 60불이 새겨진 불조마애여래좌상과 진리와 지혜를 만방에 비추는 것
같다는 깊은 뜻을 간직한 비로자나마애여래좌상 주변 약 2천여 평의 차밭이 펼쳐져 있다.
이곳의 차나무에는 비료나 거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천연 그대로 일 년에 두 차례
차나무 아래 잡초를 베어내 깔아 그것이 거름이 되도록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차는 최고의 차향과 그 효능을 자랑하고 있는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허스님의 차” 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한국자생차 이야기”의 저자인 지허스님이
참선수행과 전통사찰의 순수덖음차법제의 50년의 숨은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차나무는 철감국사와 징효대사에 의하여 심어지고 가꾸어진 차밭이라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수령이 700년쯤 되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약사전 앞에 흘러넘치는 약수 한잔을 마시고 경내의 숲길을 따라 걸었다.
절 입구에 사이좋게 객손을 맞이하고 보내는 호법선신장승과 방생정계장승이 지켜보고 있다.
젊은 스님을 닮은 호법선신장승은 머리엔 관을 쓰고 굵고 검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과
큼직한 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돌돌말린 몇 가닥의 수염과 뭉쳐 내려뜨린
3가닥의 수염이 경내방향으로 휘어져 있으며 오랜만에 오는 객손을 반가이 맞아주며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있다.
노승을 닮은 방생정계장승은 흰 눈썹에 잔잔한 미소가 깔린 다문 이빨과 굵은 수염 3가닥이
경내의 방향으로 휘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젊은 스님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눈초리이다.
오는 길 막지 않고 가는 길 안 말리는 무덤덤한 모습이지만 우리 곁에서 희로애락을
그대로 온 몸으로 표현해 주는 정겨운 우리의 전통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낙안읍성에서 선암사방향으로 나 있는 산길 금둔사 입구에 섰다.
낙안읍성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차곡차곡 쌓은 돌탑 사이로 빠져 나가는
녹색의 향기에 청량한 느낌이 베어나온다.
'■ 전통건축 갤러리 ■ > 전 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천 승주 낙안읍성의 문화재가옥들 (2015. 02.21.) (0) | 2015.11.10 |
---|---|
순천 승주 낙안읍성 -3 (2015. 02.21.) (0) | 2015.11.10 |
구례 사성암 (2015. 10.) (0) | 2015.10.15 |
구례 연곡사 (2015. 08.) (0) | 2015.08.20 |
순천 승주 낙안읍성 -2 (2015. 02.) (0) | 201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