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연곡사(鷰谷寺)
연곡사(鷰谷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위치한 사찰로
지리산 피아골 입구에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여러 승탑이 모셔져 있다.
동 승탑은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연기조사가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불탔고,
그 후 다시 중건하였다.
(이하 글자료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53호
명 칭
구례 연곡사 동 승탑 (求禮 鷰谷寺 東 僧塔)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승탑은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승탑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승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 승탑은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보 제54호
명 칭
구례 연곡사 북 승탑 (求禮 鷰谷寺 北 僧塔)
이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종 목
보물 제154호
명 칭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求禮 鷰谷寺 逍遙大師塔)
이 탑은 연곡사 서쪽에 있으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곡사에는 이외에도 2기의 탑이 더 있는데,
그 탑들에 비해 조형성은 떨어지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탑신에 새겨진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효종 원년(165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008 문화유산 답사기 - 은상_박샘별]
연곡사, 그 역치의 미학_
智異山 燕谷寺’산문에 다다랐다. 시인은 산문에 기대어 누이를 생각했겠지만, 역사학도는 산문을 바라보며 역사의 흐름을 가늠해볼 뿐이다. 수차례 전란으로 스러졌다가 중건된 연곡사. 그 일주문 두 기둥이 ‘지금 여기’, 꼿꼿이 서 있었다. 그 꼿꼿함을 향한 의지로, 주련(柱聯)의 글씨는 힘있고 다부졌다. 歷千劫而不古 천겁이 지나도 예스럽지 않으며/ 亘萬劫以長今 만세를 뻗어가도 지금과 같네. 불교에서의 시간관념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위압적이다. 찰나(刹那)와 겁(劫), 그 무량한 시간을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까. 100년마다 한 번 선녀가 내려와 4km의 바위에 옷깃을 스쳐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1겁이라니, 그 경지를 한갓 범인(凡人)일 뿐인 나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에, 6·25전란에 이르기까지 매번 잿더미가 되며 한국사의 수많은 고비를 함께 넘었던 연곡사. 그러나 불에 스러진 시기는 한갓 찰나에 지나지 않다고, 몇 천겁이 지나도록 이 자리에 우뚝하게 서 있을 것이라고, 일주문의 기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절이 산에 있듯이. 산에 절이 있듯이, 내내 이렇게 서 있을 것이라고. 일주문을 지나 소담한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계단에서 다소 비껴난 뜰에 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생뚱맞은 3중 기단에다, 큼직한 기단에 비해 작은 몸돌은 자못 왜소해 보였다. 지붕돌 모서리부분이 바스라진 것도 그렇고 간간이 거무튀튀한 부분까지 한때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듯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간만에 시골에 찾아가 주름과 외로움이 한결 깊게 패인 할아버지를 바라볼 적 기분이랄까. 애써 쓸쓸함을 외면하며 산길을 올랐다. 길은 다소 가팔랐다. 부처를 만나기 전, 갖추어야 할 최대한의 경외는 가파른 산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불도의 길은 멀고도 멀어 감히 중생의 오만함으로 닿을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길은 냉엄하게 말해 주었다. 가파른 산길임에도 그곳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산행을 마다않았던 이들의 땀과 정성이 참으로 복되게 느껴졌다.
그렇게 거친 숨을 후우- 몰아쉰 끝에, 현각선사 탑비에 다다랐다. 보물 152호로 지정된 이 탑비는, 비신(碑身)이 실종된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었다. 비문(碑文)은 당대 기록인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설령 다소의 과장이 있을지언정 거짓을 기록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높이 산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비신의 실종에도 탑비의 주인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수 가운데 평평한 부분에 희미하게 남은 ‘현각왕사비명(玄覺王師碑銘)’이 그 주인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지우기란 이렇듯 쉽지 않은가보다. 귀부와 이수는 그 빛깔에서 확연히 달랐다. 귀부가 흙빛인 반면, 이수는 회색이다. 안내자께서는 귀부의 석재에 철분성분이 많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셨지만, 난 다른 추측을 내려 보았다. 귀부가 붉은 흙빛인 것은 이 땅의 무게를 고스란히 이고 살아온 까닭이고, 이수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듯 하얗게 빛나는 건 비상(飛上)하고픈 이무기의 염원이 담겨있는 까닭일 것이라고. 건너편 국화꽃 화환이 눈에 띄어서 보니, 한말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져 있었다. 2007년이 그의 순국 100주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역사란 그런 게 아닐까. 삶이 있는가 싶더니 죽음이 있고, 죽음으로 잊어지는가 싶더니 새롭게 기억되는... 아까 보았던 탑이며 비석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대상이 석가모니이든 스님이든, 기억으로 붙들어두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산길을 올랐다. 길 사이엔 밤송이 껍질이 흩어져 있었다. 길이 길로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 길을 먼저 오른 이들과 맞닿아 있음을 밤송이 껍질은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엔 한 노파가 길 위에 떨어진 밤톨들을 담아간 적도 있을 테고, 어느 날엔 장난꾸러기 꼬마가 토끼같은 앞니를 내밀어 알밤을 깨물던 적도 있었겠지. 점점이 놓인 밤송이 껍질을 따라가며 제법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서부도에 도착했다. 보물 제 154호로 지정된 서부도는 8각원당형으로 전체적인 조화가 잘 맞아 굉장히 아름다웠다. 안내판에는 ‘조각방법의 생략화로 무겁고 둔중한 느낌’이라 쓰여 있었지만, 그 부도를 본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솟아오른 귀꽃하며 구슬무늬 장식, 중대석의 앙련·복련까지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도 뒤편의, 울타리도 없이 낙엽에 묻혀가는 작은 석종형부도 두 기와 대조되어 더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그러나 북부도를 보자마자 그 안내판에 ‘심히 동의’하게 되었으니, 북부도의 화려함은 그야말로 ‘극치(極値)’였다.
국보 54호인 연곡사 북부도. 서부도의 귀꽃 장식을 ‘화려’라 생각했던 자신이 무색할 정도였다. 지붕돌은 겹처마 끝의 부연(附椽)은 물론 암·수막새 무늬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하대석의 복련은 연꽃의 결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데다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어 정교함을 더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가릉빈가(극락조)’라는 전설상의 새였다. 머리·상반신은 사람의 모양이고, 하반신 및 날개·꼬리는 새의 모양을 띠는데, 그 날개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경쾌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목이 다 날아가 있었다는 게 좀 아쉽지만 말이다. 안내자께서는 이런 현상이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일종이 아닐까 추측된다며 수많은 마애불들의 코가 닳아진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자식을 향한 염원은 끊이지 않는구나 싶어 전율이 느껴졌다.
이러한 북부도의 아름다움도 동부도만 못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극치(極値)’의 극치였다고 할까. 조각 수법은 북부도와 비슷했지만, 형태의 완벽성이나 세밀함에 있어 동부도는 단연 으뜸이었다. ‘안쏠림’까지 고려해 하나하나 새긴 기둥하며, 한옥기법 그대로 빈틈없이 조각한 지붕돌 및 몸돌, 안상(眼象)의 주악천녀와 주위 배경의 섬세함, 깔끔함이 돋보이는 몰딩 처리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한없이 날렵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와 부드러움이 녹아있어 가볍지 않았다. 오로지 망치와 정 하나로 큰 석재 하나를 떡 주무르듯 다듬어나간 석공의 솜씨에 말을 잃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이를 유홍준은 ‘부도 중의 꽃’이니 ‘꽉 조이는 쫄쫄이 옷을 입은 젊은 미녀를 연상케 하는 탄력’으로 표현했더랬다.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검은 색을 띠는 석재의 빛깔이 그 조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같은 ‘쫄쫄이’라도 ‘검정색 쫄쫄이’인 동부도가 훨씬 돋보일 밖에! 왜 동부도부터 올라가지 않고 서부도부터로 코스를 잡았는지 짐작이 갔다. 답은 ‘역치(?値)’였다. 극한의 아름다움을 먼저 맛보고 나면, 다른 아름다움은 눈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 순서로 부도를 본 건 행운이었다. 깔밋한 서부도의 아름다움부터, 동부도의 세밀한 아름다움까지, 각각의 문화재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감흥을 얻을 수 있었으니. 동부도 앞 비석도 아까 본 현각선사 탑비처럼 비신이 없이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었다. 비슷한 듯 다른 듯 그저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안내자께선 “솔직히 무덤 주인조차 알지 못하는 곳에 와 ‘이 무덤 이쁘네’ 하는 건 좀 볼썽사납지요.”라 하셨다. 자료집에도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무덤 속 인물이나, 그 인물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찬미(讚美)’로 그칠 뿐인 유홍준을 질타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해 문화재가 본연의 의미로 읽히지 못하고 변질될 수 있다. 그도 아마 이 점을 우려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눈도 때로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역사적’이라는 잣대아래, 잘려나가지는 여백이 얼마나 많은가. 논증된 사실만으로 가득한 역사는 너무도 숨막히다. 기본적으로 역사가 사람의 삶, 그 삶의 궤적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본능을 도외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돌아오던 길, 답사에서의 느낌표들을 되짚어보았다. 하루를 무료한 휴식으로 채우는 대신 답사길에서의 느낌표들로 채울 수 있었다는 것에 너무도 감사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버스 안에서 단잠은 유난히도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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