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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충 북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2014. 11.)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

 

 

종 목

보물 제17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6번지

 

시 대

고려시대

 

 

정토사터에 전하고 있던 비(),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토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태조 24(941)에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비는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비받침에 새겨진 거북조각이나

머릿돌의 용조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앞면의 중앙에는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비의 몸돌에는 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879)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교의 법을 배워 20세에 불가에 입문하였다.

90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정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고려 태조 24(941)63세로 입적하자

태조는 시호를 법경’, 탑이름을 자등이라 내렸다.

 

태조 26(943)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고,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가 지었으며,

유명한 서예가였던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인근 지역에 이전하여 보존 관리되고 있다.

(글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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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문화재청)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 제17)

 

 

 

충주댐 수몰지역내 정토사지에 있던 비를 1983년 발굴조사를 실시한후 현위치(충주시 동량면 하천리)로 옮겼다.

고려 태조 26(943)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위해 세운비(높이 3.15m,1.45m)이다.

법경대사(참고1)는 신라말­고려초 고승으로 정토사를 창건 포교에 힘썼고 고려 태조 7(924)에 국사로 추대되었다.

태조 24(941) 63세로 돌아가시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이라는 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자등이라 내렸으며

공덕을 칭송하기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 구족달이 썼다.

 이 비문에는 忠州中州(참고2) 로 표기하고 있어 탑평리 7층 석탑을 중앙탑이라고 부르는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지역이 한반도 중심 지역을 나타낸다.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퍼지는 빛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물고있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영혼이 천상의 세계로

인도됨을 의미하는 두 마리 용을 조각한 이수등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머릿돌 앞면의 중앙에는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비의 몸돌에는 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법경대사 자등탑은 일제 강점기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주변의 정토사지는 수몰 지역내의 문화유적으로 1983년도 여름에 발굴하여 당시의 사찰규모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그 주초가 원형대로 현위치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절터에서 명문이 있는 기와와 연화문 및 귀면와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참고1> 법경대사

 

헌강왕 5(879)에 태어났으며 성은 이씨이다.17세때에 삭발하고, 가야산에 입산수도 하였으며

효공왕 10(906)에 당나라로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효공왕 16(912)에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와서

포교에 힘썼다. 법경대사가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태조 24(941)에 입적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참고2>

 

상사불정근 심구친근 잉우중주정토난야 청이주지(上事佛精勤深求親近仍于中州淨土蘭若請以住持)’라는

구절이 보인다. 옮기면 임금의 불심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토록 청했다는 것이다.

(글 출처 : 한문화재 한지킴이 이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