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맨 먼저 민중의병을 일으켜 왜구을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곽재우 의병장은 본관은 현풍이고 자는 계소로 호가 망우당이며 시호는 충익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으로 2005년 복원하였다.
(글 자료 : 위키백과)
의병장 곽재우
의령·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월(越)이며, 조식(趙植)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
(折衝將軍兼助防將)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石門)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전후활동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喪中)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守城軍)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察理使)·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忠賢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글출처 : DAUM 백과사전)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마을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의령군은 의병정신을 고취시키고 외부 관광객유치를 위해 시행하고 있는 곽재우장군
생가주변 관광자원화사업을 금년 말 완공 할 예정이다.
이 사업은 전체 예산 23억원을 들여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장군 생가 내
19,470㎡의 면적에 잔디광장, 생태연못, 주차장, 화장실, 기타 부대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사업 기간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이다.
지난 2008년부터 토지보상을 시작으로 2011년도 특별교부세 7억원을 지원받아 부지정비와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금년엔 국비 8억원을 포함한 사업비 16억원을 확보하여 공원 내 잔디광장, 성벽, 산책로,
생태연못 등을 조성하고 있는데 현재 60%의 공정률을 보이며 사업이 원활히 추진되고 있다.
(글출처 : 서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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