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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남 . 부 산

의령 입산 문화역사마을 (2014. 10.)

 

 

 

 

 

 

 

 

 

 

 

 

 

 

역사와 전통문화 자원이 풍부한 입산마을은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는  유곡천이 흐르고,

뒤쪽에는 장백산으로 둘러쌓인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전통마을이다.

 

입산마을에 가면, 호국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농촌다움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역사마을가꾸기사업에 선정되어,

입산마을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성껏 가꾸어 가고 있다.

 

입산마을은 탐진 안씨가 1,600년 초에 한 고승의 예언을 쫓아 길지로 알려진 입산으로

이주하여 10대로 종가 천석지기 부자 집으로 대를 이어온 탐진안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연육세 8효자 정려를 받은 효행의 가문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공신이자

중시조이신 지헌 안기종 의장 이후 근세 조선말부터 해방 이전에는 독립유공자 세분을 비롯하여

제헌의원 등을 배출 하였고 초대 문교부장관도 나신 교목세가이자 유서 깊은 마을로

전통 한옥이 즐비한 부촌이자 명문 고촌이고 또한 개화의 물결이 가장 먼저 들어온 개명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문화예술과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정신문화의 고장으로,

항일 애국지사이신 백산 안희제 생가, 항일독립 정신의 배양소였던 사립 창남학교,

지역의 인재들을 배출한 고산재가 있으며 경남 문화재가 5곳이나 지정 되었을 정도로

역사적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또한, 폐교를 리모델링한 입산문화역사관에 가보면 입산마을에 대한 전시관도 있고,

현대식 시설로 된 체험관, 체육시설, 숙박시설과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의령 입산(立山)마을

 

 

지명유래

입산(立山)마을의 원래 한자 지명은 설산(雪山, 설뫼)인데 쉬운 토박이말로는 설미라고 불렀고 큰 도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있는 마을이 경산(景山, 볕뫼)인데 역시 쉽게 부르면서 별미라고 해 왔다. 두 마을은 안씨와 이씨,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이름을 두고 어느쪽이 좋다거니 하면서 갈등을 빚어 왔다. 설미는 눈 온뒤의 산이 아무리 보기좋다해도 햇볕이 나면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니 경산이 좋은 이름이라는등 부질없는 실랑이를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설뫼마을 사람들이 눈()대신 꼿꼿이 서다()라는 글자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특징

450년전(명종9) 임란직전(1,550년경) 터를 잡고 세거(世居)한 탐진(耽津)안씨 집성촌으로 연육세(連六世) 8효자(八孝子) 정려를 받은 효행의 가문으로 시작하여 임란공신이자 중시조이신 지헌(止軒) 안기종 의장 이후 근세(近世) 조선말부터 해방이전에는 독립유공자 세분을 비롯하여 제헌의원 등을 배출하였고 초대 문교부장관도 나신 교목세가(喬木世家)이자 유서깊은 마을로 전통 한옥이 즐비한 부촌이자 명문 고촌이었고 또한 개화의 물결이 가장 먼저 들어온 개명마을이라고 알려져있다.

 

마을형성과정

입산마을에는 최초에 청도김()씨가 살았다고 하나 약 600년전 관향조(貫鄕祖)이신 탐진안씨 시조가 개성 장단에 사시다가 이성계 역성혁명(易性革命)때 창녕 영산으로 피난 하였으며, 다시 서울에서 3대로 관직에 봉직타가 1,500년초에 경산 안골(內谷)로 이주하셨고 1,600년초에 한 고승의 예언에 쫓아 길지로 알려진 입산으로 이주하여 10대로 종가(宗家) 천석지기 부자집안으로 대를 이어온 마을이다.

 

유물유적

(1)효행정려(孝行旌閭)

파조 헌납공이하 연68자손 모두의 정려와 대를 건너 효자, 열부 도합 10분의 효행정려각으로 재호를 초기 7효 정려였기에 칠효각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팔효각(八孝閣)이다.

(2)이충각(移忠閣)

임란당시 곽망우당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18장중의 한분으로 충익사에 봉안되신 지헌(止軒)안기종(安起宗) 의병장의 유허비각 이다.

(3)건국유공자유적비(建國有功者遺跡卑)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받으신 수파 안효제 송은 안창제, 백산 안희제(예정) 선생의 공적비 건립등 앞으로 계속 충과 효행비를 건립할 곳이라 탐진안씨 문중 효충원(孝忠園) 이라 부르고 있다.

(4)상로제(霜露齊)

탐진 관향조의 파조 헌납공 재각으로 백산선생께서 1910년 사립 창남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던 유서깊은 곳이다.

(5)고산서당(高山書堂)

영남의 구학 본산으로 270여년전에 설립한 곳이며 접장 유치명(柳致明), 이진상(李盡相) 공이 강학하였던 곳으로 수파 송은, 백산선생등 안씨 문중 자제들과 부근사람들이 수학하던 곳이다.

(6)지헌고택(止軒古宅)

입산마을 입향조이신 지헌공의 고택으로 10대를 이어 천석을 하신 20대 대종가 집이다.

(7)백산생가(白山生家)

지방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백산 안희제 생가이며 별도 인터넷 홈페이지에 관리 되고 있음.

(8)수파정(守波亭)

1883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및 흥해 군수를 역임후 독립유공 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신 수파 안효제 추모 정사이다.

(9)송은정(松隱亭)

1883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사과를 하신후 만주 망명지에서 독립유공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으신 송은 안창제 추모 정사이다.

(10)안호상박사 생가(한뫼생가)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셨고 국내 철학박사 1호로서 사후 의령출신으로 최초의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 하신분의 생장지다.

(11)의암생가(宜庵生家)

설산공의 아들이신 의암 안덕문의 생가로 의암문집 31질의 제본 목판 150 여장이 전해지고 있다.

(12)근산생가(槿山生家)

의령출신 재헌국회의원이시며 안호상박사의 사촌이신 안준상(安駿相) 전의원이 생장하신 생가이다.

(13)만세공원(萬歲公園)

마을입구 버스길에서 마을로 가는 중간 논들가운데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이 기미년 만세를 불렀던 자리라 그 뜻을 기념 하기 위하여 세운 나무인데 수령 80년을 헤아리고 있으며 지형은 농로 개설과 경지 정리로 들 복판이 되어 버렸음.

   

특산물 : 양파

 

풍수지리

부림면 소재지에서 약 4km쯤 남쪽으로 떨어져 있고 유곡천이 경산, 구산, 난 등의 사이를 두고 서남쪽에서 동북간으로 흐르는 역수(역류)의 특이한 지역으로 대충신 아니면 역적이 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을 뒷받침하듯 역사상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애국지사 안효제, 안창제, 안희제선생등 세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를 비롯하여 제헌의원 안준상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가 나신 곳으로 1,700년초에는 설산제(雪山齊)라는 고산서당(高山書堂)을 지어 많은 석학과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백산 안희제선생의 주선으로 1910년 사립 창남학교(創南學校)를 지금의 상로제(霜露齊)에 세워 경남에서 최초의 신학문 사립학교를 운영하기도 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입산마을 뒷산을 북쪽으로 좌청룡, 남쪽으로 우백호로 칭하며 좌청룡 끝부분 바위에 설산동문(雪山洞門)이라는 음각된 암각문 표식이 있으며, 우백호 끝부분 바위에 범눈깔(범눈알) 바위가 있어 우백호라 하였으며, 동리 앞 마주보는 산이 기러기산으로 기러기 목 끝부분에 꾀꼬리 바위가 있어 경치를 더해주며 역류(역수)하는 유곡천의 하류부근에 장풍수구의 비보(裨補) 차원의 숲은 경지정리와 도로개설 등으로 없어졌다.

(글자료 : 입산초등학교 총동창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