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잃어버린 주소
오래전의 일인데, 외국유학을 갓 다녀온 한 조각가의 푸념을 듣게 되었다. 청계천 철물상에 가서 직각으로 된 자를 만들어 달랬더니 어느 한 곳도 90도 정각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슬며시 외국과 비교하며 직각도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장인정신 부재를 트집했다.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가구들을 보면 자로 잰 듯한 정확함이 없는 게 사실이다. 어딘가 틀어지고 어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상태를 두고 한국인이 가진 해학이며 미학이라고 학술적으로 논문을 쓰며 해석까지 해왔다. 건축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옛 건축에서 궁궐이나 사찰의 주된 건물을 얼핏 보면 좌우대칭의 당당한 입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측으로 따지면 실제는 정확한 대칭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일본의 건축이나 엄정한 비례를 자랑하는 서양에 비해 한국 전통건축의 수준이 낮다고 말할 것인가?
안동 하회마을 남쪽 병풍처럼 펼친 산과 마주한 병산서원은 서양의 건축가들도 찬탄을 금치 못하는 보물 같은 건축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네 채의 건물이 둘러싸는 형식인데, 전면의 누각 만대루를 통해 들어오는 병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이를 뒷산과 이어지게 하는 공간연결의 수법은, 건축 문외한에게도 탄성을 부르게 한다. 사실 병산서원 건물 자체는 특별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만대루는 비정상으로 길어 보여서 비례감이 오히려 좋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는 건물들로 형성된 공간이 충분히 아름다워 모두들 넋 잃고 그 공간이 만든 풍경을 음미하고 만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실체를 가르칠 필요가 있는 건축학 선생들에게는, 공간이 갖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보기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어느 건축역사학자가 이를 분석하며 설명했다. “이 건축공간을 보면 직각이 없습니다. 건물을 의도적으로 슬쩍 틀어서 미묘한 사선을 만들어 시선을 확장시키고, 뒤편의 공간으로 연장시킵니다.” 실제로 병산서원은 건물의 배치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근데, 이 건축을 만든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 교묘했을까? 직각으로 엄정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는데도, 우연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고난도의 묘기를 부릴 만큼 작위적이었을까…. 나는 여기까지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예컨대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를 보시라. 모든 전각을 공간구조적으로 상세하게 그린 이 스펙터클한 그림에 나오는 공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직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창덕궁의 실제 공간은 그렇지 않다. 구릉이 많은 땅이라 전각들은 언덕을 피하고 물길을 지르면서 지형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양 사람들 같으면, 언덕도 깎고 계곡도 메우고 물길도 펴서 목적하는 직선과 직각을 얻으려 할 게다. 그러나 자연은 거스를 대상이 아니라 경외하고 수용하며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므로, 사선으로 꺾기도 하고 둔각도 만들며 결국 대단히 자연과 일체화된 구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건축은 직각으로 인식되었으니, 우리에게 직각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91도나 89도도 직각이어서 직각이 무수하다.
창덕궁만이 아니다. 지금에도 전해오는 옛집들을 그린 평면도들을 보면 죄다 직각의 그림이지만, 그 평면도로 지어지는 집들은 자연과 만나면서 땅의 논리를 따라 순종하며 적절히 변형됐다. 그게 우리 옛집들의 실체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이나 희롱하려 드는 모자람도 결코 없으니 시시때때로 경우에 따라 자연을 수동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대한 여유인 까닭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옛 건축은 건축물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주어진 조건과의 관계, 주변과 자연 속에서 그 관계를 알아야 그 건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즉 그런 건축이 모인 우리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의 조직이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기본적으로 우리 땅의 대부분은 산지여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에게 평평한 땅은 벼농사를 위해 내놓아야 하니 삶터는 산 밑의 양지바른 구릉에 만들 수밖에 없다. 평지에 도시를 만들어온 서양과는 도시 형성의 근본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머리에서 구상된 기하학적 도형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평지의 도형인 까닭에 우선 면을 분할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직선을 그어 길로 삼는다. 모이는 공간도 있어야 하니 면을 만들어 광장이라 하고 이 선과 면을 서양 도시의 가장 핵심적인 구조로 삼았다.
그러나 구릉이 많은 우리의 땅에서는 직선의 길을 만들기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노새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가장 완만한 곳을 확보하면, 주거지의 영역들이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는다. 그 개인의 영역들 사이에 적당히 비워진 곳이 길이 되었다. 그러니 그 길은 직선일 수 없으며 폭이 일정하지도 않아 넓어진 곳은 우물터나 놀이터, 시장 같은 동네의 중요한 공공영역이 된다. 그래서 동(洞)이라는 조직은 본래 같은 물을 쓴다는 뜻이니 우물이나 개천을 공유하며 생긴 기초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위였다. 이는 우리의 마을 조직은 공간에 기초한 것이라는 뜻이며, 직선의 길에 배열되어 숫자로 분류되는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향마을의 기억은 늘 풍경이며 공간이지 숫자로 된 주소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 땅의 지명들도 가만히 보면 죄다 그 장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이름 아닌가?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종로며 동숭동이며 인근의 삼선동이며 원남동, 연지동…. 모두가 그 이름만으로도 동네의 성격을 알 수 있어 정체성이 분명하니 찾기도 쉬웠다. 사람 이름 갖다 붙인 서구의 도로와는 품위부터 다르다.
근데 최근 들어 정부에서 전국의 주소명을 길 중심으로 바꾸었다. 서양 도시를 흉내 낸 신도시에는 효율적일 수 있다 쳐도, 골목 많은 오래된 동네에서는 그 공간형식과 새로운 주소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 강제된 주소니 민초들이야 어쩔 수 없이 노력하여 익숙해지겠지만, 명심하시라. 새 주소가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을 망각시키며 동네를 잃게 하여 결국 땅과 밀착된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두려운 나는 아직도 옛 주소를 쓴다.
출처 -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동네를 잃어버린 주소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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