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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전 남

해남 대흥사 일지암 (2016. 08.)
























南道 정자기행(519) - 초의의 일지암(一枝庵)


                                                    ( 이하 글출처 : 한국매일. 김은희 )



해남 대흥사,

그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차 이야기를 꺼내면 생각나는 

 우리 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다도(茶道)의 정립자

초의 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一枝庵)이 나온다.

 

초의 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순조24)에 중건해

여생을 마감한 1866(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그는 초당을 짓고 감회의 시를 남긴다.

 

 

연하(煙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영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을 비치게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룐(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수도하기 위해서 지은 암자로,

 ‘초의(艸衣)’일지(一枝)’,

초의 생존시 소요(逍遙)와 선취(仙趣)를 꾀했던 자득(自得)의 터전으로

매우 고졸(古拙)하고 원대한 조망과 탈속(脫俗)의 미학을 갖춘 다정(茶庭)이었다.

 

그러나 초의 스님이 열반에 들자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초의선사가 지은 암자라 해서 '초암터'라 불리웠다.

수 십 년 전부터 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호가 높아지면서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의 유적지를 찾게 되면서 40여년 전에 응송 스님과 낭월 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1979년 일지암이 중건되었으나 맛은 떨어진다.

그리고 현판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한국 서예의 거목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이 썼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물이나오고 양지바른 곳이라서 이곳에는 산돼지나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숯꾼이나 초군들이 짐승 덫을 설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 던 다산과 가깝게 지냈던 혜장에 의해 만난 두사람은

속세의 나이를 뛰어넘어 깊게 사귀게 된다.

이 때(1809) 다산은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어 있었으며

초의는 24살의 활기 왕성항 청년이었다.

 

혜장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였던 다산은

초의에게서 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초의는 다산에게서 주역과 시문을 배웠다.

<동다기><다신전>을 지어 후인 들에게서 조선 차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는

유학자인 다산과 속세와 산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교분을 쌓는데

이 인연은 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과 학유에게까지 이어진다.





























 

일지암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 돌부),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이 초정(草亭)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여기서 일지암의 일지(一枝)

한산(寒山)의 시 마지막 구절에 '한가지만 있어도 몸 편하다네 安身在一支'에서

따온 말이다 했다.


윗 연못에서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등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 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의선사는 서기 1786(정조10) 45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속성은 인동 장씨(張氏)이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이다.

초의는 그의 법호이며 그 밖에 해옹, 해노사, 자우산방, 휴암병선,

자하도인, 우사, 해상야질인, 일지암이라고 불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돌 평상을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 선사는 대둔사의 13대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 동다송이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대둔사) 가까이는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茶人)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특히 동갑내기 초의와 추사는

, 불교, 시로 지극한 경지를 나눴던 유불을 넘나들며 란지교를 맺었다.

 

추사 김정희는

 고요히 앉아 있는 곳에서는 차 반쯤 우려냈을 때의 첫 향기 같고 

오묘하게 움직일때는 물 흐르고 꽃피듯하다(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초의선사를 평했다.

 

초의와 추사와 교유는 각별하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는데

두 사람은 동갑나기로서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주는 남다른 사이였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둔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대흥사(대둔사) 일지암은

우리 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8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 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