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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에세이

수백당기 (守白堂記) - 1 (터잡기)

 

 

 

 

수백당기 (守白堂記) - 1(터잡기)

- 수백당 집 짓는 이야기 -

 

 

 

수백당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에 신축할 단독주택이다.

창원의 39사단 군부대가 군북면 소포리로 이전하면서

철거민들을 위해 부대 근처에 새로이 조성한 ‘이주자 주거단지’의 50여 필지 중에서

중간쯤에 자리를 잡게 된다.

 

창원 39사단의 이전부지로 군북면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혼란과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었다. 군북 면민들의 여론분열 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와 친구지간에도 이해관계가 달라서 갈등과 다툼이 있었고

그리고 부대 건설공사가 한창인 지금도 아직 그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부분도 있다.

 

군북은 내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다녔고 부모님도 생존해계신 영원한 고향이다.

올해 초부터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푸른 산이 잘려나가고 길이 사라지고

이미 냇가도 메워져버렸으니 이제 와서 재론해봐야 ‘죽은 아들 고추 만기기’일 뿐이겠지만

개발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의 현 세태가 결국은 원주민들의 삶과 영혼까지 망가트렸던

서울 근처 신도시들의 교훈’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현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아울러, ‘개발과 보존’이라는 갈등 속에서

경제기반이 취약한 농촌지역의 한계와 어려움 때문에 개발이라는 당근을 선택했지만

군부대 유치로 지역사회 개발논쟁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 후유증을 잘 치유하고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향’을 만들기 위한 협조와 노력은 

지금부터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런 연유로 나는 평소에 가급적이면 소포리의 39사 현장 앞으로는 피해서

고속도로 쪽으로 돌아 다녔는데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인 친구가 ‘이주자 주거단지’에

집을 짓게 되면서 내가 주택설계를 맡게 되다보니 심정이 좀 복잡했다.

친구도 나처럼 ‘정든 동네와 삶의 역사와 흔적’이 깡그리 지워지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지만

연로한 부모님께 새 집을 지어드리게 된 것으로나마 위로로 삼는 듯했다.

 

 

 

 

동측 전경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있는 길이 함안-군북간 국도이고 그 너머로 군부대가 들어설 것이다

 

 

서측 전경

석교천 너머 야트막한 당산이 보인다

 

 

 

 

‘이주자 주거단지’이자 수백당이 들어 설 부지는 군북-함안간 국도변에 접해있고

군북면의 관문인 공설운동장과 최근 신축한 임대 아파트에 바로 인접해있다.

부지 앞쪽으로는 군부대가 들어설 것이고 뒤쪽으로는 군북의 진산 백이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석교천이 흐른다.

새로 조성된 택지는 원래 군북면의 옥토, 장지벌판의 끝자락으로 경지정리가 아주 잘 된 

벼를 심던 탁 트인 농토였다. 

그래서 뒷산이나 주변에 기댈 언덕이 없어서 겨울 찬바람을 막아주지도 못 하고

사라진 마을과 같은 정감과 아늑한 분위기도 없지만

도심에서 가깝고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비교적 주거지로서의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소형 주택단지이다.

 

 

 

 

 

남측 전경

멀리보이는 아파트가 이번에 신축한 이주자용 임대아파트이다

고층의 신축 임대아파트가 남측 끝에 자리 잡음으로 해서 군북의 진산 백이산 방향의 전망을 가려버렸다

북측 끝으로 앉혀졌다면 겨울 북서풍도 막아주고 상생할 여지가 많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북서측 전경

서측으로 석교천이 한가로이 흐른다

 

 

 

 

 

수백당은 이번에 신축하는 친구 집의 당호(堂號)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듯이 ‘집의 이름’을 짓는 일은 경사스러운 일이고

상당히 의미가 있는 행사이다.

당호는 건축주가 추구하는 높은 이상이나 자신의 철학과 인생관을 한단어로 압축해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는 좋은 의식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 될 수도 있다.

 

건축주는 평생을 함안군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이 갖추어야 할 최대의 덕목은 공명정대와 청렴결백(白)일 것이다.

건축주는 친구로서나 공무원으로서나 그 덕목들을 실천하려 평생 애쓰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건축주에게 잘 어울리는 ‘수백당(守白堂)’과 ‘낙선재(樂善齋)를 당호로

추천하게 되었고 건축주는 수백당을 선택하여 마침내 신축할 집의 이름이 지어졌다.

수백당의 어원은 대구시에 있는 유서 깊은 한옥의 당호이고, 건축가 승효상 씨는

경기도 남양주에 ‘비움의 집’ - 수백당을 설계하여 건축계에 큰 화두를 던진 적이 있는

뼈대가 있는 이름이다.

 

 

 

건축주는 온화한 기질과 보수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인지 수백당을 단순한 경사지붕 모양의 일반적인  틔지않는 형태로 디자인 할 것과

아울러 가능하면 집을 한옥으로 짓기를 원했다.

나도 우리 전통한옥의 매니아로서 시간이 날 때마다 답사를 다니며

그 매력에 흠뻑 젖어 있지만 문제는 건축비와 장인정신이다.

전통적인 양식으로 제대로 한옥을 지을 경우 평당건축비가 1000만원이 넘는다.

일반주택 건축비의 약 3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절충형으로 평당 600만원 내외의

개량한옥이 나왔지만 개량한옥은 ‘무늬만 한옥’이 될 우려가 높다.

그리고 우리 전통한옥의 진정한 멋은 목조건물 자체보다는

그윽하고 깊이 있는 마당공간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기에

30평의 한옥 한 동으로는 그 정취를 살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나는 건축주에게 현대주택과 한옥의 접목을 제안하였다.

사랑채 개념의 사랑방 하나를 한옥으로 짓고 현대주택인 본채와 연결을 시도하였다.

자칫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 나올 위험 부담도 있지만 검토를 거듭해볼수록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시도이고, 다양한 시뮬레이션 끝에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모색해 보자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이 생겨서 건축주에게 밀어 붙였다.

건축주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설계자인 친구를 믿고 수용해주었다.

‘좋은 건축주가 좋은 건축을 만든다’는

후배 건축사의 말이 새삼 떠오르는 한 대목이었다.

 

 

 

 

 

 

 

 

 

 

 

 

 

30평, 1층으로 지어 질 수백당의 컨셉은 두 세대가 동거할 수 있는 집이다.

요즘은 부모와 자식 두 세대가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을뿐더러 점점 1인 세대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세태의 흐름이겠지만 집의 구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러 사람이 한 집에서 같이 살 경우에는 그게 가족일지라도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백당의 기본배치는 ‘ㄴ'자형의 평면구조이다.

남향의 날개채에 부모님이 살고 동향의 날개채에는 자식 내외가 거주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주거영역이 구분되어 있다.

남향의 날개채에는 노부모님을 배려하여 계단대신 경사로를 설치하고 바닥에 모든 턱을 없애고

문도 사용이 편리한 매입형 미닫이문으로 설계하였다.

 

날개채가 서로 만나는 중간지점에는 식당을 배치하여 가족 공용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하였고 침실과 개인 휴식공간은 반대방향으로 축을 달리하여

두 세대가 함께 살더라도 사생활이 최대한 확보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친구들을 좋아하는 건축주의 취향을 고려해서 안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별채 개념의 사랑방도 배려되어 있다.

물론 작은방을 위한 비밀정원도 히든카드로 숨겨 놓았다.

 

 

 

 

 

 

 

 

 

 

 

 

'현대주택과 한옥의 소통'을 시도한 초기의 계획안이 큰 수정없이

기본 정신을 유지한채 한 달여 만에 실시설계가 완료되었다.

건축주가 설계자의 역활을 존중하고 신뢰해 준 결과이다. 그리고 내풍(아내와 부모님)과

외풍(주변사람들)을 확실하게 차단해 준 건축주의 능력과 공도 아주 크다.

주변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검토해야 함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배가 산으로 가게 되고 결국은 풍파에 지친 선장도 '어디로 가든 육지에만 가자'는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선주(건축주)는 정확하게 목적지만 제시하고

항로의 선택은 선장(설계자)에게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와 역활분담이 필요하다. 

더불어 선원(시공자)들의 협조와 노력이 있어야만

배는 모두가 원했던 신세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선주를 만났으니

어떤 악천후에서라도 안전항해를 책임져야 한다.

더군다나 새로운 항로까지 제안했으니, 내가 내집 짓듯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9월 중순, 추석 때부터 건축주의 전폭적인 이해와 지지로 순조롭게 설계가 진행된

수백당은 10월 중순에 실시설계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10월 28일 함안군청으로부터

신축허가까지 완료하였다.

 

 

수백당의 청사진이 모두 나왔고 행정절차까지 마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설계대로 집을 짓는 일이다.

그런데, 수백당을 설계하는 길지 않은 기간동안, 친구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하나있다.

 

"집 하나 지으면 10년 늙는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집 짓는 과정의 복잡성과 전문성, 경제적 부담 등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속뜻이지 싶다.

주변사람들의 아주 무책임한 참견과 훈수 그리고 용역과 공사의 댓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과욕과 잡음이 돈보다 더 건축주를 늙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다.

'친구집 짓듯이' 마음을 약간만 비우면 성공적으로 항해를 마칠 수 있다!

'역지사지(易之思之)' - 공사판에서도 통하는 아주 좋은 말이다.

 

 

 

어느새 가을이 다 끝나가고 있다.

이제, 좋은 날을 잡아 기공식을 하고 축제의 첫 삽을 뜰 날만 남았다!

 

 

 

 

                                                                              2013. 11.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