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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영화 이야기

영화이야기 -010. < 서울의 봄 > -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한다

 

 

(이하 사진출처 : 다음영화)

 

 

 

 

 

 

 

010.   < 서울의 봄 > -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한다

 

 

지금 연말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

지난 1112일 극장에서 개봉했는데,

나는 124일에야 CGV에서 관람했다.

 

평소에 좋은 영화들이 나오면

꼭 개봉일을 놓치지 않고 극장을 찾았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고,

거기다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오점이자 비극이기에

영화를 통하여 다시 한번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평소에 철부지 내지는 개인주의자로 무시했던 MZ세대들이

듣도 보도 못한 '심박수 인증' 챌린지 등으로 대거 극장으로 몰리면서,

‘12·12군사반란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사회적 관심이 점점 확산되고

다시금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 시절에 <서울의 봄>을 직접 겪었던 기성세대는 대다수가 침묵했지만,

그 시대를 경험해보지도 않았던 MZ세대들은

뜨거운 관심과 분노를 솔직하게 표출하고 공유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MZ세대의 나이를 초월한 성숙된 시민의식과 정의감을 보면서

나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옹졸함을 후회하며 뒤늦게나마

극장을 찾게 되었다.

 

 

 

 

 

 

 

<서울의 봄>이라는 의미는,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민주화운동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일컬었던 것에서 유래하게 된 용어로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오랜 독재시절 끝에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게 분출되었던 19791026일부터 1980517일 사이의

민주화의  기대에 벅찼던 기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 시기는 1026,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로 18년의 독재시대가 종식되면서,

다음 해 봄부터 대학가의 시위와 민주화의 봄바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만

517일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 5·18민주화 운동에 군인을 투입해 총칼로 진압하면서

비극적인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영화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이 지난 2016<아수라>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으로

19791212일 서울에서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소장은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군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의 진압군과의

일촉즉발의 대립 구도가 일어났던 1212일 밤 9시간.

그 날의 격동의 현대사가 스크린에 비장하게 펼쳐진다.

 

 

 

 

 

 

 

‘12·12군사반란을 주제로 하는 극영화는

MBC TV2005년 드라마 5공화국이 있었지만,

극장 상영용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서울의 봄>

한국 영화 사상 처음이다.

 

사건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금기시 되던 폭압적인 시절도 있었고

쿠데타 관련자와 추종자들이 아직도 대다수 생존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영화로 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제작사와 감독의 대단한 용기와 소명의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평론가 들로부터 작품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흠 잡을 곳이 없다

찬사를 받았다는 평가에도 축하드리고 싶다.

김성수 감독도 그 쉽지 않았던 연출과정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 김성수 감독에게 12.12 군사반란은

오랜 기간 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이야기였다.

19791212일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납치됐을 때 직접 총소리를 들은 이후로

김성수 감독은 12.12 군사반란에 줄곧 관심을 뒀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12.12 군사반란을 쫓던 김성수 감독에게

운명과 같이 <서울의 봄> 시나리오가 주어졌지만,

처음엔 거절했다고 한다.

김성수 감독은 제가 처음 받았던 시나리오는

역사적 정황이 잘 묘사된 시나리오였다.

이걸 열심히 찍으면 신군부 세력의 승리 기록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또 하나의 멋지고 근사한 악당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손을 놨다고 했다.

 

그럼에도 김성수 감독이 서울의 봄연출을 맡은 이유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성수 감독은 그 당시 신군부 세력들에게 끝까지 맞섰던 사람들을

부각해서 만들면 신군부 세력의 승리의 기록이 아닌

들이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성수 감독은 관객들에게

신군부 세력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닌

탐욕으로 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역사에서 벌어진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대단한 지혜와 역량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느끼는 순간적인 욕망과 영달 때문에

즉흥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티브이데일리 2023. 11. 17. 인터뷰 내용 중에서 발췌) -

 

 

 

 

 

 

 

<서울의 봄>에는

70 명 정도의 역사적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주연으로는 김성수 감독의 영원한 페르소나 정우성과

말이 필요 없는 배우 황정민이 맡았다.

대머리 분장까지 마다하지 않은 황정민의 열정과

경남 마산 출신의 황정민이 구사하는 완벽한 갱상도 사투리를 비롯하여

전두광에 대한 완벽한 재현은 영화의 중심을 탄탄하게 세우면서

관객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김성수 감독이 실제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각색을 거쳐 재조명한

이태신 장군역은 정우성이 열연했다.

혈혈단신으로 반란군과 맞서야만 했었던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김성수 감독은 군인의  본분사명, 지휘관의 자질과 책임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 등, ‘참군인의 표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2.12쿠데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직전에 일어났던 10·26사태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이미 10·26 사태를 스크린에 올렸던 수준 높은 영화로는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감독, 2005)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감독, 2019),> 두 편이 있다.

 

이 두 편의 전작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정과

그날 밤 궁정동 안가 파티에서 대통령을 향한 총성이 울리기까지의

유신정권 말기의 극심하게 혼란했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10·26 사태의 원인도 나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은 그 날 이후 기회를 잡은

탐욕스런 일부 군인들이 군사반란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던

12·12쿠데타까지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12·12쿠데타 주동자들의 단체 기념사진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쿠데타에 성공한 주역들이 이틀 뒤에 보안사령부에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관 곳곳에서 관객들의 허탈한 한숨과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그 이후 오랜 기간동안 승승장구하였다.

 

대통령, 장관, 군 수뇌부, 국회의원 등 요직을 독점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일부가 사법적인 단죄를 받았지만 곧 바로 사면되고 말았다.

 

반면에, 쿠데타 반란군을 진압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진압군은 엄청난 희생과 댓가를 치러야만 했었다.

장태완(이태신) 수경사령관은 부모와 아들을 잃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었고,

정병주(공수혁) 특전사령관은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오진호) 소령은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홀로 반란군에 맞서다가

6발의 총탄을 맞은 채 그 자리에서 숨졌고

유해는 뒷산에 암매장되었다.

아들의 비통한 죽음에 고인의 부모님도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고,

부인 백영옥 씨는 남편을 잃은 충격에 시력을 잃었다.

그 뒤 1990년에 백영옥 씨는 신군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때 이 소송을 지원한 변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백영옥 씨는 갑자기 집 근처에서 의문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과 조직의 입신양명을 우선했던 쿠데타 세력에 맞서서

목숨을 바쳐 자신의 신념과 국민을 지키려 했던 진압군의 희생은

승자의 기록 속에서 지워지고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며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고,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하는

역사적 사고력이 길러지게 된다

이 말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실려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이다.

 

국가는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서 늦었더라도

진정한 명예 회복과 유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함이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지만 그동안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이 영화 한 편이

비록 실패했지만 12·12쿠데타의 진압군이 진정한 영웅이었다라고

재조명되는 계기와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오늘 아침 뉴스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파주시 유해 안장 계획이 무산되었다

소식이 들렸다.

"학살자를 잠들게 할 곳은 없다!"는 파주 주민과 지역 단체의 반발로

결국 땅 주인이 매각 계약을 취소함으로써

묏자리 매입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벌써 2년 전에 사망했지만,

작은 묘소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 아직도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 돌고 있는 것이 지금의 처지이다.

국민들을 학살해서 얻은 10년의 영화榮華

천 년의 치욕으로 남았음이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한다

사필귀정, 역사의 교훈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아침이었다.

 

 

 

 

                                            202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