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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에세이

수백당기 (守白堂記) - 5 (수백당을 찾아서)

 

 

 

 

 

 

      수백당기 (守白堂記) - 5 (수백당을 찾아서)

 

 

 

 

 

2014년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었지만 수백당의 공사는 별로 진척이 없고 한옥 사랑방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이래가지고는 이달 말의 설날에 입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공자는 말로만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 행동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매사에 설계변경 요구와 돈타령만 하고 있다.

 

 

 

 

 

 

 

 

 

 

 

새해 첫 현장회의를 간단하게 마치고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인흥마을로 차를 몰았다.

남평 문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인흥마을은 ‘원조 수백당’이 있는 곳이다.

원래는 집짓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꽃 피는 봄쯤에 건축주와 함께 방문할 계획을

세워두었었는데, 현재의 답답한 현장상황 때문에 무턱대고 혼자 길을 나섰다.

 

남해고속도로에서 구마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대구 입구의 화원IC에서 빠져나와

비슬산에서 흘러내리는 천내천을 따라 3 KM 정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니

황량한 겨울 들판 너머로 인흥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2006년 첫 방문이후 8년 만에 다시 왔지만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음은,

최근 몇 달간을 수백당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리라.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은,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전한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인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원래 '인흥사'라는 절이 있었던 폐사지에, 뒷산을 등지고 마을이

자리를 잡았고, 조선 후기의 전통한옥 9채와 문중 정자 2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약 180년 전 쯤에 마을이 조성된 인흥마을은 우리나라의 자연발생적인 전통마을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마을 배치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처음 이곳에 마을을 조성할 때,

이곳의 대표적인 마을 공공건물인 수백당(수봉정사) 터를 중심축으로 삼아서 가로망을 짜고

그 뒤로 집터와 진입로를 바둑판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미리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문중 주거단지라는 것이다.

 

수백당(수봉정사)은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로서, 주로 손님을 접대하고 문중의 모임을 열 때 

사용되는 마을의 큰사랑채이고, 안쪽으로 자리잡은 광거당(廣居堂)은 ‘ㄱ’ 형태의 재실(齋室)로서

문중 자제들의 교육과 도서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그리고 근래에 새로 지어진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서 책 2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설 도서관이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별도로 있다.

 

 

 

 

 

 

 

                                                                             인흥마을  (2014. 01.)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인 조선 후기에, ‘후손에게 돈이 아닌 지혜를 물려주라’는

신념으로 대구의 인흥마을에 교육과 학문의 아카데미를 꽃 피운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수준 높은 교육철학과 집안 내력은, 원광대 조용헌 교수가 쓴 <오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라는 책에 아주 잘 나와 있다.

 

 

 

“ ......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적선(積善)을 많이 하거나, 선(禪)을 하거나, 명당에 묘를 쓰거나, 독서를 많이 하면 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 가운데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꼽으라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일 게다.

 

아무튼 독서를 많이 하면 나쁜 팔자를 좋은 팔자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믿음이었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보다도 상대적으로 유가에서 독서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교 선비는 책을 좋아한다. 아울러 독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한국의 지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경북 대구에 고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집안이 하나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 있는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이다.

 

인흥리에 세거하는 남평문씨들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 불리는 특별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인수문고는 문씨 집안 공동의 문고를 일컫는 이름인데, 이러한 형태의 문고를 통상 문중문고(門中文庫)라고 칭한다.

 

 

......

 

 

현재 인수문고가 소장한 장서는 대략 8500여 책에 달한다. 1975년 인수문고가 설립되기 전에 그 전신인 만권당(萬卷堂)과 수봉정사(壽峯精舍)에 소장되어 있던 6948책과 1975년 이후에 추가로 수집된 1500여 책을 합한 수치다.

 

보통 고서의 경우 1책(冊)이 2∼3권(卷) 분량이 되므로, 8500책을 권 단위로 환산하면 2만권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장서가 약 4400책이다. 그 양적인 측면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보다 문씨들의 인수문고가 더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의 국·공립 도서관 또는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 인수문고가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수백당(수봉정사) 및 인수문고 (2006. 02.) 

 

광거당 (20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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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의 설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세운 문고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하였던가,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백성들은 그 산하에서 어찌되었던 살 수밖에 없다.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은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벌판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결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람은 일제에 굴복하고 협력해서 그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만주에 가서 총 들고 싸우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일제에 비굴하게 협력하기도 싫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인흥리의 남평문씨들은 그 방도로써 만권당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만권당의 일차적인 목적은 남평문씨들의 자녀교육이다.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 신식 교육기관이 대거 설립되는 상황에서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가 세운 신식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면 결국 자식들은 일본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만권당인 셈이다

 

 

 

 

 

 

 

 

  

                                                                      수백당(수봉정사) - 201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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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문씨의 중시조는 고려말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년)이다. 남평 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文世根) 때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다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현재의 남평문씨 세거지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이자,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년) 때부터다. 160년 전인 1840년대 전후에 인흥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인흥마을 (20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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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문경호는 이미 1000석 가까운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인흥이 문씨들이 대대로 살 수 있는 세거지가 될 수 있도록 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러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인흥은 처음부터 계획된 마을이란 점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먼저 우물 정자(井字) 형태로 가옥을 배치한 것이지 않나 싶다. 현재 인흥마을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은 모두 아홉 채인데, 마치 우물 정자처럼 가로 세로로 줄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이처럼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가옥이 배치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힘들다.

 

인흥의 문씨 세거지는 9채의 개인주택 외에 문씨들의 공공건물이라 할 수 있는 3채의 건물, 즉 광거당·수봉정사·인수문고가 있다. 그러니까 인흥에는 개인주택 9채, 공공건물 3채를 합해 모두 12채의 건물만이 존재한다. 앞으로 더 이상의 건물은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선 동네터가 전체 2만평 규모라는 점 때문이다. 1만평은 12채의 건물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1만평은 동네 마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약 건물을 더 지으려면 동네 마당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동네가 건물로 빽빽해져 여유공간이 없어지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서 문중에서는 더이상 신축 건물을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현재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이 살고 있다. 차남과 딸들은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 장남 상속의 원칙이 현재에도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는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한다.

 

재산 중에서 인흥의 9채 주택만큼은 현행 법률과 상관없이 반드시 장남에게 상속하지만, 주택이 아닌 다른 부동산이나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에게도 공평하게 상속된다. 물론 장남은 집을 물려받았으므로 다른 재산 분배에서는 그만큼 제외된다.

 

장남이 대구 밖의 외지에 직장이 있을 경우는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지만,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에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또 문중 내규에 의하여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함부로 뜨내기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인흥마을 (201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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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10년에 광거당(廣居堂)이 설립되면서부터다. 광거당은 원래 재실(齋室)로 지어졌지만, 광거당 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문인,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살롱이면서 도서관이었고, 거기다가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의 저명한 문인, 달사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여 광거당 내에 비치된 만권의 책을 열람하기 위해 몇 달씩 머무르다 갔다. 그러한 자취가 광거당의 누마루 바깥에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고 걸려 있는 추사 글씨 현판에 남아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는 뜻의 이 현판은 당시 광거당을 다녀간 문사들의 고풍스런 정취와 격조가 묻어 있는 현판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묵은 이끼와 연못은 메워지고 없지만 뜰안의 대숲과 담장 밖의 수백년 된 소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광거당의 문향(文香)을 전하고 있다.

 

광거당은 그 고풍스런 분위기로 인해서 1980년대 장미희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촬영 무대로도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문씨 세거지 전체의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에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는 수봉정사와 문씨 종가인 문정기씨 집이 촬영 무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거당 (201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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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평 문씨 세거지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건물은 수봉정사(壽峯精舍)인데, 이 건물은 문영박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봉 사후인 1936년에 세워진 기념건물이다. 수봉정사는 제2의 광거당이기도 하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서 천하의 좋은 사람을 다 사귀고 싶고, 천하의 좋은 책을 다 보고 싶다”는 선현들의 말처럼, 수봉은 책을 좋아하여 살림을 털어 고금에 걸쳐 1만 권의 책을 모았고 학자들과 문화인들을 좋아하였다.

 

조선 유학계의 군성(群星)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수십명의 선비가 항상 광거당에 묵으며 수봉과 더불어 학문과 고금을 논하고 시와 글을 짓고, 술잔을 나누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그 무대가 된 광거당은 일반 사랑채가 아닌 재실(齋室)이라서 동네 한쪽에 별도로 떨어져 있는 건물이다. 사랑채 용도로 사용은 되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채는 아니다. 재실이면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영빈관에다가 도서관 성격이 복합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용도의 건물이다. 이러한 성격의 건물은 현재 호남지역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광거당에 잠을 잘 수 있는 시설은 되어 있지만 식당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광거당에는 문간채가 있지만 이 문간채에는 손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사는 공간이라서 외부에서 온 귀빈 식사는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사랑채 같았으면 바로 옆의 안채에서 식사를 나르면 되는데 광거당은 어떠했을까. 살림채와 100m 이상 멀리 떨어진 독립건물이어서 손님들이 오면 그때마다 밥과 반찬을 일일이 날라야 했다고 한다. 하인들이 밥상, 밥, 반찬, 국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혹시 비가 오는 날이면 밥상보를 덮어서 나르기도 하였다. 오늘날 생각하면 그 시절의 손님대접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광거당 (201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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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문고는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의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보관되고 있다. 인수문고 옆에는 1993년에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바로 ‘중곡문고(中谷文庫)’다.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72)씨가 설치한 것이다.

 

문태갑씨는 관료 생활과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인수문고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이 수십년 동안 수집한 책 5000권을 모아 중곡문고를 설립했다. 인수문고가 고서 위주인 반면 중곡문고는 요즘의 책들 위주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인 1995년 서울에서 인흥으로 내려와 인수문고의 청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가 넘었지만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그는 청지기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인수문고 옆에 ‘거경서사(居敬書舍)’라는 이름으로 방 2칸짜리 자그마한 독서실을 지어놓고 여기서 주로 생활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방’이라는 뜻이다. 화려했던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와 생활하는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관료나 정치인보다는 학자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친께서도 일찍이 저에게 학문을 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제가 만약 학자의 삶을 살았다면 말년이 아닌 젊었을 때부터 조상들이 남긴 만권당의 책들을 보면서 살았을 겁니다. 관료나 정치인으로 부산하게 사는 인생보다는 책을 보면서 사는 삶이 더 의미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

 

 

당나라 때 중국의 관료들은 관청에서 퇴근해서 부인, 자식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고 한다. 가장이 한번 서재로 들어가면 누구도 그 독서를 방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하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이제사 마음대로 실컷 읽을 수 있겠구나”하면서 더욱 독서에 몰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말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는 뜰앞에 의자를 내다놓고 책 읽으면서 사는 삶이 한층 고준하게 보인다.

 

......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후의 혼란, 다시 6·25의 폐허를 거쳐야만 했고, 1970∼80년대 산업화를 겪으면서 모든 전통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퇴색해 버렸다. 어딜 가나 옛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없다. 그런 혼란을 똑같이 겪었으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조선 선비의 가풍을 지금까지 우직하게 보존하고 있는 남평문씨들의 고집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문씨들의 그 우직함과 고집은 정녕 태산준령인 비슬산의 정기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글 출처 : 오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인흥마을의 수백당은 자녀교육과 학문교류의 전당이다.

그 옛날 문경호 선생이 후손들을 위해 비슬산자락에 근대식 집터를 닦았고,

수봉 문영박 선생은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 무렵에,

일본식 신식교육을 거부하고 만권의 책을 사들여 자녀교육과 민족교육의

기틀을 확립하여 오늘날 2만권의 장서를 보관한 인수문고의 전통과 학풍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남평문씨 인흥마을 조상들의 사전준비와 정성이 철저하고 미래지향적이었는데

어찌 집안에서 인물이 안 태어날 것이며 어찌 명문집안이 아니 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인흥마을은, 마을의 대소사를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이  집안어른과 종손에

의해서 원칙과 도덕과 규범 속에서 이루어질 것 같은 봉건적인 성격이 남아있는 동족마을이다.

오늘날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핵가족시대에 익숙해진 우리 세대가,

그래도 적당히 불편할 것 같은 인흥마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적인 생각일까?

 

 

건축가 승효상 씨가 남양주시에 설계한 순백색의 수백당은 ‘비움의 집’이다.

전통적인 공간구성법인 채나눔 구성으로 영역을 나누고 각각의 단위공간마다 성격상의

독립성을 부여하고 있다. 채워야 하는 최소한의 공간만을 채우고 나머지는 비워두었다.

그렇게 비워둔 공간은 거주자의 삶일 것이다.

 

 

먼 비슬산의 겨울은 깊었고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함안의 수백당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내가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뀌지 않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고질적인 개인건축업자들의 비협조와 불통의 벽은

비슬산 보다도 높고 인간의 이기심은 끝이 없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인가?

그 말은 진리와 원칙에도 통하는 말인가?

결국, 지키기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비슬산 너머로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2014. 0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