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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에세이

벌초와 구름 (2013.09.01.)

 

 

 

 

 

바야흐로 벌초의 계절이다

 

해마다 추석을 눈앞에 둔 이 맘쯤이면

온 산이 벌초차량으로 뒤덮이고

고속도로는 정체로 몸살을 앓지만

해가 갈수록 성묘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는 것이

요즘의 벌초 풍경이다

 

 

 

 

 

 

 

 

 

 

 

 

 

 

 

 

나는 서울에 살았던 동안에는

집안의 벌초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고향으로 내려온 이후에는 부친을 따라서 꼬박꼬박 참석했다

 

작년 여름에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에

우리들끼리 처음 닥친 가을 벌초행사는 예초기를 처음으로 구입하여

동생들과 일을 분담해서 오후 1시쯤에 벌초를 모두 마치고

군북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 산소를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는데 기왕 벌초하러 온 김에

산소에서 점심도 먹고 느긋하게 오후까지 하루를 보내고 내려오고 싶었지만

빨리 자기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하는 동생들의 반대로

나의 작은 소망을 접어야만 했었다

 

 

 

 

 

 

 

 

 

 

 

 

 

 

 

 

 

 

 

 

 

그래서 올해는

나 혼자서 벌초를 하기로 작정을 했다.

 

신형 예초기도 있고 도와줄 친구도 있으니

동생들의 도움 없이 쉬엄쉬엄해도 

하루해 안에는 마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모친의 우려 섞인 눈빛을 뒤로하고

8시쯤에 산소로 올라갔다

 

주변의 모든 산이

떠나갈 듯한 예초기 굉음으로

마치 공사판을 방불케 한다

 

 

올 초, 매화 피던 시절에 산소에 한번 들리고 무심했는데

그 사이 잡초가 애들 키만큼이나 자랐다

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예초기가 날카로운 굉음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작년에 처음 잡아 본 서툰 솜씨지만 부지런히 서둘렀더니

오전에 3분의 1 정도는 마친 것 같았다

 

때마침 친구가 얼린 맥주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 산소에는 30그루 정도의 과일나무가 있다

매화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보리수나무, 명자나무, 목련, 동백나무, 감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있다

내가 5년 전부터 산소 앞에 심기 시작한 나무 들이다

 

산소에 유실수를 심는 것을

부친께서 처음에는 극구 반대했지만

내가 나무를 관리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산소에 가끔 들리고

왕방울만한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자 더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다

 

쬐그만 가지에 왕방울만한 대추가 처음 열렸을 때

신기해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김밥과 맥주로 풀밭위의 성찬을 마치고

소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비몽사몽 간에

나뭇잎 사이로 삐져나온 햇살이 얼굴을 간질러서 눈을 뜨니

문득 하늘이 가을 하늘처럼 높고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그 새파란 하늘 한 모퉁이에 

흰 구름이 뭉게 뭉게 계속 피어오른다

꼭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꿈틀 잠시도 쉬지 않고 덩치를 키우고

그 모습을 수시로 바꾼다

남쪽하늘과 동쪽하늘의 구름은 형태도 다를 뿐더러

컬러도 다르다

 

네델란드의 건축가(요른 웃존)는

어린시절 뒷동산에서 본 구름을 상상하며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했다고 하는데

나의 구름은 어떤 모습일까?

 

 

 

 

 

 

 

 

 

 

 

 

 

 

 

 

 

 

남쪽하늘의 조그만 조각구름 하나가

비눗방울처럼 뽀글뽀글 점점 몸집을 불리더니

드디어 남쪽하늘을 온통 뒤덮고는

이내 조각 조각 갈라지더니

마침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생성과 소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우리의 삶이 그럴 것이다

 

지나고 보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찰라인 것을

뭐 그리 욕심부리고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늘을 보고있으니

생성을 유도하며 자기 스스로 소멸하는

구름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 할머니는

방어산 아래 지실마을에서 태어난

재령 이씨이시다

 

유독 큰손자인 나만 편애하셔서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항상 나를 등에 업고 다녔던

자상한 어른이자 존경받는 여장부이셨다

 

지금은 태어나신 방어산의 지실마을을 쳐다보며

편안히 누워 계시지만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이 큰손자를 가장 찾으셨던

그리운 할머니이시다

 

  

 

 

 

 

 

 

 

 

 

 

오후 5시쯤에 일을 모두 마쳤지만 선선한 바람도 불고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늘에 누워 놀기로 했다

 

친구가 입을 열었다

" 앞으로 언젠가는 추석이나 벌초도 없어지겠제?"

" 아마 그렇게 되겠지.

기념일 정도로 남아 있고 사진으로만 추억되겠지"

 

" 그래서 나는 자식들한테 산소를 안 남겨 줄려고 하는데......"

" 자식들 생각하면 아마 그게 현명한 생각이겠제.

하지만 내 무덤 안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찬성하지만

부모와 조상님 무덤은 어떻게 해야할지......"

 

 

 방어산 너머로 빨간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둑어둑할 무렵 군북집에 도착하니

모친이 애가 타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 동생들없이 혼자 가더니

해 질때까지 죽을 고생을 했제?"

 

" 아닙니더. 산에 소풍 갔다 왔습니더.

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잘 놀다 왔습니더!"

 

 

 

 

 

                                                    2013.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