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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2013.07.)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法泉寺)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하 글 : 문화재청)

 

 

 

 

 

 

 

 

 

 

 

 

 

 

 

 

 

 

 

 

 

 

 

 

 

 

 

 

 

 

 

 

 

 

 

 

 

 

 

 

 

 

 

 

 

 

 

 

 

 

 

     지광국사 탑비(塔碑, 국보 제59호)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는 높이가 4.55m이며 고려시대 석비로서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품으로 조각 또한 정묘하다.

 

귀부(龜跌)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龍頭化)된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다.

등에는 네모 구획 안에 따로 귀갑문(龜甲紋)을 새겼으며 다시 그 안에 ‘왕(王)’자를 양각했다.

등의 중앙에는 간결한 복련(覆蓮)의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신의 바깥 둘레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며 양 측면에

쌍룡을 조각한 것도 특이하다. 이수(이首)는 모자를 쓴 듯한 형태이며 네 귀에 전각(轉角)이

뚜렷하고 귀꽃이 있다. 이수 중앙에 상륜부(相輪部)를 두어 보주(寶珠)를 얹었다.

 

지광국사(智光國師)는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났는데 속가명은 해린(海麟)이다.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역대 왕의 우대를 받았으며

삼중대사(三重大師), 승통(僧統)이 된 후 문종 12년(1058)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1070년 이곳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