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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 (2013.07.)

 

 

 

       원주 거돈사지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이하 글 : 문화재청)

 

 

 

 

 

 

 

 

 

 

 

 

 

 

 

 

 

 

 

 

 

 

 

 

 

 

 

 

 

 

 

 

     거돈사지 3층석탑(보물 제750호)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

 

 

거돈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