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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5. 안동 의성김씨 대종가 - 차라리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리라

 

 

 

 

 

 

 

 

   15.  안동 의성 김씨 대종가

 

- 차라리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리라 -

 

 

 안동 시내에서 법흥교를 지나서 안동 신시가지 왼쪽으로 안동대학교를 지나면 반변천 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길과 이어진다. 임하댐 가는 길의 중간쯤에 있는 보조댐을 지나자마자 강 중앙에 산수화와 같은

소나무 숲이 펼쳐지고, 길 왼쪽으로 고색창연한 한옥들이 즐비한 씨족마을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바로

5백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 온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대종가집과 집성촌이 있는 내앞川前 마을이다.

 

 내앞 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봉화의 닭실마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았다. 보물 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대종가는 풍수가들이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빛 아래에 펼친 비단형의 명당으로, 이런 터에서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후손이 많이 나온다고

알려 진 곳이다.

 

 

 

내앞마을 주변 풍경과 강 건너 백운정 전경

 

 

 내앞의 의성김씨 대종가는,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김만근 선생의 손자인 청계靑溪 김진 선생(1500 -1580)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다.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는 한 예언가의 말을 듣고서, 청계선생은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교육에 힘을 기울렸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그의 다섯 아들 중에 셋이 문과에 급제하고 둘은 소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다섯 아들이 급제한 집’이라는 뜻으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불렀다. 청계선생의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 선생을 비롯하여 내앞의 의성 김씨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24명, 생원이나 진사에 나간 사람이 64명에 이를 정도로 가문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의성 김씨 집안은, 과거 급제나 벼슬보다도 학문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청계선생은 자제들에게 “너희들이 군자답게 살다가 죽으면 나는 살아있는 것으로 볼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옥쇄와전玉碎瓦全, 대장부는 차라리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질지언정 구차하게 기와로 남지 말라”라는 유훈을 남겼다 한다.

 

 

 

의성 김씨 대종가 전경 -1 (2012. 04.)

 

의성 김씨 대종가 전경 -2 (2012. 04.)

 

 

 

 내앞 대종가는, 원래의 종가집이 조선 선조 때 불이 나서 소실되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재건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학봉선생의 건축관이 스며들어 있는데, 건물규모가 웅장하고 공간 운영이 독특하여 개성이 뛰어난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학봉선생은 퇴계선생의 수제자로서 정통 퇴계학맥을 계승한 유학자였어나,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아깝게 순절하였다.

 

 가옥의 평면배치와 구성은,  一자형 사랑채와 ㅁ자형 안채를 ㄴ자의 서고 누다락과 행랑채로 연결시켜서  두 채를 서로 잇고 있는 특이한 평면배치로 몸 기(己)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마당 전경 -1 (2006. 10.)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통하는 통로 (2006. 10.) 

 

사랑마당 전경 -2  (2006. 10.)

 

사랑마당 전경 -3 . 가운데 출입구 중문이 보인다 (2005. 08.)

 

 

 

 안채 내부는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에 난 계단을 올라 우측으로 들어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판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대청마루가 바로 나타난다. 대청마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크기이다. 대청마루는 바닥 레벨이 동일하지않고 3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문중의 위계질서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기 위한 고려이다.

 안채의 북서쪽 끝 방이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최고의 터인데, 이 방을 산방이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하였는데, 출가한 딸이 이곳에서 아이를 낳으면 이 집의 기운이 흘러나간다 하여 한때는 친정에서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한다.

 

 

 

안채 전경 . 좌측에 사당으로 통하는 쪽문이 보인다 (2005. 08.) 

 

                사랑마당에서 진입하는 안채 대청 출입구 (2005. 08.)

 

 

안채 전경 (2005. 08.)

 

안채 대청 전경, 3단으로 마루높이가 구분되어 있다.  우측 상부 모서리방이 산방이다 (2005. 08.)

 

 

 

 사랑채는 가옥의 서쪽에 위치하며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2층구조로 되어있다. 사랑마루와 작은사랑을 이어주는 부분은 회랑인데 입구 2칸은 서고로 사용되며 나머지 칸은 폭을 반 칸 줄여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반 칸은 하부로 통하는 통로로 사용한다.

 회랑의 하부는 수장공간 등으로 사용한다. 회랑이 작은사랑까지는 이어지는 것은 문중의 행사 때나 제사 때에 참석자의 동선을 해결해주는 기능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전경과 대청의 대상무형 편액

 

사랑채 대청 전경 (2005. 08.)

 

사랑채 대청 외부전경 (2006. 10.)                                 사랑채 대청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툇마루 (2006. 10.)

 

 

 

 

 한편, 절제와 극기의 선비정신이 잘 드러난 의성김씨 대종가에 대한 건축가 승효상 씨의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

큰 길에서 이 집으로 진입하는 길이 직선으로 뻗어있어 들어오면서부터 적잖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문을 열자 두 눈에 들어오는 사랑마당의 긴장감은 어느 방문객이든 순간적으로 침묵하게 한다. 보통은 사랑채가 집의 앞에 나와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뒤편에 물러서서 이 마당을 지배하고 있다.

서른댓 평 남짓한 이 직사각형 마당은 사방이 거의 두 개층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공간의 밀도가 대단히 압축적이다. 중문 안쪽 바로 옆, 안채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어 겨우 그 긴장을 이완시킨다.

 

 이 마당을 지배하는 사랑채는 비록 작은 쪽문을 가진 극히 절제된 볼륨이지만, 행랑채와 이어지는 2층

서고 누다락과 만나는 풍모가 대단히 다이내믹한 까닭에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렇다. 이 견고한 사랑채가 조선의 대 유학자가 그의 지적 창조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그 품격, 기상에

저절로 고개 숙이며 가만히 사랑에 올라 마당을 내려다보면 삼라만상이 마당에 가득 담긴 듯 고요하고

잠재적이다.

 

 안채는 폐쇄된 ㅁ자형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넓은 대청마루가 서너 단으로 레벨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종가인 까닭에 제사를 지낼 때 가족의 위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진 것이라 하니 유교적 삶의 방법이 집의 디테일까지 바꾸고 말았다. 이 안채의 마당이 그리 넓지 않은 데다 치밀어 나온 지붕이 하늘을 거의 가렸으니 빛에 대해 몹시 인색하다. 방만하기 쉬운 안채의 삶을 또한 절제시키기 위해 학봉은 빛마저 거저 주기를 꺼려했을까.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하는 대종가인 까닭에 사랑채의 대청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부속공간이

딸려 있는데, 그 문 위에는 이렇게 써 있다. ‘대상무형大象無形’, 즉 큰 세계는 형태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집의 모양이나 크기나 재치가 아니다. 스스로를 절제하고 극기하려는 조선 선비의 큰 정신세계이다. 우리 시대의 주거문화에 거의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 옛 선비의 신비로운 지적

창조의 세계 말이다.

 

 그렇다. 이 집은 선비가 사유(思惟)하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승효상의 전통건축 이야기 - 의성 김씨 대종가 : 주간조선 2003.09.25. 1771호)

 

 

 이 밖에 대종가에는 사당과 장판고가 있다. 사당은 사랑채의 북쪽 뒤편 언덕에 있다. 사당으로 가는 길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문을 통하거나, 본채로 들어가지 않고 사랑채 왼편으로 돌아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장판고는 사랑채 서쪽에 담장을 둘러 조성했는데, 문중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하여 근래에 건립한 건물이다.

 

 

 

 

청계선생을 모신 사당 

 

 

 

 

 대종가 바로 옆에 있는 소종가는 청계선생의 손자인 김용 선생을 불천위로 모시는 귀봉종택이다.  귀봉종택은 안동지역의 일반적인 종가집 구조인데, 안마당으로 돌출된 안채 마루가 특히 눈길을 끄는 집이다.     아울러,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대. 소종가의 평면구성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의성 김씨 대종가의 평면구성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독창적인가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1. 귀봉 종택의 정면         2. 좌측면 모습         3. 돌출된 안채마루와 안마당         4. 대종가에서 본 전경

 

 

 

 청계선생이래로 임진왜란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명문 가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해온 내앞 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다른 가문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마을의 교육기관인

가산서당을 근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로 바꾸어 외세에 맞설 인물을 길러냈고, 협동학교 설립자 가운데 한사람인 일송 김동삼 선생과 백하 김대락 선생등  의성김씨 문중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가 설치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치고 이국의 낯선 땅에 뼈를 묻었다.

 문중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항일투쟁에 바치고, 해방 무렵 학봉 종가에는 성한 수저 5벌뿐이었다고 한다. 해방이후, 내앞 문중의 36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어 ‘최고의 독립운동 명가’라는 영광은 누렸지만, 가문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후손들의 삶은 순탄치 못했고, 상당한 기간 동안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1 (2012. 04.)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2 (2012. 04.)

 

 

 

 몇 년 전 2007년도에, 내앞 마을 앞 쪽 옛날 협동학교 터에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 새로이 들어섰다. 안동은 경상북도 북부 유교 문화권의 핵심 지역으로 퇴계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독립  유공자 및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유서 깊은 내앞 마을에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해방된 지가 반세기도 훨씬 지났지만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군자처럼 살다 간’ 그들을 꼭 기억해야 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2012. 05.

 

 

 

 

 

 

마을 앞, 강가에는 의성 김씨들이 마을을 꾸미면서 조림한 인공 숲이 있다. 그 강을 건너면 소나무 숲에 뭍혀 있는 백운정이라는 운치 있는 정자가 있는데, 문중 자제의 교육과 청계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20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