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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7. 예산 추사고택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과 사랑이라

 

 

 

 

 

 

 

 

 

 

    17.  예산 추사고택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과 사랑이라 -

 

 

 

 충청남도 중북부에 위치한 예산군은, 예당평야와 저수지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곡창과 사과 재배 산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근래에는 대전-당진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해안과 국토의 중심부와의 연결이 헐씬 수월해 졌으며,  삽교읍 일원을 중심으로 한 충남도청이 이전할 예정지에는 신시가지 조성의 역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도 하다.

 아울러, 만해 한용운과 김좌진, 윤봉길을 비롯한 무수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 으로도 잘 알려진 예산에, 일세의 풍운아,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유적지가 사과향기 가득한 들판을 배경으로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 잡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유적지는,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문화유적이 산재한 일대를 말하며 추사 집안의 묘역까지 포함된다.

 고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화순옹주와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으로는 정조대왕이 내린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이 있으며,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천연기념물인 예산의 백송白松과  영의정을 지낸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가 있다.

 좌측으로는 추사의 묘가 있고, 뒤편으로는 추사의 수도장이었던 화암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곳에는

추사선생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등의 편액이 있으며, 뒤 편 오석산 암벽에도 친필로 새긴 석각石刻등이 있어,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위대한 예술가였던 선생의 자취로 가득 차 있다.

 

 

 

 

 추사고택 앞의 사과밭 전경 ( 2012. 05.)

 

추사선생의 묘소와 중간지점의 관리사, 우측 끝의 추사고택 전경 ( 2012. 05.)

 

추사선생의 글과 그림 ( 2012. 05.- 추사기념관에서 촬영한 것을 편집 )

 

 

 

 

 스승으로부터 ‘해동海東 제일의 문장’이라는 찬사를 받은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선생은, 그동안 우리에게는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서예가로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서예뿐만 아니라, 경학,

금석고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체득하여 신문화전개에 앞장선 실학의 선각자이기도 했고, 서도로써는 최고의 경지를 이룩하였고,불이선란도, 묵죽도와 함께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의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의

대표 지식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이조참판,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말년에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10여 년간의 유배생활 등으로 시련을 겪은 뒤, 71세를 일기로 부친의 묘소가 있던 경기도 과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1. 추사선생의 묘소                                                     2. 고조부 묘소앞의 천연기념물 백송          

3. 입구에 있는 추사기념관                                           4. 고택 관리사

 

 

 

 

 추사고택은 원래 서울에 있었던 집을 월성위 김한신 공이 해체하여 옮겨서, 예당평야가 펼쳐지는 예산

용궁리에 53칸의 규모로 이축한 집이다. 월성위 선생은 영조 임금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임금의 사위로서 서울과 예산을 오가며 경주 김씨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던 분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추사고택이 쇠락하여 원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훼손이 심각하자 정부에서 매입하여 행랑채 19칸을 제외한 34칸만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사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신암면은 동편에 무한천, 서편에 삽교천이 좌우에서 신암면을 감싸듯 북으로 흐르다 합수되어 서해로 빠져 나간다. 이 두 개의 개천 주위는 들이 형성되고 개천 사이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구릉 가운데 용산이 솟아있고 이 용산을 배경으로 추사고택이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추사고택 대문 출입구 전경 ( 2012. 05.)

 

 

 

 집의 전체 구성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와 사당채로 이루어져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평면의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후면에 '口'자 모양의 안채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안채 후면에 축대를 높이 쌓아 앉혔는데 사랑채와 안채의 축선을 벗어나 북편으로 치우쳐 있다.

 

 

 

대문에서 본 사랑마당과 안채 일부 전경 ( 2012. 05.)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대청과 사랑방 2칸이 이어지고 안채쪽으로 꺾인 부분에 두칸 마루방과 온돌

1칸이 연접되어 있다. 사랑채의 화단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

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의 받침대로 추사선생이 직접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랑채 전면에는 낮은 석단을 두른 장방형 화단을 만들고  화초를 모란 한 종류만 심어서, 전통조경의 간결하고 단아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사랑채 후면에 있는 안채는 사랑채와 낮은 단차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에는 담을

두지 않아 마당이 매우 넓은 것처럼 보이나, 옛날에는 이 두 마당 사이에 담장이 있어서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 마루에서 본 대문 쪽 전경 ( 2012. 05.)

 

각종 편액 작품들 ( 2012. 05.)

 

 

                                   해시계 석주 ( 2012. 05.)

 

사랑채 전경 ( 2012. 05.)

 

 

 

 안채는 서편 중앙에 동향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채를 연결하였다. 트인 곳이 없이 완벽한 '口'자 집이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은 기단을 높이고, 양 날개채와 광채는 단을 낮추어 높낮이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다.

 

 추사고택의 안채공간은 호서지방 반가에서 흔치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마당을 트인 부분 없이 '口'자로 만들었는데 크기를 작게 하고, 안대청을 높게 만든 것이다. 안채의 이러한 공간구조는 영남지방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호서지방 반가에서는 대개 안마당을 조금 크게 하고, 안대청 부분의 기단을 그리 높지 않게 만든다. 특히 안마당은 건물로 완벽하게 감싸지 않고 어딘가 틔어 두는 튼'口'자형 구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이응묵, 추사고택 『건축사』1986년 2월호)

 

 

 

 

안채마당 전경 ( 2012. 05.)

 

안채의 외벽 창호와 측면출입구 ( 2004. 11.)

 

 

안채 전경 -1 ( 2004. 11.)

 

안채 전경 -2 ( 2004. 11.)

 

 

 안채에서 특이한 점은, 고택 안채에는 나무를 한 그루도 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모양의 집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한다. 또 안채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고 취사용 부엌은 없다. 그것도 왕실의 공주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진다.

 

 

 

 

낮은 단차로 구분된 사랑마당과 안마당의 영역이, 옛날에는 이 두 마당 사이에 담장이 있어서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2012. 05.)

 

 추사고택의 봄 ( 2012. 05.)

 

                                                                       안채에서 본 바깥마당 ( 2012. 05.)

 

추사고택의 가을 ( 2004. 11.)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선생의 생가답게 고택의 방이나 기둥에는 주옥같은 선생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진품은 박물관에 있고 비록 영인본이지만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집중하면 그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안방에 걸린 ‘세한도歲寒圖’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추사 서거 150주년 회고전(2006년)’에서 진품을 본 적이 있는 지라 그 느낌이 각별했다.

 

“세한도는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국보 제 180호 세한도 ( 2006. 01.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의미의 세한도歲寒圖는, 시대의 조류에

영합해서 항상 변하는 세상의 인심을 개탄하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찾아준 제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선물한 그림이다. 그 뒤 제자는 이 세한도를 중국에 가지고 가서 소개하여 또 다시 중국대륙을 ‘김정희 열풍’으로 들끓게 만들었다. 당시의 추사선생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중국대륙에까지 수많은 팬을 확보한

19세기 동아시아의 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추사 연구의 선구자인 일본 학자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며 배우 배용준이 일본 여성을 매료시켰다. 이와 같은 일이 18세기 말~19세기 초 중국 베이징에서도 일어났다. 김정희는 청조문화의 진수를 체득해 중국인들도 열광시켰다"라고 평가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요즘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의 원조가 추사선생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신문에서 본 기억이 떠올라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든다.

 

 세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천재예술가의 시련과 제자에 대한 의리와 사랑이 모티브가 되었는데 그 애절한 사연만큼 그 이후의 여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제자 이상적이 자기 제자에게 세한도를 물려주고, 그 제자의 자손들이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시대 때 일본인 수집가의 손에 넘어가 해방 직전에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서화가 손재형 선생이,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도쿄의 일본인 소장가의 집을

90일 동안, 매일 매일 찾아 가서 끈질기게 부탁과 설득한 결과 세한도는 가까스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몇 일 뒤 그 일본인 소장가의 집이 폭격을 맞아 불탔다고 하니, 천우신조, 구사일생이라는 단어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이지 않나 싶다.

 

 

 

추사선생 사당 전경 ( 2012. 05.)

 

    1. 추사 영정                                        2. 불이선란도                              3. 기념관앞의 추사 조각상

 

 입구에 있는 추사기념관의 전시실

 

 

 

 

 추사고택에서 백송白松을 보러 가는 중간에, 화순옹주와 월성위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에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이 있다. 이 정려문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대왕이 세운 열녀문으로, 조선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정려문이다.

 화순옹주(남양주 궁집에 살았던 화길옹주의 이복언니에 해당된다)는 부마 월성위 공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자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한다. 소식을 듣고 내려온 부왕 영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그의 곁으로 가고 말았다. 지아비를 향한 정은 목숨보다 소중했지만, 부모에게는 더없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조카인 정조대왕이 열녀문을 세우게 되는 가슴 아픈

사랑이 어려 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진부한 러브 스토리로 밖에 안 들리겠지만, 의외로 청춘남녀들이 많이 찾아온단다. 오래전부터 추사고택에서 사랑을 속삭이면 깨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져오기 때문이란다.

 

 

 

1. 화순옹주열녀정문 앞마당                                        2. 화순옹주열녀정문          

3. 주춧돌만 남아있는 묘막                                          4. 화순옹주와 월성위의 합장묘

 

 

 

 

 화순옹주열녀정문 뒤쪽의 묘를 관리하던 묘막은 사라지고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있는 상태이고, 인근에

있는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白松은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 없는 희귀수종이다. 추사 선생이 청나라에서 가져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는데, 서울의 본댁에 있었던 백송과 함께 추사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집 밖 우물가에서 본 추사고택의 외부공간 ( 2004. 11.)

 

 기둥에 걸린 주련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주련은 2개의 글귀가 모아져 하나의 문장이 되고, 추사고택 42개의 기둥에 추사가 쓴 글씨들을 걸어 놓은 주련이 21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안채 정면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의 글귀가 가장 의미심장하다.

 

 

      "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명문귀족의 촉망받는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 순탄치 못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조선 후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종합예술가로서 큰 획을 그었던 ‘한류의 원조’ 추사선생이

71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깨우친, 아주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진리가 이 글귀 속에 녹아 있다.

 

 

 

 

                                                                                                        2012. 05. 17.

 

 

 

 

 

 

고회부처아녀손          대팽두부과강채    

                                               ( 2012. 05. - 추사기념관에서 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