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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2. 정읍 김동수 가옥 - 한국인의 심성을 담아낸 시대의 거울

 

 

 

 

 

 

 

 

 

 

          12.  정읍 김동수 가옥

 

- 한국인의 심성을 담아낸 시대의 거울 -

 

 

 

 

 호남고속도로 태인 IC를 빠져나와, 옥정호 방면으로 가다보면 칠보면이 나온다. 물안개와 함께 주변의 산세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옥정호는, 노령산맥 줄기 사이의 임실과 정읍 일대를 흐르며 때 묻지 않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우수상에 뽑힐 정도로 옥정호의 드라이브 코스와 주변경관은 가히 몽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칠보면은, 산외면과 더불어 한우 고기 판매단지로 유명하고, 무성리에는 최치원 선생을 제향하기 위한, 전북에서 유일한 서원인 무성서원이 있다.

 

 최근에 정읍시장께서 “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성지이고, 백제시대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백제여인의 마음을 담은 현존하는 최고의 가요 ‘정읍사’의 고장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초대 정읍현감을 지냈고,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이 태동했으며,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김동수 가옥이 자리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라고 정읍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백미, 김동수 가옥'은  칠보발전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산외면 쪽으로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다보면, 도로변 좌측의 ‘김동수 가옥’ 이정표 뒤로 개울을 따라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을 앞의 하천과 뒤편의 지네를 닮은 창하산이 둘러서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전경 (2004.12.)

 

텃밭에서 본 김동수 가옥 전경 (2004.12.)

 

텃밭에서 본 김동수 가옥 전경 (2011.04.)

 

집 앞의 연못에서 본 대문과 긴 행랑채의 모습 (2011.04.)

 

 

 

 

 ‘김동수 가옥’의 마을 앞으로는 동진강의 상류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리고, 뒤편에는 창하산이 둘러서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창하산은 그 모양이 지네蜈蚣를 닮았다고 하여 인근에서는 '지네산' 으로 불려 지고 있으며, 오공리五公里라는 행정지명도 본래는 지네를 가리키는 오공리蜈蚣里였는데, 일제시대에 지금과 같이 한자가 바뀌었다 한다.

 이 집의 터는 풍수상으로 지네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지네형국蜈蚣形局의 터를 길지로 여기는 이유는, 지네의 수많은 다리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재화가 많이 모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집 앞에는 동서로 긴 장방형의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이 그러한 형태로 된 것은 지네의 먹이인 지렁이의 모양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김동수 가옥은, 조선 후기 당시의 호남지역에 열병처럼 퍼졌던 풍수사상을 모태로 탄생하게 되었다.

 

 

 전체 건물 배치는, 대문채, 바깥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 안사랑채, 사당채의 7동棟으로 이루어지고, 동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외부에서 안채에 이르기까지 긴 동선 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집으로 들어서면, 대문채 안쪽으로 담장으로 둘러 싸여있는 마당이 나온다. 이 대문채마당은, 사랑채와 안채로의 직선적인 진입을 막아주고, 방문자로부터 안채로의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과 사랑채 쪽으로 진입을 유도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또한, 이 집은 부속채인 바깥행랑채와 안행랑채가 사랑채와 안채를 각각 감싸고 있어, 주요채의 영역을 한정지어 주고, 서비스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합리적인 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당과 사랑채 사이, 안행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 담은, 각 채의 영역을 분할하고 적절히 시선과 동선을 차단하고 있어, 외부 경계로써의 담뿐만 아니라 생활 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 댁의 사랑채는 사대부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다란 기단이 없다. 단지 마당과의 구분을 위해 키 낮은 댓돌만 한 단 깔았을 뿐이다. 기단은 시원한 조망을 얻기 위해 설치하기도 하지만 안채나 행랑채에 비해 건축적으로 높은 위계를 갖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집의 사랑채는 사대부집 사랑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누마루도 없고 마루의 높이도 매우 낮다. 그만큼 건축물이 지면과 가까이 붙어 있어서,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감을 준다.

 

 

 

 

안채로의 직선적인 진입을 막아주고, 방문자로부터 안채로의 시선을 차단하는 대문채마당 (2004. 12.) 

 

낮은 기단과 친근한 스케일의 사랑채 모습 (2011.04.)

 

산수유가 한창인 사랑채 후면과 안채 사이의 공간 (2011.04.)

 

안행랑채에서 본 안채의 모습 (2004. 12.)

 

집 후원의 텃밭 (2004. 12.)

 

 

 

 

 호남지역 조선 후기의 양반가옥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김동수 가옥의 각 채의 공간적 특성을 최성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김동수가옥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문간마당이다. 대부분의 집은 대문을 지나면 대개가 사랑마당으로 직접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문을 들어서면 담으로 둘러싸인 문간마당에 들어서고 다시 중문을 지나 사랑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가 나온 것은 대문의 위치 때문일 것이다. 집의 배치를 보면 소슬대문의 동쪽에 사랑채가 있고 소슬대문 바로 앞쪽에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집터가 워낙 넓다보니 안채와 대문사이에 공간이 너무 넓고 소슬대문이 안채의 중문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안채가 들여다보이는 것 때문에 완충공간이 필요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담으로 둘러진 완충공간을 만들고 보니, 안채 앞마당이 넓어 허해지는 것도 방지하고, 출입자가 자연스럽게 제어될 뿐만 아니라 안채가 들여다보이는 문제도 해결되었다. 또한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과정이 복잡해져 안채에 대한 내외의 형식이 한층 강화되었다.

 

 

 

사랑마당과 그 너머의 대문채마당이 보인다 (2011.04.)

 

 

 

 두 번째의 특징은 안채에 있다. 안채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ㄷ자 형태일 뿐만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외관의 형태만 대칭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방의 배치까지도 철저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터를 잡을 때 도와주었던 승려가 계획하여 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ㄷ자 형태의 집은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대칭을 만든 것은, 집의 형태에서 권위를 찾으려는 주인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대청 전면 퇴칸의 양끝에 설치되어 있는 판장벽 부분이다. 마당으로 면해있는 부분은 판장벽에 창이 설치되어 있고 퇴칸 부분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의 문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다. 이 문은 안방이나 건넌방에서 바로 퇴칸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설은 겨울철을 위해 설치된 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겨울철 대청의 모든 문을 닫아 놓고 판장벽에 설치되어 있는 쪽문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함으로서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에서 본 안채 중문과 안채를 감싸고 있는 안행랑채의 모습 (2011.04.)

 

 

'ㄷ' 자형의 완벽한 대칭구조를 가지고 있는 안채의 구성 ( 2011. 04.)

 

 

                               김동수가옥 안채의 특징인 대청 전면 퇴칸의 양끝에 설치되어 있는

                         판장벽 부분과 출입문 (2004. 04.)

 

 

 

 

 세 번째의 특징은, 안채도 ㄷ자 이지만 안행랑채도 큰 ㄷ자 형태로 안채를 감싸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가 ㄷ자 모양을 하는 경우 행랑채는 대개 ㅡ자형을 하고 있어 튼 ㅁ자 형태 또는 ' 디' 자 형태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렇게 안채를 크게 감싸는 형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ㄷ자 형태의 안채 앞에 바로 행랑채를 붙이면 안채의 마당이 좁아 답답하다. 대부분의 집이 이러한 형태의 마당을 가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행랑채를 대문채 쪽으로 물려 지음으로서 넓은 마당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개방이 되는 부분은 양날개를 꺾어 감쌈으로 내외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한 것이다.

 

 

 

안채를 'ㄷ' 자 형태로 감싸고 있는 안행랑채의 모습 (2011.04.)

 

 

 

 김동수 가옥에는 안사랑채가 있다. 안사랑채는 원래 이 집을 짓기 전에 주인이 기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집이라고 한다. 따라서 집이 웬만한 집의 안채의 규모로 구성되어있다. 왼쪽의 칸 반은 부엌으로 꾸며졌다. 대청의 칸이 다른 방의 칸살에 비하여 작기 때문에 대청이 4칸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좁아 보인다. 아마도 임시거처로 계획하였기 때문에 대청을 크게 만들지 않은 것 같다.

 

 

 김동수가옥의 사랑채는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방은 ㄴ자 형태로 3칸의 규모인데, 전면에 있는 2칸을 어른이 사용하였고 뒤쪽의 한 칸을 아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뒤쪽의 방을 아들이 사용하게 한 것은 며느리가 기거하는 안채의 건넌방과 연계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은 사당 쪽에 있는 좁은 골목을 따라 이루어진다. 좁은 골목을 지나면 바로 건넌방의 뒤쪽에 이르게 된다. 집안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넌방의 뒤쪽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새신랑이 드나들 때 편리하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 규모에 비하여 매우 넓어 육간대청이다. 대청의 규모를 보면 이 집을 드나드는 손님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사랑채에는 우측 끝에 반 칸 크기의 조그마한 방이 있다. 이 방은 주인의 몸종을 위한 방으로서 어린 하인이 기거했다.

 

 

 

 

사랑채에서 본 대문채와  바깥행랑채의 모습 (2011.04.)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문이  없는 통로. 젊은 아들 부부를 위한 배려이다. (2011.04.)

 

 

육간대청사랑채의  개방된 내부 모습 (2011.04.)

 

 

 

 

 

 김동수 가옥은 풍수상으로 길지에 자리 잡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씨 집안은 이 집을 짓고 가산이 크게 불어나고,  한해 추수로 1200석을 하는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집터가 명당자리이고 12대까지는 그 기운이 미칠 것이라는 풍수해석을 굳게 믿은 창건주 김명관은 후손에게 이곳을 절대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집이 화를 당하여 무너지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다지 지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안채의 땅속에 표적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다. 그러나 7대를 넘지 못하고 빈집이 되고 말았다.

 

 

 

 

 

 

 

                                

                       

 

 

 

 

 

  

 예로부터 임실, 부안을 비롯한 정읍 지역은, 인본주의 사상을 주창했던 조선시대 '동학'의 유적을 자주 볼 수 있는 고장으로서, 가진 자의 권세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정서가 많이 서린 지역이다. 그래서 김동수 가옥은 99칸의 양반의 집이지만 서민들의 애환과 슬픔을 배려한 포용력을 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동수 가옥의 특징이자 매력인, 소박함, 질박함, 정갈함,  그리고 마당구성의 독창성, 넉넉함 등은, 바로 한국인의 심성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집이라고 말하는데 부족함이 없겠다.

 

 

 결론적으로, 김동수 가옥은 조선말기의 대표적 주거건축물로서, 풍수적 사상이 당시의 주거형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고, 호남 지방의 대지주집으로서, 사대부 집의 공간구성과 민가 건축의 소박한 구조 형식이 결합되어 세련된 건축미와 주거건축의 색다른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 김동수 가옥에는 주인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해당 관리관청의 노력으로 항상 정결히 유지 및 관리되고 있다.  후손들이 집을 떠나 빈집이 되었으니, 명당에 터를 잡고 가문의 번영을 열망했던 창건주의 개인적 열망은 꺽인  듯하나, 정읍시의 사랑과 국가의 보물이 되었으니 그 또한 더 큰 가치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읍시에서는 얼마전에, 진입부의 낡고 불안했던 다리도 새로이 건설하고, 한옥식 옥외 화장실도 신축하여,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방문객들을 항상 기다리고 있다.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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