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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9. 해남 녹우당 - 푸른비가 내리는장원

 

 

 

 

 

 

 

 

          09.해남 녹우당綠雨堂

 

        - 푸른 비가 내리는 장원 -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맥이 남으로 남으로 달려서 멈춰 선 곳이자, 국토의 최남단 땅끝마을 해남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천하의 인재들이 남긴 숱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다도의 창시자 초의선사, 서산대사, 추사 김정희 선생은, 두륜산 자락의 대흥사, 미황사, 일지암등과 깊은 관련이 있고,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인맥은 덕음산 자락의 해남 윤씨 종가댁, 녹우당綠雨堂으로 연결된다.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 윤효정 선생이 해남 연동마을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이 고택의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인데, 고산 선생과 효종 임금간의 아름다운 사연이 숨어 있다. 효종 임금이 스승인 고산 선생에게, 수원에 집을 하사하였었는데, 고산 선생이 해남으로 낙향하면서 그 일부를 철거하여 뱃길로 옮겨서 이축한 것이 현재 고택의 사랑채, 녹우당이고,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집터 뒤쪽에는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문중 재실 추원당이 자리를 잡고 있고, 500년이나 된 9,000 여평의 비자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서 거대한 장원을 이루고 있다.

 녹우당이 자리 잡은 연동 마을은 풍수적으로, 마을 입구에는 연못(白蓮池)과 동산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하고, 동쪽 계곡에서 시작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서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문필봉)이 원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아주 수려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마을 입구의 백련지 (2006.09.)

 

 

녹우당 전경 사진 및 모형

 

 

녹우당 전경 (2006. 09.)

 

 

녹우당 진입부 (2011. 02. 26)

 

 

 

 

 녹우당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어초은 윤효정 선생이 이곳 연동마을에 자리를 잡은 이후,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녹우당은 호남일대의 최고 명문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제한 종손들은 서울에 자리를 잡고 생활했기 때문에 종가인 녹우당은 소박한 시골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남인세력의 선봉이었던 윤선도 선생이, 송시열 선생의 서인세력과의 갑술옥사에서 패배하여 유배를 와서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윤씨를 비롯한 남인계열은 정권에 참여할 길이 봉쇄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환경속에서 증손인, 선비화가 윤두서는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1752년 무렵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그 이전에 있었던 종가집은 재실 형태의 건물이었으나, 윤두서의 낙향 이후에 본격적인 살림채로 리모델링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남측에서 본 사랑채 전경 (2006. 09.)

 

녹우당 편액. 동국진체의 원조,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2006. 09.)

 

사랑마당에서 본 사랑채와 대문 (2006.09.)

 

 

 

공재 윤두서 선생의 자화상(국보 240호)

 

 

 

남측에서 본 사랑채 전경 (2011. 02. 26)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하고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집 앞의 500년이나 된 은행나무를 지나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나온다. 이 집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 바로 녹우당綠雨堂이다.

'뒷 산기슭 비자나무 숲에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푸른 비가 내리는 집’- 녹우당綠雨堂이다. 과연 풍류가 뭍어 나는 운치있는 작명이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ㅡ’자로 늘어선 형태이고, 전면의 처마끝에 햇빛을 차단하는 차양이 달려있다. 석양 무렵 낮게 드리우는 햇살을 가리기위한 이 독특한 차양은, 집 뒤편의 추원당에서도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외장보다는 기능을 우선시한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공간구성은 아랫방 웃방으로 되어 있으며, 아랫방은 가장의 침실 역할을 하였고, 웃방은 외부 손님의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또한 작은 사랑에는 녹우당의 고문서, 화첩, 시문 등이나 중요한 유물을 보관해 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채의 마당과 제례용 대청 (2006.09.)

 

 

안채 출입통로 (2006.09.)

 

 

안채마당과 사랑채의 지붕이 보인다 (2006.09.)

 

 

 

 

 

 

 사랑채 우측 편, 남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의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채와 안채가 합쳐져서, 호남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례의 운조루와 비슷한‘ㅁ'자형의 폐쇄적인 구조를 이룬다.

 부엌 지붕위에는 솟을지붕 환기구를 설치하여 기능적인 면과 의장적인 면을 동시에 해결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우리나라의  한옥들 중에서 녹우당에서만 볼 수있는 독특한 요소로, 최근에 신축한 유물전시관의 디자인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안채 좌측 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에 장독대와 곳간들이 있고, 안채 뒷편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여성전용의 넓은 후원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안채 출입용 샛문 (2006.09.)

 

고산 사당 (2006. 09.)

 

 

 

고산 사당으로 가는 길 (2011. 02.26) 

 

해남 윤씨 문중 재실, 추원당 (2011. 02.26) 

 

 

 

 

 

 한편, 특이하게 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녹우당의 집 전체를 구성하는 방향성의 문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교수의 심도 깊는 분석을 소개한다.

 

“녹우당에서 서향을 하고 있는 부분들은 사랑채 전부와 안채의 제례청 부분, 그리고 뒤편의 산신단과 사당들이다. 남향을 하고 있는 부분이 더욱 기능적이고 일상적인 공간들이라면, 중심축선상의 공간들과 서향한 건물들은 상징적이고 규범적인 것들이다. 특히 안마당의 정면을 형성하는 안채 제례청은 그 놓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안대청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사 때만 사용하는 의례적인 장소다. 평시에는 항상 닫혀 있고, 북서쪽 모퉁이 놓인 두 칸의 '못마루'가 안대청의 역할을 한다. 상징성과 일상성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서로 분리된 채 직교하도록 구성된 것이다.

 

 비록 동서로 놓인 상징적인 축이 집의 구성축을 이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의 실용적 행위를 담기 위한 공간들은 모두 남북으로 놓였다.(출처 :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 돌베개)

 

 

 

 

 

 

안채 마당의 정원과 굴뚝  (2006. 09.)

 

 

 

 

 녹우당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고산 윤선도와 조선시대 최고의 초상화로 꼽히는 자화상을 남긴 공재 윤두서 등을 배출한 해남 윤씨 가문의 종가로서 호남 제일의 주거문화유산이다. 감히 호남의 제일이라 칭하는 까닭은 녹우당의 가치가 단지 건축적 우수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가전의 서화기품이 하나의 박물관을 채울 정도이며, 인근 지역에 별묘와 가묘, 제각, 산천원림 등 수많은 유적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고산과 공재 외에도 낙서 윤덕희와 청고 윤용, 그리고 다산 정약용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 한국의 건축문화재 - 기문당. 천득염,전봉희 저)

 

 

 

 

 

 

안채 부엌 지붕의 솟을 환기구가 돋보인다 (2006. 09.) 

 

 

 

  비자나무 숲 가는 길 (2011. 02.26)  

 

 

  

 

   

 

 

 

 해마다 녹우당에서는 고산의 문학혼을 기리는 ‘고산 문학축전’이 가을에 열린다. 시서화백일장으로 축제의 문을 열고, 문학세미나와 시낭송, 판소리공연 등으로 이뤄지는‘고산문학의 밤’이, 고택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고산 선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재 선생을 거쳐서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하여, 해남의 문예부흥을 이루었던 곳에서 벌어지는, 의미 있는 행사가 매년 계속되고 있다.

 아울러, 지난 해 가을(2010년 10월), 해남군청에서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을 새로 신축하여 문을 열었다. 1990 년대에 건축한 기존 유물전시관이 협소하여 이전하고, 주변 유역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그 추진 과정에서 윤씨 종중과 해남군청이 한바탕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6년 봄에, 해남 윤씨 종중은 유물전시관 신축부지 위치선정과 해남군의 유적지 정비 방침에 반발해서, 83일 동안 녹우당과 기존 유물관 문을 폐쇄하여, 관람객들을 헛걸음 시킨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전국의 관광객들을 볼모로 한, 줄 당기기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찬란한 예술혼이 스며있는 녹우당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집안 일이건 지역사회 일이건, 두 사람 이상이 일을 하다보면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 있다. 결국은 대의를 따르는 것이 정답이다. 녹우당은 문중의 개인재산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일도 마찬가지다. 4대강사업, 동남아 신공항사업, 과학벨트사업 등으로 전국이 한창 시끄럽고,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기에도 답은 있다. 정치가들은 빼고, 전문가한테 맡기면 된다.

 돈과 권력에 매수되지 않고 양식있는, 해당분야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존중하여 결정하면,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고, 훗날 역사는 그 합리적인 결정과정과  원칙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녹우당 입구의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2011. 02. 26) 

 

 

 

 

 

 

  지난 주 토요일, 5년만에 녹우당을 다녀왔다. 밤부터 많은 비가 예보된 상태라, 날씨는 쾌청한데, 하루종일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무심코, 녹우당 뒤 편의 비자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아! 나는 그기서  그 빗소리를 들었다!

"후두두둑! 후두두둑! 후두두둑! ......"

 비자나무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하늘은 너무나 새파랗는데, 여름 소나기같은 바람소리는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나를 전율케 하고, 온 덕음산 자락을 휘감아 다녔다!

 

 내려오는 길에, 고산 윤선도 시비詩碑에서 본 ‘어부사시사’의 한 구절과 그 날카롭던 빗소리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선경仙境이 가깝도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 '봄'노래 중에서)

 

     ......

                             

       물가에 홀로 선 소나무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마라  인간세상 가리운다

 

      파도소리 싫어마라  속세소리 막는도다         

                                                                      ( '겨울' 노래 중에서)

   

 

 

                                                           2011. 02. 28.

 

 

 

 

 

                                       고산 선생이 은거한 보길도의 세연정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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