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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0. 하회마을 충효당 - 충효보다 중요한 사업은 없다

 

 

 

 

 

 

 

 

          10.하회마을 충효당忠孝堂

 

        - 충효보다 중요한 사업은 없다 -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안동의 화산花山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선회하여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를 잡은 하회河回 마을은, 지배세력인 사대부 양반과 일반 민중들의 삶과 공간이 조화롭게 공존했던 전통마을이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외침을 한 번도 겪지 않아서 기와집과 토담집들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600여년을 지켜 온 양반가의 동네이면서도, 민중 놀이인 하회 탈춤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 2005.08.)

 

 

 

 

 1999년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희망에 따라 안동이 방문지로 선택되었고, 하회마을의 충효당忠孝堂 안채에서 생일상을 받고 잠시 머물다 돌아갔다. 모란이 곱게 핀 조그만 뜰과 정갈스런 장독대와 사각형의 하늘만 보이는 안채 대청에 앉아서, 푸른 눈의 여왕은 무엇을 보고 갔을까? 안채마당에서 구속과 답답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절제와 아늑함을 느끼고 갔을까?

 아무튼, 여왕이 다녀간 뒤부터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서,‘가장 한국적인 모습이었던 마을이, 상업화와 관광지화로 가장 시달리는 전통마을’로 변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년에 마을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키 위해서, 마을 내에 있던 모든 음식점과 상점을 마을에서 1.2 KM 떨어진 입구쪽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관광객들은 모두 새로 조성된 상가지역의 주차장에 차를 두고, 마을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마을로 접근해야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인 궁여지책으로서, 더 이상의 주거환경 파괴를 막고 보존을 위해서, 일부 고립을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평가 보고서에서 하회마을에 대해,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생활양식으로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며,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고, 마을이 통합적으로 보존관리 되고 있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우리도 잘 몰랐던 가치를, 또 푸른 눈의 문화선진국이 일깨워 준 셈이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 문화유산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상업자본을 몰아내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마저 통제하면서 얻어낸 상처뿐인 영광인데, 오히려 내국인들만의 무분별한‘유네스코 문화유산등재 관광특수’가 전국을 휘몰아치고 있는 지금, 하회마을을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전해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서애 선생이 학문을 닦던 원지정사에서 바라본 부용대 ( 2005.08.)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 ( 2005.08.)

 

 하회마을.  뒤에 보이는 기왓집이 양진당이다 ( 2005.08.)

 

양진당의 사랑채 ( 2005.08.)

 

 

 

 하회마을은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이 있고,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회마을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때, 남촌을 대표하는 건물은 충효당이고, 북촌을 대표하는 집은 양진당이다. 양진당은 서애 선생의 친형, 겸암 유운룡 선생의 집으로 풍산 류씨 대종가집이다. 유운룡의 아버지, 입암 유중영 선생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양진당은 유운룡의 6대손 유영 선생의 호에서 따 왔다.

 입향 시조인 유종혜 선생이 처음 신축한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 말의 건축 양식과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섞여 있다. 양진당은 하회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고, 특이하게 입암 선생과 겸암 선생의 불천위不遷位사당 2개가 한집안에 따로 모셔져 있다.

아울러, 양진당은 높은 기단과 기둥 및 처마로 인해서, 실용성보다는 외형을 중시한 위풍당당한 대종가집의 전형을 보여 준다 하겠다.

 

 

 

 

 충효당의 대문 및 행랑채 ( 2005.08.)

 

 충효당의 사랑채 대청.  조선시대 명필 미수 허목 선생이 쓴 충효당 전서체 현판이 보인다( 2005.08.)

 

 충효당의 사랑채 대청에서 본 대문( 2005.08.)

 

                                 충효당의 사랑채 대청으로 넘어 온 후원 풍경( 2010.05.)

 

 

                 충효당의 작은사랑의 마루.  대청을 넘어서 건너편의 큰사랑방까지 확장된다( 1988. 08.)

 

 

 

 

 충효당은, 양진당에서 건너다보이는 서향한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가집이다. 난세의 충신, 서애 선생은 40여 년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고 말년에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 왔다. 그러나 청백리였던 선생은 변변한 집하나 없이 살다가 서미동의 초가삼간(弄丸齋)에서 돌아가셨다. 그 후 선생의 손자인 류원지 선생이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서, 유림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먼저 안채를 신축하였고, 증손인 류의하 선생이 사랑채를, 8대손 류상조 선생이 행랑채를 완성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다.

 양진당이 권위적인 대종가집의 모습이라면, 충효당은 화려함이나 웅장함보다는 단아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중종가집이다.

 건물의 구성은 행랑채 12칸, 사랑채 12칸, 안채 27칸, 사당 6칸으로 전체 57칸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이다. 충효당의 현판이 걸려있는 사랑채는 겹집 형태의 평면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전체 12칸의 규모로 솟을대문과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 4칸 규모의 사랑방이 배치되어 있고, 오른편에 작은사랑과 퇴칸이 마련되어 있다. 큰사랑방의 앞과 뒷방의 사이에는 벽체를 두지 않고 미닫이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문을 열고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청 오른편의 작은사랑으로 사용하는 건넛방의 구성은, 사랑채 배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한 노력들이 숨어 있다. 충효당은 건물이 서향하고 있어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이러한 불리한 좌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방의 앞쪽에 반 칸의 퇴를 내고 퇴칸에 판벽을 설치하고, 사랑방문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언제라도 여닫으면서 더위와 추위에 대응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충효당의 안채 ( 2010.05.)

 

                                 충효당의 안채 마당-1 ( 2010.05.)

 

충효당의 안채 마당-2 ( 2005.08.)

 

 

 

 안채의 출입이 가능한 곳은 두 곳으로,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의 샛담에 나 있는 작은문과, 사랑방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안채에 들어서면 정방형의 마당을 만날 수 있는데 마당 한가운데 소담스런 화단과 장독대가 마련되어 있다. 안대청의 기둥은 양진당의 경우와 같이, 간격은 좁고 높이는 높아서 약간의 긴장을 주지만, 적절한 스케일의 마당의 크기와 깊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안채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서, 전체적으로 안락한 안채 분위기를 연출한다.

 안채의 구조는 안동지방의  일반적 형태인 ㅁ자형의 폐쇄형 구조이다. 공간의 구성은, 왼쪽부터 부엌 1칸, 안방 3칸, 대청 2칸, 건넛방 1칸으로  7칸의 규모이다. 안채의 서쪽은 3칸의 부엌과 찬방, 고방, 헛간, 방이 각 1칸씩 배치되어 있고, 안채의 동쪽은 대청과 연이어 건넛방과 상방, 사랑방의 후면이 이어져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건물은 붙어 있어나 방이나 마루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마당으로 내려서서 후원쪽 문을 통해서 드나들게 되어 있다. 후원 뒷쪽의 사당채는 몸채와는 방향을 달리하여 남향을 하고 있고, 정면에는 삼문이 있다.

 

 사랑채를 돌아서 뒷마당  후원으로 가면, 서애 선생 이후의 많은 유물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문중 박물관인 영모각이 있다. 콘크리트에 시멘트로 마감한 무늬만 한옥인 건물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이곳의 귀중한 유물중에는, 지금은 안동 국학진흥원에 기증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이 전시되어 있었다. 징비란 말은 지난날을 경계하고(懲) 후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毖)는 뜻이다.

 선생은 임진왜란중 자신이 몸소 체험한 참혹한 전란의 실상과 아픔을 글로 남겨서, 후손들이 또다시 전철을 밟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남은 여생을 다 바쳐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노정승의 노력도 헛되이, 삼백년 후 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이번에는 막아내지도 못하고 36년간 그들의 속국이 되는 치욕을 당했다. 죽어서까지 나라를 염려하고, 후손들을 지키고자 했던 선생의 염원은 후손들의 불찰로, 먼지와 함께 책속에 뭍히고 말았다.

 서애 선생은, 부용대 아래,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마무리하고 66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집안에 장례비조차 없었다 한다. 그의 제자 우복 정경세 선생은 “중국의 검소한 재상 제갈량도 고향에 뽕나무 800그루는 있었건만 선생님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선생의 청빈함에 감탄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난세에 태어나 온몸으로 나라를 지켜 낸 영웅이었지만, 후대의 평가는 훨씬 미흡하고, 선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신 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하사받았고, 하회마을 뒷산,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셨다.

 

 

 

 

 병산서원 ( 2010.05.)

 

 

 병산서원, 옥연정사, 영모각, 존덕사

 

 

 

 

 

 하회에서 볼 때 부용대의 정반대쪽, 화산花山 뒤쪽에 자리잡은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로 꼽힌다. 자연환경에 대한 대응방법, 공간의 구성과 흐름이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고, 서원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존덕사에는 서애 선생과 셋째아들 류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서애 선생은 임종할 무렵 시 한 수를 남겼는데, 그 시에서 조차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럽다고 자신을 낮추고, 자손들에게는 나라 걱정과 효에 대해 당부함을 잊지 않았다 한다.

 

     林間一鳥啼不息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門外丁丁聞伐木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一氣聚散亦偶然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只恨平生多愧怍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勉爾子孫須愼旃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忠孝之外無事業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2011. 03.

 

 

 

 

                                              부엌 옆의 안채 출입구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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