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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11. 논산 명재(윤증) 고택 - 착한 선비라 불러다오

 

 

 

 

 

 

 

 

 

 

       11.  논산 명재(윤증) 고택

 

 - 착한 선비라 불러다오 -

 

 

 

 계룡산과 대둔산 줄기에서 각각 발원한 노성천·연산천과 논산천 등이 도시의 중앙을 서쪽으로 흘러 강경천과 합류한 뒤 금강으로 흘러드는 기름진 논산평야에 자리잡고 있고, 얼마 전 신행정수도  유치경쟁으로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논산은,  원래 우리나라 유학과 예학의 중요 거점으로서, 17∼18세기 조선 후기의 학계와 정치계를 주도했던 기호학파 유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회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우암 송시열 선생과 더불어, 논산 노성면의 명재 윤증 선생이 있었다. 산세 좋고 지세 좋은 노성면은 고려시대부터 파평 윤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장구리에는 재력과 세도가 대단했던 윤황 선생의 고택이 있고, 선산을 중심으로 주변에 문중의 사설교육기관이었던 강학당과 유봉영당 등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조선 숙종 때 대학자였던 윤증 선생은 윤황 선생의 손자로, 지금의 교촌리에 칩거하면서 후학 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윤증 선생의 학덕을 흠모한 숙종 임금은, 20여 차례나 벼슬을 내렸고, 1709년에는 우의정 벼슬을 하사하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열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서 끝내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군왕의 얼굴도 한번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까지 오른 기록을 세웠고, 사람들은 그가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우의정에 올랐다고 해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한다.

 

 

 

 

 

진입부의 연못에서 본 고택 전경 (2004.12.)

 

담장없이 마을을 향해 열려있는 사랑채와 안채 (2005.11.)

 

중심축 선상에 있는 안채 출입구인 중문과 우측의 사랑채가 보인다 (2005.11.)

 

고택  입구에 병자호란 때 순절한 윤증 선생의 어머니 정려각이 있다 (2011.03.)

 

 

 

 노성향교가 있는 곳이라 해서 교촌리라 불리는 이 동네는, 마을 뒤편의 노성산자락에, 윤증 선생 고택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노성향교, 우측 언덕너머에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인 노성 궐리사가 있다.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의 주거지로서, 학문적인 교육환경이 셋팅 되어있는 주변여건은, 지역사회의 명실상부한 구심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런 학구적인 분위기는, 세도가 ‘양반의 집’보다는 청빈한 ‘선비의 집’이 탄생하게 되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행랑채, 곳간채 그리고 외곽의 사당으로 이루어진다.

ㄱ자형 사랑채와 ㅡ자형 문간채, ㄷ자형 안채 그리고 ㅡ자형 사당채가 독립된 채로 모두 남서향으로 배치되었다. 사랑채 앞은, 행랑채 없이 전면이 개방되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게 다른 종가들과 구분된다.

ㄷ자형의 안채가 날개를 펴서 뒤에 자리잡고, 그 앞을 문간채와 사랑채가 막아서, 튼 ㅁ 자형의 배치가 되었다. 안채 동북쪽 모서리에는 사당채가 있는데, 근래에 다시 복원 한 것이며 사당 주위로 담을 둘러서 공간을 따로 구획하고 있다.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사당채 (2005.11.)

 

소박한 규모의 고택 전경 (2005.11.)

 

작지만 당당한 사랑채 (2005.11.)

 

메주가 주렁주렁 달린 안채의 가을 풍경 (2005.11.)

 

봉제사가 많은 종가집답게 대청이 유난히 넓은 안채 (2011.03.)

 

 

 

 

 고건축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설문조사에서 강릉 선교장 다음으로 뽑힌, 이 집에는 몇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사랑채 마당에 있다. 건물의 주 진입로이자 안채의 통로인 이 마당을 담장이나 장애물로 별도 구획하지 않고, 외부와 마을을 향하여 열어 놓은 것이다. 간혹, 담장이 후에 철거되어, 사랑채가 외부로 드러나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여기서는 처음부터 바깥세상과 경계를 만들지 않았다. 이 마당의 성격을 한국종합예술학교 김봉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위치뿐 아니라 주택의 구성도 향리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 비록 마을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조성했고, 석가산과 우물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물을 두지 않았고,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했다. 네모난 연못은 향교 앞까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 되었다기 보다는 노성면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향교에 오는 참배객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안채만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은 과감히 향리에 공개하고 있다. 향리의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구성이다.

 윤증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강요된 위세가 아니라, 윤증이 평소에 주력했던 향촌민의 교화와 보살핌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카리스마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향촌에 공개해도 부끄럽거나 감출 것이 없다는 철저한 예학자적 자신감의 결과일 것이다.“ (앎과 삶의 공간 - 이상건축)

 

 

 

단아한 사랑채와 마을에 개방된 넓은 사랑마당 (2005.11.)

 

 

 두 번째는, 선비의 집으로서 소박한 규모에 있다. 선교장과 비교하면 3분의 1, 일반 사대부집과 비교하면 반 정도의 규모이다. 고작, 예의를 지키며 살 수 있을 정도의 살림집으로, 절제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살았던, 예학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검박한 집의 규모가 고결한 그의 인품을, 백 마디 말보다 직접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안채로 통하는 안행랑채의 대문에 설치된 내외벽에 있다. 내외벽은 내밀한 안채의 표정이 일시에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아주는 시선 차단용 가벽이다. 벽체가 아닌 독립된 담장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점은 서양 화장실처럼 밑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이 개구부를 통해 드러난 방문객의 발은, 손님을 맞는 안주인에게, 시간적 여유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시야를 막아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고, 외부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생활의 지혜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밑이뚫여 있는 안채 내외벽 (2011.03.)

 

사랑채 기단 끝에 조성된 미니어처 석가산 (2005.11.)

 

 

 네 번째는 사랑채 기단 위의 석가산에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인지조차 힘든 미니어처 금강산이다.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서 눈을 들어, 멀리 계룡산의 영봉들을 훑어 내려오면 끝자락에 마을이 나오고, 배롱나무 우거진 연못이 나오고, 누마루 앞에는 일만 이천봉 금강산이 펼쳐진다. 사랑채에 걸린 ‘도원인가桃源人家’ 편액처럼, 스무 개 남짓한 수석으로 정신속의 무릉도원을 이루어내었다.

 

 다섯 번째는, 사랑방과 뒷방을 연결하는 문 - 안고지기 - 미닫이.여닫이 문이다. 네 짝의 문 중에서, 먼저 가운데 두 짝을 미닫이로 열고, 다시 두짝씩 포개진 문을,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로 각각 여닫이로 연다. 직접 보기 전에는 이해가 쉽지않은,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디어 상품이다. 문지방이 문짝과 같이 여닫혀야 하므로 문지방이 잘라져 있고, 문짝에는 정첩이 붙어있다. 뒤틀어지는 목재의 성질까지 감안한다면, 웬만한 목수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명품이다.

 

 

 

주진입부의 정면 전경 (2005.11.)

 

건너방 뒤쪽의 작은 후원, 시집살이 하는 며느리를 배려한 공간이다 (2004.12.)

 

사랑채 측면과 안채 연결 부위 전경 (2005.11.)

 

 

 

 선생이 집안의 담장을 없애는 대신 주변에 매화나무,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청백전가」라는 현액을 높이 건, 대학자로서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명재 선생은 살아생전에도 노성면 일대의 윤씨 집안 사람들에게 "윤씨들은 절대로 누에를 치지 마라!"고 엄명을 내린 적이 있다. 누에를 치는 양잠업은 당시 고소득 업종이었는데, 부자 양반인 윤씨들이 양잠에

진출하게 되면,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살 것이 없어진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서민들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은 양반이 해서는 아니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이래로 명재 후손들은 양잠을

일절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요즘에 문제가 되는 것이 지방 소도시까지 진출하고 있는 '기업형 수퍼'이다. 한국의 구멍가게 주인들 전체가 생존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인심을 잃게 된다. 기업도 인심을 잃으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 (자료-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사랑채 우측의 텃밭 (2005.11.)

 

사랑채 우측의 텃밭이 간장독으로 덮혔다 (2011.03.)

 

 

 근래에 명재고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의 12대 종손은, ‘한국 고택문화재 소유자 협의회’를 만들어 고택을 수리하고, 종가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찻집으로 운영되던 고택입구의 건물을 ‘작은 도서관’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그곳에서 우리문화와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집안의 간장을 상품화해서 ‘교동간장’을 만들었다. 고택도 지켜내고, 장독문화도 보존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한다.

 뒷마당에 있는 수백 개는 됨직한 장독대 속의 간장은, 300여 년간 항아리 채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전독간장 이라 불려지고, 노서(명재 선생의 아버지) 종가만의 전통법으로 전수되는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노성천에서 나오는 민물게는 옛날에 임금님께 진상하던 것으로, 이곳의 간장게장은 종가뿐 아니라 노성면의 자랑이다.

 

 

 

고택의 사계 (자료-노서종택 홈페이지)

 

 

명재선생을 모신 유봉영당, 노성향교, 문중 사설교육기관인 강학당 전경 (2011.03.)

 

 

 

 

 정신문화는 퇴색하고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책임과 의무감 하나로 버텨 내야만 한다. 종손, 종부라는 이름으로......

새삼, 한남대 한필원 교수의 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윤증선생 고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반 주택으로서 전통한옥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주택 디자인의 치밀한 방법과 풍부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교과서와 같은 건축이다.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은, 윤증선생 고택이 오늘까지 그토록 정결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데는 그곳에 거주하는 두 분 종부의 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방문한 이 한옥의 대청은 언제나 깔끔하게 치워져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졌다. 오늘날 이 아름다운 한옥이 건축의 역사와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되고 있는 사실의 이면에는, 조상의 터전에 대한 고결한 자부심과 교육적인 배려까지 갖춘 두 분의 노력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끝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우리가 ‘윤증고택’이라고 불러온 이 고택에, 사실 윤증 선생은 거처하지 않았다 한다. 이 집은 선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제와 제자들이 힘을 합하여 지었지만, 선생은 ‘자기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다’ 며 들어와 살지 않았다 한다.

선생이 실제 살았던 고택은, 현재 노성면 병사리의 유봉영당酉峯影堂자리에 있었던 초가삼간이었으며, 그곳에서 평생을 기거하다 돌아가셨는데, 자신의 묘비에 다만 ‘착한 선비’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한다.

 

 

 

                                                                                      20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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