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1. 강릉 선교장 - 경포호의 달 뜨는 장원

 

 

 

  흰머리가 점점 늘어갈수록, 애들이 부쩍 커서 점점 멀어질수록

옛날을 자주 뒤돌아보게 되고,

우리의 옛 것과 고결하게 살다 간 선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난다.

 

 서양에 기사도정신, 일본에 사무라이정신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선비정신이 있었다.

그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주거공간인 한옥에 대한 관심은, 건축을 하는 나로서는 뒤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바람난 미친년처럼 전국을 쏘아 다니며,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한옥들을 눈에 담아 두었다.

 

 주옥같은 한옥명품 중에서, 마침 때 이른 무더위로 바다가 절로 그리워지는지라, 해수욕장의 대명사 강릉 경포대 입구에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흔 아홉 칸의 사대부집, 강릉 선교장을 먼저 소개한다.  

 

 

 

 

 

 

 

 

 

 

 

 

     

 

             01. 강릉 선교장船橋莊

 

            - 경포호의 달 뜨는 장원莊園 -

 

 

 

  아흔아홉 굽이 태백준령, 구름 걸린 대관령을 넘어서면, 문화의 고장이자, 동해의 관문인 강릉이다. 예로부터 이 곳은, 울고 왔다가 울고 떠난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험준한 대관령을 울며 넘어왔다가, 따뜻한 인정 때문에 또다시 울며 헤어지게 되는, 드넓은 바다를 닮은 이곳의 인심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대관령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동해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거울처럼 맑은 경포호를 빗어 놓았다. 경포대 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관동팔경 중 제1경인 경포호는, 5개의 달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호수이다.

 

그 하나는 하늘에 뜬 달, 둘은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 셋은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 넷은 벗과 마시는 술잔 속에 뜬 달, 다섯은 벗(님)의 눈동자에 깃든 달이 있는 정감어린 호수이다.

 

 

 

  

 

 

 

 1700년 무렵, 경포호 둘레가 지금보다 3배나 더 넓었던 시절 (약 12km)

효령대군 11세손 가선대부 이내번은 경포호변의 족제비가 점지해준 땅, 배다리 마을(船橋里)에, 노송이 우거진 시루봉 산줄기를 배경으로 선교장船橋莊의 터를 닦았다.

 

 그 후, 손자인 이후, 이근우를 거쳐서, 3만 평의 부지에 건물 10동, 총 120여 칸의 거대한 장원의 완성을 보게 되었고, 9대에 걸쳐 240년간 유지되어온 종가로서, 규모나 내용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한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민간주택으로는 국내 최초로 국가지정 문화재(1967년,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등록된 고택, 고건축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고택으로, 선교장은 항상 세인들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선교장의 조영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일반적인 정형화 된 구성방식에 얽메이지 않고,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구성으로 펼쳐서 배치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그래서 담장을 대신하는 전면 23칸의 아주 긴 문간채가 생겼다.

 

 집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경포호쪽을 피하고 배다리골 내부를 향하도록 서남향으로 돌려서 앉혔다. 전망보다는, 전면이 너무 열리는 것을 경계한 풍수지리설의 결과로 생각된다.

 

 장원의 규모를 대변하고 있는 문간채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과 평대문, 각각 2개의 대문이 일직선상에 있다. 솟을대문은 사랑채와 서별당이 있는 서쪽의 접객용 공간으로 연결되고, 내외벽이 있는 평대문은 안채와 동별당이 있는 동쪽의 가족용 공간으로 통한다. 대문이 2개인 경우는 한옥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데, 안채 가족들의 편리를 위한 큰 배려로 보인다.

 

 

 

 

 

 

 

 

 

  

 

 

 열화당悅話堂은 선교장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 손님을 맞이하는 큰사랑채이다.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친척들과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온갖 시름을 잊고 살리라.

 

 

에서 따온 글로, 욕심부리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소박하게 살고싶은 심경이 잘 담겨있다.

 

 

 

 열화당의 구조는, 기단은 잘 다듬은 3단의 장대석으로 돌렸고,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거의 일자형의 평면으로, 오른쪽 끝의 작은대청은 약간 돌출되어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청마루의 T 자형 대들보는, 다른데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이고, 벽체가 모두 문짝으로 구성되어 여름철에는 완전 개방이 가능하다. 특히 전면의 이국적인 차양은 연경당 선향재의 것과 모양이 비슷한데, 러시아 공사관 사람들이 선교장에서 신세를 진 후, 선물로 지어 준 것이라 한다.

 

 열화당 오른쪽의 서별당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완충공간으로서, 서재로 쓰인다. 서고는 누마루 구조로, 통풍과 서책의 보관이 용이하도록 했고 대청 좌우에 방을 두었다. 서별당 앞의 ㄴ자형 행랑채인 연지당은, 여자 하인들이 기거하며 집안일과, 열화당 쪽 손님들의 시중을 들던 곳으로 보인다.

 

 연지당 우측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앞쪽으로 동별당이 있고 뒤쪽으로 높은 기단위에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평대문을 통해서 바로 진입했을 때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안채는 선교장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고, 서민적인 성격을 띤 건물로, 좌측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의 순서로 이어지고 전면에 툇마루를 둘렀다. 각 방마다 반침이 딸려있어 살림도구를 넣어둘 수 있게 되어있고, 상당히 넓은 부엌은 당시의 살림규모를 말해준다. 현재, 주인은 바깥 별채에 살고있고, 안채는 세간이며 생활유품등의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동별당은 가족과 친척들의 휴식처로, 선교장 동쪽 끝에 있으며 안채의 부엌과 연결된 ㄱ 자형의 건물이다. 3개의 온돌방이 있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둘렀다.

 

 

 

 

 

 

 

 

 선교장의 주변으로는 수백 년 된 금강송이 집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고,

경포호를 안고 있는 넓은 들은, 계절마다 신선이 사는 장원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선교장가의 후손인 이기서 교수는 그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일컫는다면 선교장을 사계의 장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넘쳐 출렁이고, 그 물 위를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면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안채 뒤 대밭에 죽순이 움트고, 매화가 그 짙은 자태를 드러내며, 못엔 연잎의 싹이 트고, 활래정 뒷산에 오죽순烏竹筍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이곳 골짜기는 한겨울의 동면으로부터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앞 냇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버들개지가 움트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술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노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온 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와 쓰르라미 소리로 한결 여름은 짙어 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연꽃봉오리가 솟고 꽃봉오리가 터지면 활래정 누마루엔 술자리가 벌어진다. 활래정의 정취에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땐 으레 시서화가 곁들였다. 비오는 날, 연잎에 듣는 빗소리, 연잎에 괸 물이 쏟아지는 소리 역시 문객의 시정을 일게 한다......"(강릉 선교장 - 열화당)

 

 

 

 

 

 

 

 

 

 

 활래정活來亭은 선교장 입구의 장방형 인공 연못에 세운 정자이다.

연못 속에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수면위로 끌어들인 누각 형식의

ㄱ자형 건물로, 물위의 외별당 사랑채라고 할 수 있겠다. 누마루와 온돌방을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접객을 위한 다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서, 연꽃 속에 넣어 두었던 녹차를 꺼내 손님에게 대접하던 다정茶亭으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연못의 중앙에는 원형의 섬을 만들고, 노송과 수석, 꽃나무를 심어 이상향을 표현했다.

 

 연꽃이 필 때, 홍련이 짙은 자태를 드러내 뽐낼 무렵, 연못을 가득 채운 푸른 연잎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활래정에서,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낮잠이라도 즐긴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조선시대의 은거하였던 선비의 멋스러움과 한국 상류주택의 너그러운 품성이 함께 배어 있는 선교장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선교장을 둘러싼 눈 덮인 노송위에 때때로 학이라도 찾아오면 은둔하는 선비와 학과 푸른 소나무는 함께 어우러져 이곳을 신선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선교장을 하나의 건축물로서 평가하기에는 건축문화 내면에 있는 지역문화의 중심적 구심체로서의 역할은 너무나 크다. 번창하였던 영동 제일, 그 공간에 현재의 우리가 와서 바라볼 때, 그들이 걸었고 생활하였던 그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선교장 식구가 잠시 되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안채, 서별당, 활래정을 걸어가며 그 문화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강릉 선교장 - 열화당)

 

 

 

 

 

 

 

 

 

 

 근래에, 선교장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관광지로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이다. 길 건너편에 대형 주차장이 완비되고, 주위로 새로운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집터 외곽으로는 펜스를 설치해  입장료를 징수한다.

 시대의 흐름이자, 효율적인 관리와 보전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불과 수년전만 하더라도, 관동제일의 대지주집으로서, 문전옥답과 농경문화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삶의 내용은 희미해지고 껍데기 건물만 남은 느낌이 든다.

    

 그 옛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었던 경포호도 많이 매립되어서,

이제 선교장에서 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달 밝은 밤이면 경포호에서 활래정으로 이어지던 달기둥도 이젠 상상으로만 남았다.

                                                                                     

 

                                                        

 

   

                                                                                           2007.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