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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2. 구례 운조루 - 나누며 산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사진출처:문화재청)

 

 

 

 

 

             02. 구례   운조루 雲鳥樓

 

 

           - 나누며 산다 -

 

 

 

  해마다 매화와 산수유 꽃망울로 남도의 첫 봄소식이 들려올 때면 꼭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

산청의 남사마을과 단속사, 순천의 선암사와 금둔사 그리고 구례의 화엄사를 한바퀴 도는 매화梅花여행 코스로서, 근처의 운조루를 들리고 곡성에서 하동포구까지 이어지는 섬진강변 백리 길을 노을 속에서 돌아오는 환상적인 일정인데, 생각은 간절했으나 올 해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바쁘다는 것은 핑계에 가깝고 열정이 부족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때는 지났지만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카메라를 챙겨들고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남사마을, 선암사와 송광사는 언제 들러도 변함없이 좋은, 짜임새 있고 정겹고 분위기 있는 우리의 전통

마을과 절집이다.

아무리 고도의 기술, 정보화 사회로 발전되더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길을 나설 때마다 하게 된다.

 오랜만에 들린 화엄사는 계속되는 대규모 신축불사로 인해서 호젓한 산사로서의 배치와 멋을 잃고 갈수록 세속화되는 것 같아 낮설게 느껴진다.

가난한 절(선암사)과 부자 절(화엄사)의 차이를 한눈으로 느낄 수 있는데, 비록 규모는 작으나 절을 세울 당시의 모습과 정신을 잘 간직하여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사로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선암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나 싶다.

 

 

 마지막으로 그날의 최종 목적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흔 아홉 칸 사대부집, 구례 운조루를 2년 만에 들렀다.

 

 

 

 

                                                          진입부의 연못과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 (2010.05.05)

 

 

  

 

 

 지리산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가 섬진강 줄기와 만나 만들어낸 기름진 평야 구례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살만한 곳’으로 꼽았을 정도로 지리적 혜택이 뛰어난 고장인데,

구례 시내에서 경남 하동 쪽으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토지면 오미리의 넓은 들, 구만들을 만난다. 이 구만들 일대는 금환락지金環落地,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吉地중 하나라 알려져 왔다.

 구례를 이야기하자면 풍수지리사상을 피해갈 수가 없다.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 잡은 구례 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혹자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한다.

「 택리지 」에서는

“구만들은 모든 계촌溪村과 비교하면 생리가 더욱 넉넉하다. 다만 남해에 가까워서 물과 흙이 이북의 마을보다 못하다. 지리와 생기가 모두 극히 아름다워서, 도산, 하회에 비하면 더욱 훌륭하나, 고개嶺에서 떨어진 거리가 약간 멀어 전쟁이 나면 피하는데 불리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좌측의 큰사랑채와 우측의 아랫사랑채 (2010.05.05)

 

 

 

 

 

 누구나 명당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이곳에,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낸 삼수공 유이주 선생이 운조루雲鳥樓를 창건하였다. 삼수공은 남한산성 보수와 수원 화성 축조에 관여한 건축에 능통했던 무관인데,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 건설시,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느냐고 신하들이 물으니, 정조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느니라!” 라고.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 출토되었다. 이를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여기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1989년 집에서 도난당했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두 글자를 취했는데, ‘구름 속의 새처럼 높은 이상을 품고 은거하는 집’이라는 해석이 어울릴 것이다.

 운조루는 창건 당시의 설계도와 같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라는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원래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좌측의 안채 대청과 우측의 다락방 및 발코니 (2010.05.05)

 

 

  

 

 

 건물의 전체구성은 ㅡ 자형 행랑채, T 자형 큰사랑채, ㅁ 자형 안채, 안사랑채가 연이어져 있고 동북쪽에 별도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나, 그림속의 안사랑채와 행랑채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랑채는 큰사랑, 아랫사랑으로 나누어지고, 큰사랑채 서쪽 끝에는 세 방향이 트인 누마루 운조루와 대청, 온돌방이 있고, 누마루에 앉으면 행랑채 지붕 너머로 안산인 오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큰사랑채에 잇대어 대문쪽으로 뻗은 아랫사랑채에도 누마루가 있어 귀래정이라 하였다.

대문에서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가는 통로를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처리한 것이 특이한 점인데, 수레의 통행이나 짐의 운반을 용이하게 하는 실용주의 정신의 산물로 보인다.

 안채는 중문을 통하여 사랑채와 연이어져 있고, 안방과 대청, 건넌방, 다락, 곳간 등으로 구성된다. 네모반듯한 마당 아래쪽에는 부농의 살림규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독대가 있고, 큰부엌 앞에는 수조와 맷돌이 정겹게 남아 있다.

 

 운조루 평면형의 특이점을 건축학자 정인국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평면형은 ㅁ 자형에 사랑채가 연접한 형이며 사랑채가 양진당에서는 북쪽으로, 충효당에서는 남쪽으로 연접하였는데, 여기서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운조루의 평면상 특징은 일반형과는 다른 여러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1) 사랑채 구성이 궁전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형식을 취하고 , 여기에 다시 일반대 청이 연접하여 있다.

 

2)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여기서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 되어 있다.

 

3) 본사랑채와 직교하여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관찰하도록 하였다. (출처: 한국건축양식론-일지사)

 

 

 

                                                            좌측의 큰사랑채 운조루와 조촐한 정원 (2010.05.05)

 

 

                                                         담장너머에서 본 좌측의 큰사랑채와 우측의 솟을대문 (2010.05.05)

 

 

  

 

 

 전반적으로 운조루의 배치구조는 유교적 사고체계에 의한 공간의 위계성 및 구심점이 잘 드러나 있고, 공간의 연계성도 중문간과 샛문 등의 설치로 그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운조루는 호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고, 생활용품 등 유물사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인 의미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운조루의 진정한 가치는 빼어난 건축물과 아울러, 류씨 집안의 철학과 정신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운조루를 대표하는 철학은 곳간채의 쌀뒤주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안채로 통하는 부엌에 옮겨 놓은, 이 뒤주에는 하단부에 가로 5cm, 세로 10cm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즉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 는 뜻으로, 누구라도 와서 마음대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는데, 주변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주인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곡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나눔’을 고민한 아름다운 유물 인 것이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은 보통 한두 되.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하여 몽땅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는 선비 가문의 배려가 있었고, 가난해도 불문율과 염치를 아는 백성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가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하였다. 뒤주 1통에 들어가는 쌀의 용량은 두 가마 반으로, 1년에 30가마가 들어가니, 1년 소출의 약 20%가 지출되는 셈이다. 이 집의 주인은 월말이면 쌀뒤주를 체크하여, “ 항상 그믐날에는 뒤주에 쌀이 남아있지 않도록 하라! ” 는 당부를 며느리에게 잊지 않았다 한다.

 

 

 생활의 일부분으로 몸에 밴, 운조루의 철학 및 적선정신積善精神의 일화가 몇가지 더 전해져 내려 온다.

하루 세 끼를 다 챙기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하고 연기가 담장을 넘지 않도록 배려하여, 끼니를 거르는 이웃사람들의 가난한 마음까지도 챙겼고,

운조루의 바깥어른은, 추수철에 마당에 널어놓은 콩이 밤새 조금 조금씩 사라져도, 소피까지 참으면서까지 결코 밖을 내다보지 않았고, 하인들이 별도로 챙겨 둔 보따리는 알고도 모른 척하라고, 오히려 가족들을 단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느리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출가외인’으로 시집와서 평생 바깥출입을 못하고 사는 며느리를 위하여 작은방위에 다락방을 만들고 큰 창과 발코니를 두어 거기서나마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여 며느리 사랑도 잊지 않았다.

 운조루의 안주인은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살았더란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배고픈 사람들을 챙겨주다 보면, 정작 마님은 때를 놓쳐서 물 한그릇으로 대신할 경우도 많았다 한다.

 

 

 

 

                                                        타인능해가 적혀있는 뒤주(2010.05.05)  

 

 

                                              좌측의 낮은 굴뚝과 뒷뜰(2010.05.05)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과 가진 자의 책임내지는 솔선수범’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행위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동국대 조용헌 교수는 「명문가 이야기」에서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로마 천 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다고 한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그렇다.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 (명문가 이야기 - 푸른역사)

 

 얼마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케이츠가, 자기 재산의 70%를 자선단체에 내놓았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세계 최고의 멋쟁이 아닌가!

 자수성가하여 이룩한 부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영원히 지키는 사랑을 실천한 현명한 결정이다.

가정이나 기업에서 나눔과 배품의 실천이 수성守成의 기본임은 동서고금의 변치 않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운조루가, 동학과 여순사건, 6.25와 빨치산 등 역사적 소용돌이 현장의 한가운데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했으면서도 불타서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명당에 자리를 잡아서가 아니라,

수대에 걸쳐 실천하고 지켜온 운조루의 철학 - 뒤주(타인능해)와 낮은 굴뚝 때문이었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10. 06.

 

 

 

                                                    안채마당의 수조.맷돌과 장독대 (200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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