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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5. 양동마을 향단 - 주거양식의 개성과 다양성

 

 

 

    관가정에서 담장너머로 바라본 향단의모습

 

 

 

 

 

 

        05. 양동마을  향단香壇

 

     - 주거공간의 개성과 다양성 -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민속마을로, 경주시 강동면에 월성 양동 마을이 있다.

 경주시에서 포항 쪽으로 약 20KM 떨어져서, 6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씨족마을이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 앞을 지나고, 마을 서쪽의 넓은

안강평야와, 북동쪽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한계저수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부분이 많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마을이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단일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두 씨족이 동거하는 집성촌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월성 손씨가 입향入鄕하여 이룬 터전에, 여주 이씨가 장가와서 양대 문벌을 이루고 그들만의 동족마을로 계승하여왔다.

 

 

 

 

 

 좌측 산등성이에 관가정이 보이고 우측의 향단 전경 (2005. 01.)

 

 향단 전경 (2006. 10.)

 

 관가정에서 바라본 향단의 전경 (2006. 10.)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觀幏亭과 향단香壇이 위치한다.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하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그 아래로 자손들이 분가해서 살았다. 가옥의 규모는 내려올수록 작으며, 맨 아래에는 외거노비가 살던 가랍집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문중내의 위계를 반영한 것이며,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공간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총 160여호의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

 

 

 마을입구 좌측 산등성이 초입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향단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로 있을 무렵 임금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한다.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 낙향하는 신하를 배려하여 중종임금이 고향에 집을 하사하였고, 그 뒤 선생이 다른 곳으로 전임하면서 동생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동생 농재 선생의 손자인 이의주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는 당호가 붙여졌다 한다.

 

 일반적으로 향단은, 손씨 문중의 관가정에 대응하고, 외척인 이씨 가문의 입지를 높이고자, 회재 선생이 불가피하게 선택한 건축적 과시의 결과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외견부터가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서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디자인하여, 권위적이고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두개의 박공면이 돋보이는 향단의 사랑채모습 (2005. 01.)

 

 향단의 사랑채모습 (2006. 10.)

 

 향단의 사랑채와 중문 모습 (2006. 10.)

 

 향단의 3개의 박공지붕이 연출하는 당당한 모습 (2006. 10.)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풍수지리에 의거, 몸채는 ‘月’자형으로 하고, 여기에 ‘一’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用자형태를 띄게 되었다.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각각의 마당을 가지게 되므로서, 작은 중정中庭 두개가 있는 특색있는 구성이 완성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는 안마당으로 쓰이고, 안채 뒤편 노천 공간은 반빗간을 겸한 부엌 기능을 갖고 있다.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웠고, 마당은 극히 폐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맨 앞쪽에 가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 규모로 우측에서 두 번째 칸에 대문을 내었다.

 대문채 뒤편에는 골목 같은 비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근접해 있는데 비해 사랑채는 조금 뒤로 물러앉아 있다. 이로 인해 행랑채의 지붕이 안채를 가로막게 된다. 이는 안채가 다른 집과 달리 앞쪽에 바짝 배치됨에 따라서, 여성공간의 은폐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안채는 안대청을 가로로 길게 놓고 안방과 건너방을 엇갈리게 앉힌 독특한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안대청의 사랑채 쪽에는 내외 구분을 위한 창호가 설치된 벽체로 막혀 있고 나머지는 개방되어 있다. 사랑채는 가운데 사랑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지붕의 박공 및 기둥의 초익공과 복화반 등 장식적 요소를 가미하여 위풍당당한 모습이 되었다.

 

 

 

 

 안채마당. 2칸 x 2칸으로 작지만 답답하지 않고 아늑하다. (2005. 01.)

 

  안채마당에서 본 안채대청과 전망을 가린 행랑채의 지붕모습 (2005.01.)

 

 안채대청에서 행랑채의 지붕너머로 관가정이 얼핏 보인다. (2006. 10.)

 

 안방 내부 (2006. 10.)

 

 

 

 

 

 향단은 양동마을의 무첨당, 관가정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주거용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향단의 가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 있다.

 

“ 이 집에 사용된 몇 개의 요소들은 전혀 엉뚱한 건축유형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부엌마당의 기능과 공간적 관계를 동시에 얻기 위해 고안된 2층 창고는 사찰의 요사채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를 도입해 적절한 스케일로 변형 시켰다. 사랑채 정면에 부각된 박공면 역시 서원이나 향교건축에서 사용하던 형태요소이다, 건축적 의도와 실현을 위해서는 그것이 사찰에 쓰였던 것이건 서원에 쓰였던 것이건 간에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변형 할 수 있었다. 규범을 무시하고 인습을 거부한 이런 건축적 대담함이 없었다면, 향단의 개성과 낭만성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이 집에 살았던 여인들의 사정만 모른 척 한다면, 향단은 정말 대단한 건축이다.” ( 김봉렬. 시대를 담는 그릇. 돌베게 )

 

 

 양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재 선생이 안강 옥산리에서 은거하던 시절에 지은 별서주택 독락당이 있다. 향단과 더불어 둘 다 선생의 작품이지만, 주거양식에 대해서 상당히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어 좋은 비교거리가 된다.

 독락당은 자옥산 계곡의 운치있는 대지조건에서, 각 건물들이 서로 독자적인 영역을 설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반해 향단은 안채를 좌측에 두고 사랑채가 동쪽을 향해 돌아앉은 듯이 되어 있어, 구조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기능상으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자기만의 독자적인 공간 구조를 갖는 폐쇄적인 배치를 취하고 있다. 비록 건축시기와 환경의 차이가 있었지만, 상당히 대조적이고 각기 개성이 뚜렷한 회재선생의 주택 작품들이다.

 아무튼, 회재선생의 야심작, 향단은 상류주택의 틀에 박힌 일반적 형태와는 달리,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도, 합리적이고 집약된 공간배치 및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건축형식에 있어서도 특이한 기법들이 많아서, 우수한 주택으로 후대에 평가를 받고 있다.

 

 

 

 

 높게 자리잡은 사랑채 모습 (2006. 10.)

 

 안채마당에서 올려다 본 사각형 하늘모습 (2006. 10.)

 

 폐쇄적인 구조로 여인들의 한숨소리가 들릴 듯한 안채 대청 (2005.01.)

 

 

 

 

 

 조선시대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최대 규모의 양반 고장 양동마을도, 현대로 넘어 오면서 600∼700채가 되었던 마을이 300 여채로 줄어들었고, 6.25전쟁을 계기로 1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줄고, 도시화와 현대화로 인해 그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양동마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좋은 일이 있었다. 양동마을의 긍지이자 자부심이고, 나라의 경사이다. 체계적인 관리와 지원의 길은 열린 듯하나,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한 마을의 주거환경 훼손과 주민들 사생활의 침해는, 향후 풀어야 할 만만치 않은 숙제이다. 마을과 집은 그대로이나, 원주민의 삶이 실종되어 버린 듯한, 안동 하회마을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세계의 보물, 양동마을을 지키고 보존해 나가는 막중한 책임은, 600년을 지켜온 양동마을 주민들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관광객인 우리의 몫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시대의 풍운아이자 건축가인, 회재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20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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