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03. 남원 몽심재 - 더불어 산다

 

 

 

                                                                중문채에서 바라본 안채 (2005.01.)

 

 

 

 

 

 

       03. 남원 몽심재夢心齋

 

 

    - 더불어 산다 -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 방면으로 달리다 범재터널을 통과하여 얼마 가지 않아, 오른

쪽으로 갈라지는 60번 지방도로를 만난다. 이 분기점으로 내려서서 낮은 고개를 넘으면 저수지가 보이고, 곧이어 수지면 호곡리 수지초등학교 건너 편에, 일명 홈실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의 탄생에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 송암 박문수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뜻을 같이하는 72명의 고려 중신들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이때 부인에게, 고향으로 내려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이 끊기지 않게 하라고 당부를 했다. 그래서 박문수선생의 부인이 낙향하여 살게 된 곳이 바로 홈실마을이며, 이후 번창하여 죽산 박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측이 몽심재이고 우측은 삼강문이 있는 종가집 (2005.01.)

 

                                몽심재 전경 (2005.01.)

 

                                                         

 

  

 죽산 박씨 종가집 대문에는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삼강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종가 오른쪽으로는 중시조인 박문수선생의 불천위 사당이 자리 잡고 있고, 왼편으로는 종가에서 분가한 박문수의 16대손 연당 박동식의 고택, 몽심재夢心齋가 있다.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몽심재인 것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불천위 사당 주련에는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이라는 글씨가 선명한데, 박문수 선생이 포은 정몽주 선생에게 보낸 시로, 도연명과 백이, 숙제의 절개와 지조를 노래하고 있다.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란 내용인데, 이 시의 첫줄 끝 자인 몽(夢) 자와 둘째 줄 끝 자인 심(心) 자를 따서 몽심재 라고 했다.

 

 옛 주인에 대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수 백 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후손의 자긍심으로 다시 태어나서 바로 몽심재의 어원이 된 것이다.

 

 

 

 

                                                                                    연못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중문채 (2005.01.)

 

                                                                                           연못에서 바라본 요요정 전경 (2005.01.)

 

 

 

 

 마을을 거쳐서, 조그만한 개울을 끼고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솟을 대문이 한걸음 물러서 있어 돌각담이 있는 대문채를 만난다. 집터는 700여 평의 좌우로 좁은 대지에,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경사가 매우 심한 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정면에는, 높은 축대를 쌓아 자형 사랑채와 중문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뒤를 돌아보면 큰 바위에 가려진 연당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축대를 돌아 우측으로 길게 난 계단을 따라가면, ㄷ 자형 안채영역이 비스듬히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사랑채 배면과 안채 월대 사이로 난 안마당을 건너 지르면 서쪽에 있는 정지와 광채로 갈 수 있다. 또 그 뒤로는 텃밭이 있고, 위쪽에는 대숲이 잘 가꾸어져있다.

 

 각 건물별로 살펴보면, 대문간채는 서쪽에 마루를 깔고 동쪽으로는 방두칸과 마루 한칸의 정자를 같이 만들어 놓았다. 앞에 있는 큰 바위를 경계로 식재를 하고, 연못까지 만들어 운치있는 구성이다. 일반 가옥에서 보는 대문간채가 행랑채인 것과는 너무나 다른 독특한 배치이다.

 사랑채 동편에는 중문채가 있는데, 문짝은 가운데 칸에 달려있고, 문 앞의 경사진 부분은 돌계단을 설치하여 단처리를 대신했다. 계단을 오를때 사랑채 측면과 안채 다락을 전경으로 보면서 올라와, 안마당으로 가기전의 작은 뜰을 볼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높은 터에 ㄷ자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양쪽 날개사이에 열린 중앙부분은 월대를 구성하듯이 돌을 쌓아, 경사진 부분에서 초래되는 약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전면 6칸으로 안방은 단칸으로 구성되어 다소 협소한 느낌이 든다. 날개 앞쪽은 이층 다락으로 활용하였고 이는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피하는 역할을 해준다.

 곡간채는 옆집인 박천식씨 가옥의 담사이 중앙부에 세워져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박천식가옥과 앞 뒤 반반 나누어 쓰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드문 경우이기도 하고 흐뭇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안채 전경 (2005.01.)

 

                                                                                                                    안채 전경 (2005.01.)

 

                                                                  사랑채(몽심재) 부분 (2005.01.)

 

 

 

 몽심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사랑채는 다섯 단이나 되는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아, 넓은 마당이 없었다면 상당히 위압감을 느끼될 수 있는 구조이다. 호남지방에서는 유례가 드물고, 나라에서 3단 이상의 높은 기단을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도, 그만큼 높아진 것은 풍수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게 동국대 조용헌 교수의 해석이다.

 몽심재의 행랑채 바로 앞에는 낮으막한 산등성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풍수상 안대가 바로 앞을 가로막아서 답답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집 풍수의 문제점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랑채의 기단을 높혀서, 안대와의 높이를 맞추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울러, 몽심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간채 끝부분의 정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몽심재는 건축구조에서 다른 고택들과 구별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인들을 위한 배려에서 잘 나타난다. 대문을 마주보았을 때 대문 좌우측으로는 문간채가 설치되어 있다. 문간채는 대문 옆에 붙어 있는 방이기 때문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몽심재는 대문의 오른쪽 문간채에 대청이 한 칸 더 설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가로 세로 3m 크기의 대청인데, 난간 손잡이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정자와 같은 형태다.

 이 집에서는 문간채 옆의 이 정자를 ‘요요정樂樂亭’이라고 부른다. 요요정은 하인들의 휴식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조선시대 정자는 양반들만의 공간이었으므로 노비나 종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몽심재의 주인은 날씨가 더울 때 양반들만 정자에서 쉴 것이 아니라, 하인들도 자기들끼리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문간채 옆에 요요정을 만든 것이다.

 

 노비와 종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든 정자 요요정. 집주인의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문간채 옆에 아랫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정자를 설치한 고택은 몽심재가 전국에서 유일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이것이 수백 년간 집안을 유지시키는 원리이자 명문가의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명문가 이야기 - 푸른역사)

 

 

 

 

                              안채 측벽 부분 (2005.01.)

 

 

 

 

 이 고택은 홈실이라는 동족마을의 생성과, 시대에 따른 주거의 변형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주거 자체로도 충분한 연구 가치가 있다.

 가파른 경사지의 단에 의한 처리, 그리고 계단으로 유도하는 안채 동선과 그 사이의 공간분위기 역시 훌륭하다. 또 각 채가 가지는 여러 특징 - 사랑채의 긴 입면과 높은 단에서의 열린 전망, 안채가 가지는 특이하고 기능적인 평면배치와 정지영역의 유연한 흐름, 다락으로 만드는 입면의 개성, 그리고 연당과 바위가 만드는 정원조경 - 들이 몽심재가 이야기하는 표정들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이 집을 방문한 때는 새해 연휴 무렵이었다. 마침 전날 많은 눈이 내려, 온 집안이 하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집 주인은 보이지 않고, 눈부신 햇살만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요요정에 앉아서 사랑채를 올려다보았다.

두문동 72현賢 박문수 선생의 높은 지조와,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 요요정의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몽심재는 꿈꾸듯 눈 덮인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2008. 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