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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안동 계상서당 (2024. 04.)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1> 안동 계상서당

 

- 환경을 배려하고 생명을 중시한 퇴계 선생을 그리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위치한 계상서당은

퇴계종택 맞은 편에 위치해있다.

 

 

계상서당을 다시 찾아 나섰다.

지난 1998년 계상서당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서 초안 작성을 위해 방문한 후 4년 만이다.

계상서당이 복원한 뒤 이곳을 찾지 못한 터라 사뭇 기대에 차 있었다.

안동시청에 들러 손상락 학예연구원을 만나

계상서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로 차를 몰았다.

매미 소리 산천을 울리고 달구어진 아스팔트 아지랑이는

우리의 발목을 잡았지만 퇴계 선생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 있는

공간을 더듬는 일이라 걸음은 가벼웠다.

 

퇴계 선생은 알려진 대로 학자이면서 훌륭한 건축가였다.

당시 고 권오봉 교수의 자료를 토대로 기본계획서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퇴계 선생의 검소한 삶은 계상서당에 잘 표현되어 있었고

주변 환경에 대한 배려와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은

방당(方塘), 육우원(六友園) 등의 정원조성에도 나타났다.

계상서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이동수 박사를 통해

계상서당 복원과정의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이동수 박사는 퇴계의 후손으로 고 권오봉 교수와 함께

계상서당 복원사업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박하고 검소함이 퇴계 삶의 철학

 

퇴계 선생은 1501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어머니는 퇴계를 가진 후

성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종택의 솟을대문에 성림문(聖臨門)이라고 쓴 편액과

퇴계가 태어난 방에는 퇴계선생태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선생의 자는 경호이고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산인 등이 있다.

 

퇴계 선생은 첫째 부인인 허씨 부인과 결혼 후

종택에서 분가했다고 전해진다. 

분가 후 맏아들 준을 낳고 5년 동안 살다가

퇴계 선생의 넷째 형이 성균관으로 공부하기 위해 상경하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시 형님 집으로 둥지를 옮긴다.

형님 집에서 머무는 동안 허씨 부인과 결혼 7년 만에 사별을 하게 되고

퇴계 선생은 4년 동안 홀로 지내다가 30세에 새 장가를 간 후

이듬해에 온혜리의 남쪽 시냇가에 달팽이만 한 초막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 권씨 부인과 신혼기를 보냈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비록 달팽이만 한 초막 집이라도 몸을 누일 수 있고, 

아침저녁으로 멀리 산과 강을 보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후 퇴계 선생은 1546년 양진암을 짓는다.

양진암을 준공한 해에는 퇴계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장인인 권질이 세상을 떠나고 권씨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부인과의 사별로 낙심한 퇴계 선생은

방 한 칸에 퇴를 물리고 부엌은 조그맣게 거적을 달았다. 

권씨 부인과 사별한 이후부터 퇴계는 본격적인 제자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선생은 후학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자신의 희망과 달리

조정의 부름은 계속됐지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지금의 종택과 조금 떨어진 상계서쪽에 한서암(寒棲巖)을 지었다.

 

한서암은차고 누추한 곳에 깃들어 산다

퇴계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철학이 배여 있는 작은 집이다.

 이후 퇴계 선생은 동북쪽 터를 옮겨 1551년 조그마한 서당을 짓고

독서강학 하던 곳이 계상서당(溪上書堂)이다.

퇴계가 퇴거계상(退居溪上)’이라 하여 은퇴하여 계상(溪上)에 거처한 곳이

한서암과 계상서당이므로

이 때문에 현재 퇴계 종택 앞을 흘러내리는 계천 이름이

퇴계(退溪)가 되었고 호()가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대로 편안하나 / 身退安愚分 

배움은 퇴보하여 늦은 나이 근심스럽네 /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비로소 살 곳을 정하니 /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에 임하여 날로 반성함이 있으리 / 臨流日有省

(퇴계선생연보 제1)

 

 

 

 

 

 

 

 

溪上書堂계상서당

 

 

 

 

 

 

 

 

 

 

지금까지도 계상서당이 있는 퇴계의 위쪽을 상계(上溪)라 하고

동암옆 양진암이 있었던 마을을 하계(下溪)라 불리어지고 있다. 

계상서당은 하천가에 지어졌고 온돌이 없이

부들자리를 깔고 생활했다.

서당 앞에도 방당(方塘)을 파서 물고기를 키웠으며

정원은 육우원(六友園)이라 하여 송, , , 국 등을 심어

자신과 함께 벗을 삼았다. 

퇴계는 여기에서 도학을 강마하였다. 

특히 주자서를 탐독 관통하여 주자서절요를 저술하게 되었다.

 

퇴계가 낙향하여 한서암에 정착하게 되자

원근 각처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농암이 찾아주심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농암은 퇴계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퇴계의 아버지 역할을 한 삼촌인 송재 이우와 농암은 친구사이이자 

1498년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고, 

농암의 셋째 아들인 이중량 역시 친구였던 퇴계와 같은 해 동시에 과거 급제하여

 2대를 거치면서 우의를 다지게 되었다. 

여기에 퇴계의 아버지 역할을 담당했던 이우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리자

퇴계는 농암에게 의지하였고 농암은 퇴계를 친자처럼 아끼고

보살폈던 것이다.

 

 

 

 

 

 

 

溪齋 계재

 

 

 

 

 

 

 

 

율곡 이이와의 역사적 만남도 계상서당에서 이루어지는데

퇴계가 58, 율곡은 23세였을 때이다.

율곡은 성주목사로 있는 장인을 뵙고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퇴계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리고 3일을 머무르게 된다. 

당시 계천에 물이 불어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못하여서 3일을 지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율곡은 큰 스승을 만나 쉽게 헤어지기 싫었고, 

퇴계 역시 앞길이 창창한 젊은 벗을 쉽게 보내기 싫었을 것이다.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 간에 나눈 시에서

이들의 우의를 살필 수 있다.

 

율곡은 퇴계에게

 

시냇물은 수사(洙泗 공자가 살던 곳의 물 이름)의 갈래를 나누었고 / 溪分洙泗派 

봉우리는 빼어난 무이산(武夷山 주자가 거처하던 산의 이름) / 峰秀武夷山 

살아가는 계책은 천권의 경전이요 / 活計經千卷 

생애는 두어 칸의 초옥(草屋)이었다 / 生涯屋數間 

가슴속은 개인 달[霽月] 같이 열려 있고 / 襟懷開霽月 

담소하는 가운데 미친 물결을 막는도다 / 談笑止狂瀾 

소자(小子)는 도() 듣기를 원함이요 / 小子求聞道 

반일(半日)의 한가한 틈을 취함이 아닙니다 / 非偸半日間

 

 

퇴계가 답하길

내 병들어 문닫고 누워 봄을 보지 못했는데 / 病我牢關不見春 

그대가 이렇게 찾아 주니 심신이 상쾌하네 / 公來披豁醒心神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는데 / 始知名下無處士 

지난 날 나는 몸가짐도 제대로 못 해 부끄럽네 / 堪愧年前闕敬身 

좋은 곡식 밭에는 잡초가 무성할 수 없고 / 嘉穀莫容熟美 

새로 닦은 거울에는 티끌도 허락하지 않네 / 遊塵不許鏡磨新 

부질없는 얘기 모두 제쳐 놓고 / 過情詩語須刪去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 努力功夫各日親

 

퇴계는 나이 어린 율곡의 기개와 학문을 높이 칭찬하며

끝까지 이라 칭하였고

율곡은 퇴계를 진심 어린 스승으로 모셨다.

 



 

 

 

 

 

寒棲庵한서암

 

 

 

 

 

 

 

 

 

 

 

 

 

 

 

 

 

 

 

 

 

 

 

 

 

 

 퇴계와 율곡의 학문적 우의

 

 

한때 천원 지폐 뒷면의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를 두고

 계상서당이냐 도산서당이냐의 진위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필자는 당시 모 일간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와가로 그려진 점과

주변의 풍광을 견주어 도산서당이라고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이동수 박사의 주장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계상서당을 보고 그렸을 것으로 추론된다. 

 

다시 말해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도 계상정거도

분명 다른 그림이며 겸재가 강 건너편에서 계상서당을 그리기에는

너무 작아 표현하기 어려웠기에 카메라 촬영에 비유하자면

 줌인(zoom in)’의 기법을 사용하여 계상서당을 그린 것이라 판단된다. 

겸재는 퇴계가 계상서당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집필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다.

 

문화재 복원이란

그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연 환경적 상황 등을

최대한 반영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공간을 보고

그 시대의 상황과 인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구조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편리한 유지보수 차원의 해석으로 형식적인 건물만 만들어 놓고

운영할 프로그램은커녕 관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계상서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지금의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수준이다.

계상서당, 한서암, 계재 모두 자물쇠로 문은 잠겨 있고, 

마루엔 동물의 배설물과 먼지만 쌓여 있다. 

쌓인 먼지를 불어내고 계상서당 툇마루에 앉아 보았다. 

선생께서 아침저녁으로 멀리 산과 강을 보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나무와 숲으로 가려져 원경은 고사하고

가까이 있는 냇가를 보기에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다.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자칭한다. 

거기에 걸맞게 격을 높일 필요가 있다.

특히 안동은 유학의 본고장이요, 

도산은 유학의 성지로서, 퇴계 성현이 탄생하였고

그 정신과 철학에 걸맞은 모습을 기대해본다.

 

- 김경호 건축사·칼럼니스트

 

[이상 글출처]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1> 안동 계상서당|작성자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