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성주 수성리 중매댁 (2023.03.16.)

 

 

 

 

 

 

 

 

 

 

성주 수성리 중매댁

星州水成里中梅宅

 

 

문화재 지정 경상북도 시도민속문화재 제86

건립시기 1903

성격 주택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856

 

 

1989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재철(鄭在哲)1903(광무 7)에 지은 살림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고방채가 현존해 있다.

집이 완성되기까지 12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정황은 묵서된 상량기문에서 알 수 있는데,

안채·사랑채·대문간채는 1903년에 상량했고,

고방채는 1911년에 창건하고 이듬해에 중건(重建)했으며,

안대문채는 1915년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채는 면이 고운 화강석 다석켜의 높은 댓돌 위에

방형 주초에 모기둥을 세운 민도릿집이다.

평면 구성은 T자형인데 안방에 이어 찬방을 돌출시켜 변형이 생겼지만,

이 점이 이 집의 특색이라 하겠다.

대청 2, 좌측에 안방·부엌·찬방이,

우측엔 건넌방·갓방·작은 부엌 순으로 자리했다.

 

사랑채 평면은 2칸이 넘는 긴 부엌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통 사랑방과 마루가 계속되며

앞에 툇마루가 있고 뒤쪽으로는 뒷방과 툇마루가 있고

마루 우측 뒤로 반 칸 규모의 감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을 두어

사당 기능을 하게 하였다.

대신에 사당을 건립하지 않았다.

 

부엌 좌측엔 칸 반 규모의 중사랑방,

전면에 툇간(집채의 원칸살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붙여 지은 칸살),

반 칸 크기의 책방이 있어 부엌은 안마당 쪽으로만 개방되었다.

이로 인해 중문칸이 따로 생겼다.

 

부엌 앞쪽을 막은 예는 1905년에 건축된 둔산동 경주최씨 종가,

1920년경의 봉화 해저리 김씨댁 등의 건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900년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예라 할 수 있다.

 

고방채는 방형 4칸의 고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마구간과 뒤주가 각 1, 우측에 방앗간과 헛간이 있다.

판벽한 뒤주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고 주변에 돼지우리, 장작 쌓는 자리,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치는 나무 토막)

도끼들이 있어 옛 정취를 풍긴다.

 

우진각 지붕의 4칸 대문채는

대문칸의 우측에 행랑방 2, 좌측에 마구간 1칸이 있고

마구간 좌측 처마 밑으로 외측(外厠)이 있는데,

낮은 담으로 가려서 사랑채에서의 시선을 피하였다.

20세기 초의 살림집을 보여주는 한 예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참고문헌경상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경상북도, 198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매경춘추] 매화네 집

 

 

성주 수륜면에는 백매원(百梅園)이란 정원이 유명했다고 전한다.

 

정구(鄭逑) 선생(1543~1620)이 초당을 짓고 매화 100그루를 심은 후 현판을 백매헌으로 단 것에서 유래한다.

백매헌은 뒷날 제자들에 의해 제대로 규모를 갖추면서 회연서원이 되었다.

 

가까운 거리인지라 잠시 짬을 내어 마을 가듯 다녀왔다. 이왕이면 역사와 뼈대가 있는 매화를 보러 갈 일이다.

현재 상태는 수십 그루의 수십 년 안팎의 젊은 매화정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육백 년 묵은 고매(古梅) 100그루를

상상하면서 거닐 수 있었다. 인근에 있는 중매택(中梅宅)도 들렀다. 1903년 첫 주춧돌을 놓았다고 안내문은 설명했다.

 

종택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살림집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 이름 그대로 '마을 한가운데 있는 매화나무 집'

아니었다. 차라리 '마을 입구의 소나무 집'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집 안의 왜소한 매화 몇 그루보다는 담장 밖의 우람한 장송이 집의 품격을 몇 등급 더 올려놓은 까닭이다.

 

알고 보니 중매(中梅)는 그 집의 매화가 아니었다. 100여 년 전 이 집에 살았던 안주인의 친정마을 이름이다.

새댁은 칠곡 땅의 이씨 집안에서 이곳 정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625전쟁 이전에는 하회, 양동마을 못지않았다는

왜관 매원(梅院)은 원(ㆍ국립 여관)을 설치할 만큼 큰 마을이었다.

 

그래서 상매ㆍ중매ㆍ하매로 구역을 나누어 불렀다. 매원댁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중매댁임을 강조했다.

그 동네 자체가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이다. 그럼에도 명당 중의 명당인 화심(花心) 출신임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혈연과 지연에 대한 자부심이 어우러진 명문가의 별호인 셈이다.

 

본래 종갓집 이름은 바깥양반의 호를 따라 주변인에 의해 자연스럽게 불리다가 후대에 정식으로 공식화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이 집 주인장은 처음부터 매화네 집(중매택)이라고 명명했던 모양이다. 요즈음 대문에 부부 문패를 함께 걸어놓고 생색내는 수준의 남정네가 아니었다.

 

그 시절에 아예 안주인 이름을 대놓고 불러달라는 통 큰 '상남(上男)'이었다. 그런 배려심과 혜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정재철 가()라는 운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밋밋한 행정적 이름이 붙여져 있을 터이다.

 

글출처 - [원철 해인사 승가대학 교수] [매일경제 & 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