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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안동 퇴계종택 - 2 (2024. 04.)

 

 

 

 

 

 

 

 

안동 퇴계종택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268 (토계리)

문화재지정 : 경상북도 기념물 제42

 

 

종택이란 한 가문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 온 집을 말한다.

퇴계종택은 조선시대의 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가문의 종택으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 1541~1584)가 처음 지었다.

그러나 이안도가 지은 원래의 건물은 1907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가옥은 이황의 13대손 이충호(李忠鎬)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새로 지은 것이다.

퇴계종택은 정침, 정자, 사당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침 영역은 정침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자형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행랑채로 통하는 솟을 대문에는 이안도 부인 안동 권씨의 절개를 기리는

정려가 걸려 있다.

 

'퇴계선생구택'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대문을 지나면

정자 영역에 도달한다.

정자 영역에는 조선 시대의 문신 권두경(權斗經, 1654~1725)

숙종 41(1715)에 이황을 추모하여 지은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원래의 정자는 1896년 일제에 의하여 불탔고,

1926년에 400여 문중의 성금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수련생을 강의하거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글출처 - 노인장대/유영경의 빛그림세상

 

 

 

 

 

 

 

 

 

 

 

 

 

 

 

 

 

 

[안동 도산면 일대] 도산서원에 봄볕 내리면 정원 가득 매화꽃 피려나

 

 

도산서원은 퇴계가 학문과 저술,

그리고 후학 양성에 몰두한 곳이다.

안동시 도산면은 퇴계 이황 선생이 나고 배우고 가르치고

돌아가신 곳이다.

그런 만큼 도산면 일대에는 두루종택, 퇴계종택 등 고택과

선비문화수련원, 도산서원, 계상서당, 퇴계묘, 이육사문학관, 녀던길 등

퇴계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경하라'

일체경지(一體敬之)의 퇴계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들이다.

차로 움직이면 어디든 2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다.

 

 

퇴계, 매화에 빠지다

 

노송정종택(054-856-1052) 외에

퇴계와 관련해 꼭 알아둬야 할 고택이 두 개 더 있다.

두루종택과 퇴계종택이 바로 그곳.

 

퇴계로를 따라 도산면으로 오다 도산서원에 조금 못 미친

와룡면 태리에 진성이씨 두루종택(054-859-0697)이 있다.

주촌(周村)종택이라고도 한다.

진성이씨 대종택으로 입향조 이자수가 지었다.

당호인 慶流亭(경류정)은 퇴계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 집의 명물은 담장 밖의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

수령 550년 된 이 나무는 4세 이정이 정주판관으로

약산성 증축 공사를 마치고 귀향길에 가지고 와

심었다고 전한다.

 

 

 

 

 

 

 

 

 

 

 

 

 

 

 

 

퇴계종택 퇴계를 중시조로 한 종가로

 1715년 창설제 권두경이 퇴계의 높은 학덕을 추모해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을 건축하며 면모를 일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집은 1895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13세손 하정공이 재건했다.

추월한수정에 '道學淵源坊(도학연원방)'이란 편액이

이 집의 내력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곳이 도학의 본산'이란 뜻으로,

퇴계로부터 성리학이 새로 꽃피었음을 말해준다.

 

도산서원을 빼 놓고는 퇴계를 말할 수 없다.

국도35호선(퇴계로) 경사길을 따라 안막재에 이르면

그때부터 길은 좀 느긋해진다.

길 오른쪽으로 안동호 상류가 보일 즈음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까지 가는 평탄한 길은 눈이 쌓여

호젓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언덕 아래는 얼음장 밑으로 낙동강 물이 차분하게 흘러간다.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위패를 모신 곳이다.

 

도산서원은 엄밀하게 말해 도산서당과 구별해야 옳다.

퇴계 생존 시에는 공부하던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뿐이었다.

퇴계 사후 후진들이 도산서당의 위쪽 산을 깎아 선생을 모실 사당을 짓고

진도문, 전교당, 동재, 서재 등 강학공간과

제사공간, 인쇄원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등 부속건물을 갖추며

도산서원으로 개원했다.

 

도산서원 정원에

붉은 글씨의 '梅花園(매화원)' 표지석이 눈에 띈다.

퇴계와 매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매화시() 107수에 달할 정도로 퇴계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니!

퇴계의 매화 사랑에는 자연물 매화, 그 이상의 상징이 개입한다.

관기 두향과의 '러브 스토리'가 슬쩍 얹힌다.

조선 최고의 학자와 출중한 관기의 짧은(9개월) 열애와 갑작스런 이별.

두향은 퇴계에게 매화분을 마지막 선물로 줬다.

퇴계에게 매형(梅兄)은 두향의 등가물이었던 셈이다.

 

 

 

 

 

 

 

 

 

 

 

 

 

 

 

 

 

 

 

 

 

퇴계 14세손 이육사

 

도산서원을 나와 도산서당의 전신격인

계상(溪上)서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일체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는 51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계상서당을 세운다. 

이 때 앞에 흐르는 토계를 퇴계로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는다. 

계상서당은 퇴계의 본격적인 교육사업의 개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퇴계와 율곡 이이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 곳도 계상서당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계상서당과 거주처 한서암은 

2001년 퇴계 탄생 500주년에 복원됐다.

 

 

이제 퇴계묘로 향한다. 

퇴계종택에서 10여리 떨어진 하계마을 입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150m 올라간 곳에 있다. 

퇴계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지만 임금의 명령으로

결국 비석이 세워졌다. 

후손들은 유언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비석을 슬쩍 세웠다고 전한다.

 

비문은 매우 단촐하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사 묘'. 

퇴계묘 발 아래 며느리 봉화금씨가 안장돼 있는 게 이상하다.

 퇴계는 몸이 약한 며느리를 위해 한약을 지어주고

온천욕을 시켜주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다. 

이에 감복한 며느리가 죽어서라도 시아버지를 시봉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며느리뿐만 아니라, 아녀자와 하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퇴계의 남다른 관심과 애정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고갯길을 넘으면 이육사문학관이 나온다. 

이육사는 퇴계의 14세손이다. 

문학관은 이육사의 고향마을인 원천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졌다. 

교과서에서만 배운 이육사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이육사는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일본어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민족시인일 뿐만 아니라 기자, 독립운동가, 비평가 등

다방면에 걸쳐 빼어난 활약을 펼친 선각자이다. 

그의 딸 이옥비(78) 여사가 문학관에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여사는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 

"아버지 갔다 오겠다"고 말하던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녀던길에서 '물러남'을 묻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코스이자 백미인 '녀던길'로 달려간다. 

도산면 단천교(백운지교)에서 녀던길 걷기를 시작한다.

'녀던' '가던', '다니던'의 뜻이 담겨 있다. 

퇴계의 <도산십이곡>에 등장한다.

 

"고인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덜고"

 

퇴계는 청량산을 이상향으로 여겼다. 

어려서부터 낙동강변을 따라 청량산 자락까지 걸어가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퇴계는 노후에까지 이 길을 자주 오갔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길이다.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공부를 했다.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으니, 산길을 걷는 것조차 공부라는 뜻이다. 

이렇게 퇴계와 제자들이 걸었던 청량산까지의 길은 9.5 정도가 된다고 한다. 

현재 가장 일반적인 코스인

 '단천교~미천장담~경암~학소대~농암종택~월명담~고산'으로 이어지는 6

그 일부인 셈이다.

 

기자가 간 날은 전날 밤 눈이 많이 내린데다 일정이 빡빡해

아쉽게도 전 구간을 걸을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차량이 들어가던 청량산 전망대까지도 출입이 통제됐다. 

이 때문에 입구에 차량을 세워 놓고 40여분간 걸어서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어렵게 올라간 보상은 충분했다. 

눈이 온 뒤라 백색의 세계가 펼쳐졌고, 청량산 정상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낙동강 물소리는 이가 시리도록 청아했고, 

눈 덮인 녀던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굽이굽이 흘러갔다. 

절경이었다.

 

평생 140여 종에 걸쳐 관직을 임명받았으나 79회나 사퇴를 신청한 퇴계. 

그는 왜 그토록 물러남[退]에 천착했는지, 

그 깊은 뜻을 얼음 문 낙동강에 거듭 물으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글 출처 = 부산일보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