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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이야기 ■/에세이

과테말라에서 온 친구

   과테말라에서 온 친구

 

 

 지루한 장마 중에도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퇴근 무렵이 되자 족발에 생맥주 생각이 절로 났다.

오늘의 희생자를 물색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핸드폰이 알아서 먼저 울린다.

 “ 순길이니?  나 누군지 알겠어? ”

여자 목소리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소시적에 여자관계가 워낙 복잡했던 터라 얼른 집히질 않는다.

 “ 나 과테말라에 있는 00야!...... ”

아! 과테말라에 돈 벌러 간 내 국민학교 여자동창 00!

 

 20년 전에, 방직기능공으로 이름조차 생소한 외국으로 취업을 떠나서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는 공장장으로 승진하고 경영에까지 참여하고 있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친구인데 아직도 처녀이다.

 중학교 졸업 후 소식도 모르고 살았는데

4년 전에, 초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연락이 왔다.

 

 바람결에 30주년 행사 소식을 들었는데

자기는 참석 못하지만, 행사를 위해 기부금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안 입고, 시집조차 안가고 모은 돈을

그동안 무심했던 친구들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었다.

 성공적으로 행사가 끝난 후,

나는 친구에게 조그만 선물과 감사의 이메일을 보냈다. 자주 연락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러나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 봄에 고등학교의 중국동창회를 다녀오고 나서

이제부터라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연락을 시도했으나, 메일 주소가 남아 있질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 친구가 10년 만에 한국을 다니러 나온 것이다.

 

 언니집이 경기도 하남시라기에 미사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미사리 까페촌 - IMF 전에는 자고나면 까페가 하나씩 생기다가,그 후로는 썰렁했는데

이제 경기가 회복되려는지 주가도 1900을 찍고, 새로 신축한 지중해풍의 낮선 건물들이 비안개 자욱한 미사리에 하나 둘 네온을 켜기 시작한다.

 

 세월은, 여자골목대장 친구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흔적을 만들어 놓았고

친구는 내 흰머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내 기억속의 친구는 항상 그 때 그 모습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친구는 편하고 좋아 보였다.

우리 음식이 너무 맛있고, 초록빛 나무 색깔도 너무 이쁘고, 바람과 공기는 감미롭단다.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겁고 행복해한다.

 앞으로 영어를 좀 더 익혀서 미국 바이어를 상대로 멋진 비즈니스 한판하고

55살쯤에 시집을 가던지, 세계여행을 가던지 한단다.

 

 식사하고 커피 한잔 하고 일어서는데, 친구가 이미 계산을 끝내 놓았다.

2차로 내가 맥주 한잔 사겠다고 잡았더니

술 생각이 나면, 집에 가서 이쁜 마누라 엉덩이 두드리며 먹어라며 사양하고

택시 잡아타고 어둠 속으로 표표히 사라진다.

 

 밤안개 자욱한 강동대교를 넘어오는데,

강 건너 아파트숲은 꿈속에 빠진 듯 희미하고, 자동차 브레이크등 불빛만 길게 늘어섰다.

 모처럼,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20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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