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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건축 갤러리 ■/경 북

청도 적천사 -2 (2023.11.04.)

 

 

 

 

 

 

 

 

 

 

 

청도 적천사

磧川寺

 

 

시대 고대/삼국

건립시기 664

성격 사찰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리 981

요약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화악산(華岳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64(문무왕 4) 원효(元曉)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을 지음으로써 창건되었다.

828(흥덕왕 3)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했으며,

고승 혜철(惠哲)이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지눌(知訥)1175(명종 5)에 크게 중창했으며,

당시 참선하는 수행승이 언제나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눌의 중창 직전, 이 절에는 많은 도적떼가 살고 있었는데,

지눌이 가랑잎에 범 호() 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떼를 쫓아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당시의 산내 암자로는 도솔암(兜率庵은적암(隱蹟庵백련암(白蓮庵

옥련암(玉蓮庵)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고,

1664(현종 5) 왕의 하사금으로 중수하였는데, 이 때 사천왕상(四天王像)

조성하였다.

1694(숙종 20) 태허(泰虛)가 크게 중건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 절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자

관병들이 이 절의 누각과 요사채 등 일부 건물을 소각시켰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입구에 있는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서

조계문(曹溪門)을 지나면 중앙에 남향한 유형문화재 제473호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명부전(冥府殿)이 있으며,

대웅전 뒤쪽으로 좌우에 조사전(祖師殿)과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그 밖에 요사채와 부목방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432호 적천사 괘불탱(掛佛幀) 및 지주(支柱)가 대표적인데,

괘불탱은 1695(숙종 21)에 상린(尙鱗) · 해웅(海雄) 등이 그렸고

지주에는 1701(숙종 27)에 거사 경순(敬順) 등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그 외 천왕문에는 1690(숙종 16)에 만들어진

유형문화재 제153호 목조사천왕의좌상(木造四天王椅坐像),

무차루에는 1653년에 조각승 계찬(戒贊)이 만든 유형문화재 제528호 석조아미타불좌상,

대웅전에는 1636년 조각승 현진(玄眞)이 만든 유형문화재 제529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에는 1676년에 조각승 수일(守一)이 만든 유형문화재 제530호 석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등이 있다.

절앞에는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402호 은행나무가 있다.

 

참고문헌

명산고찰 따라(이고운·박설산, 신문출판사, 1987)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말& 여행] 경북 청도 적천사,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

 

 

적천사 은행나무

 

북소리와 같은 솔숲의 맥박과 함께 시원과 같은 하늘이 열린다.

거기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한 그루는 암나무, 또 한 그루는 수나무다.

수나무의 수령은 5백여 년, 암나무의 수령은 800년에서 1천년으로 추정된다.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육신이 경이롭다.

수형은 곧고 반듯하며 큰 상흔이 없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넓고 깊은 그늘을 드리워 이끼에 뒤덮인 줄기가 서늘히 검다.

그들은 스스로 오래된 사원이며 신이고 경전이다.

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은행나무 유전자에 새겨진 시공은 몇 억년을 거슬러 오른다.

그들은 35천만 년 전 고생대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빙하기가 닥치면 생명체들은 멸종되거나 환경에 맞게 진화를 거듭한다.

그러나 반복된 빙하기에도 은행나무는 멸종하지 않았다.

고대의 화석에서 발견되는 잎의 형태는 현재의 것과 다르지 않다.

진화하지 않고 살아남은 까닭에 은행나무는 1 1 1 1종의 식물분류 계통을

유지하고 있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 했다.

우주의 순환이 저 나무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의 가지를 뻗어 어루만진다.

그 아래로 적천사(碩川寺) 천왕문의 검박한 얼굴이 보인다.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64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고

통일신라 문무왕 3년인 828년 심지왕사가 고쳐 세웠으며

도선의 스승인 고승 혜철이 수행한 곳으로 이름 나 있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적천사를 크게 중창했는데

그때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현재의 적천사 은행나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은행나무 앞에 1694년에 이를 기록한 비석

'축보조국사수식은행수게(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偈)'

세워져 있다.

 

 

 

 

 

 

 

 

 

 

 

 

 

 

 

 

 

 

 

 

 

 

 

 

 

 

 

 

 

 

 

 

 

 

 

 

 

 

 

 

 

적천사

 

 

돌계단 위 단청 없는 천왕문의 맨얼굴 너머로 배롱나무 꽃들이 붉다.

천왕문에는 숙종 16년인 1690년에 제작된 목조 사천왕상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1981년에 천왕문을 보수했는데 사천왕상 안에서

사리 3(), 경전 80여 판(), 장삼 두루마기 등의 의류 23, 다라니경판 찍은 것 등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복장기에 의해 적천사 사천왕상의 조성 연대가 밝혀졌으며

거기에는 700여 명의 승려와 400여 명의 신도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시 계단을 올라 배롱나무의 정원을 지나면

축선에서 살짝 비껴 오르는 돌계단 위에 무차루(無遮樓) 누각이 높다.

누하를 지나면 이끼로 촉촉한 돌계단 위로 대웅전이 천천히 일어선다.

그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명부전(冥府殿)이 있고

대웅전 뒤쪽으로 좌우에 조사전(祖師殿)과 영산전(靈山殿)이 자리한다.

명부전 지붕 위로 잘 생긴 소나무가 안마당을 들여다본다.

 

원효대사가 처음 적천사를 창건했을 때는 토굴의 형태였다고 한다.

심지왕사를 거쳐 이름난 사찰로 거듭났지만

지눌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 적천사는 도적떼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지눌스님은 가랑잎에 범 호() 자를 쓰고는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떼를 쫓아냈고

새로이 중창된 적천사에는 참선하는 수행승이 오백 명 넘었고

도솔암(兜率庵), 은적암(隱蹟庵), 백련암(白蓮庵), 옥련암(玉蓮庵) 등의

산내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적천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숙종 20년인 1694년 태허(泰虛)스님이 크게 중건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제 적막 속에 음성 경쾌한 스님과 인사를 나눈다.

적묵당 뒤로 보살님이 총총히 사라진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맞배지붕에 다포 양식 건물이다.

가운데 공포 사이 평방 위에 부처님들이 좌선해 계신다.

적천사 대웅전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집합 장소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대웅전은 불태워졌고 산내 암자였던 옥련암을 옮겨와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투박한 돌기둥 두 쌍은 탱화를 걸기 위한 괘불대 지주다.

'적천사 괘불탱 및 지주'는 보물 제1432호로 지정돼 있다.

괘불탱에는 숙종 21년인 1695년에

상린(尙鱗), 해웅(海雄), 지영(智英), 성종(聖宗), 상명(尙明) 등이 그렸다는 화기가 남아 있고,

지주에는 숙종 27년인 1701년에 거사 경순(敬順) 등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돌 지주가 비바람 맞으며 버텨온 세월이 300년 넘는다.

 

보살님이 총총히 다가와 이끌며 초 하나를 쥐어 주신다.

십이지신 모양의 제법 정교한 초들이 잔뜩 쌓여 있다.

대웅전 앞에 초 하나를 켠다.

또 보살님은 무차루의 문을 열어 주신다.

무차루도 일제 강점기 대웅전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1993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어두운 누마루가 시원하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대웅전이 환하다.

작은 여닫이 문 너머로 천왕문 지붕위로 솟은 은행나무와 시선을 마주한다.

문 위에는 일각스님의 시 '적천사'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푸른 봉우리 안/ 우거진 나무 그림자 가려/ 창엔 떠오른 달'이라는 구절을

자꾸만 되뇐다.

무차루는 '막힘이 없다'는 뜻이고,

대웅전 앞에는 초 하나가 소리도 없이 제 몸을 태우고 있다.

(이상, 글출처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