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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26. 봉화 충재고택 청암정-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26. 봉화 충재고택과 청암정

 

           -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

 

 

 

 지난 추석 명절에, 케이블 방송 채널T의 <한국의 종가>라는 프로그램에서 경북 봉화의 충재고택과 청암정을 소개했었다. 충재고택의 차종손이 직접 출연하여 집안을 소개하고, 종손으로서의 자긍심과 더불어, 유물과 고택의 관리와 전통의 계승에는 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른다는 고충도 함께 토로했었다. 명절 때마다 TV에 단골로 올라오는 종가순례 특집 프로그램이었지만, 평소 접근이 힘든 사당채와 새로 지은 충재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 선생이, 조선의 8대 길지이자, 영남지방의 4대 길지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 하회마을) 중 하나라고 극찬한 봉화읍 유곡리酉谷里(닭실마을)는  500년을 이어온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유곡酉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풍수사상과 관련이 있다.  천상의 새(금닭)가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주변지세에서 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고, 조선 중종 때의 선비, 충재沖齋 권벌 선생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100여 호가 함께 모여 살고 있다.

 

 봉화읍 삼계리 사거리에서 울진 방향으로 직진하여 영동선 철도 밑을 통과하자마자 좌측으로 유곡교를 건너면 왼쪽으로부터 닭실마을이 시작된다. 마을 입구에는 전통한과 전시장이 있는데, 문중의 제사상에 올리는 한과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닭실마을의 전통한과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36번 국도에서 본 닭실마을 전경  (2012. 10. 07.)

 

 

 

 

 

 동네 앞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신탄新灘이라는 개울이 있고, 개울 건너 안산 자락의 석천계곡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고, 그 아래 계곡의 입구에는 삼계서원三鷄書院이 있다. 이 삼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앞장서서 반대했다가, 제일 먼저 본보기로 철폐를 당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서원인데, 충재沖齋 권벌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다.

 

 충재선생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중종임금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중종 15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이곳 봉화의 닭실마을로 낙향하여 14년 세월동안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중종 28년에 복직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하여 다시 파직되고, 56세에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압록강 끝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는 험난한 시기를 살면서도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가 사화에 휘말렸고, 을사사화 때는 위정자의 실정을 비판하고 무고하게 귀양 간 대신들을 구명하려다가 또 다시 화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선조임금 때 누명을 벗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하읍의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석천 계곡 (2004. 10. 23.)

 

삼계서원

 

석천정사 (2004. 10. 23.)

 

 

 

  

 

 삼계서원에서 내성천의 지류, 가계천을 따라서 석천계곡을 20분쯤 올라가면 닭실마을의 입구를 알리는 '청하동천靑霞洞川’이라고 초서로 쓴 큰 바위가 나온다. ‘경치가 아름다워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충재 선생의 후손이 붉은 글씨로 바위에 새겼다 한다.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에 도깨비들이 자주 출몰하자, 도깨비들을 쫒기 위하여 썼다는 설과 무속인들이 계곡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을의 경계를 강조하는 의미로 썼다는 설이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석천계곡은 문수산을 분수령으로 흘러내리는 창평천과 닭실마을 뒤에서 오는 동막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계곡으로, 닭실마을의 대문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정리해 두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이 석천계곡길이 닭실마을의 유일한 주진입로였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마을 앞으로 영동선 철도가 부설되어 마을의 입구가 잘렸고, 지금은 마을 옆으로 36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유곡교 쪽의 길을 모두 이용하고, 마을사람들도 이 계곡 길을 사용하진 않지만, 닭실마을의 진면목을 보려면 이 석천계곡 길을 반드시 걸어서 마을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1시간 정도 걸어서 왕복해야 하니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석천정사에서 담장너머로 하얀 바위 위를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휘감아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선택을 결코 후회는 하지 않게 된다.

 

 

 

 

 

석천정사 - 1 (2012. 10. 07.)

 

 

석천정사 - 2 (2012. 10. 07.)

 

 

석천정사 - 3 (2012. 10. 07.)  - 오른쪽 하단이 요즘도 식수로 사용하는 석천石泉이다

 

 

석천 계곡 (2012. 10. 07.)

 

 

 

 

 석천계곡 물가의 암반위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려서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는, 충재 선생의 아들 청암 권동보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정자라고는 하지만 전체 34칸의 큰 규모의 건물로서, 학문과 수양의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암 선생은 부친이 삭주로 귀양 가서 사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세월을 학문을 벗하며 살았는데, 선조 때 부친의 무죄가 밝혀지고 군수로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자연으로 돌아와 이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지었다.

 

 석천정사 뒤편에는 석천石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는 신기한 샘물인데, 이 석천의 물처럼 차거나 모자람 없이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정자의 이름도 석천정사石泉精舍로 지었다 한다.

 

 석천정사에서 마을로 향하는 호젓한 소나무 숲길에는 청암 선생의 '제석천정사' 와 충재 선생의 ‘삭주영회’ 시비詩碑가 있어, 그 뜻을 음미하며 한가로이 거닐다 보면 어느듯, 소나무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신탄천新灘川을 만나고, 황금빛 들판 뒤로 길게 펼쳐진 닭실마을과 마주하게 된다.

 

 

 

 

닭실마을 전경-1 (2012. 10. 07.)  - 가운데 봉우리가 백설령이고 그 아래 집이 충재고택이다

 

닭실마을 전경- 2 (2012. 10. 07.)

 

 

 

 

 

 닭실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충재고택은,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곡에 은거하던 시절에 지금의 종가집과 청암정靑巖亭을 아들과 함께 건축하였다.

 충재종택은 특이하게 생긴 대문(월문月門) 안쪽으로, 넓다란 바깥마당과 'ㅁ'자형의 본채 및 사당채로 이루어져있다. 종택은 신축한 후 3번의 개축이 있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약 60년 전에 33칸의 몸채만으로 축소하여 고쳐 지어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안채와 사당채는 외부인에게 개방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대문에서부터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워 놓고 종택의 접근을 일절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사랑채 앞에 짚으로 꼬아 만든 여막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집안의 초상 때문인 것도 같은데, 몰지각한 관광객들로 인해서 평소의 고충은 이해가 가지만, 한마디의 설명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대목이다.

 

 담장 쪽에 있었던 행랑채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충재유물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2005년에 방문했을 무렵에는, 유물관이 집 안의 본채와 청암정 사이 지점에 언밸런스하게 솟아 있었는데, 2007년도에 청암정 옆쪽의 집 밖으로 이전하여 ‘충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콘크리트 건물로 다시 지었다.

 조상이 남긴 유물이 '문중의 가보이기도 하겠지만 국가의 보물'이라는 큰 의미에서 볼 때 아주 잘 된 일이다. 소유와 관리의 문제가 간단치 않겠지만, 그것도 유물을 남긴 충재선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렵기만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대의와 명분을 인생의 지표로 삼았던 선비들의 삶 속에 분명히 그 답이 있다고 본다. 아울러,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의 서애유물관도 이전을 위한 노력이 진지하게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청암정과 충재고택 전경 (2005. 10. 02.)   -   집 가운데 부분에 이전하기 전 옛날의 유물관이 보인다.

 

                      충재고택 대문 - 월문 (2005. 10. 02.)

 

 

충재고택 몸채 전경 (2005. 10. 02.)

 

 

 충재고택 전경 (2012. 10. 07.)

 

2007년에 새로 지은 충재 박물관 (2012. 10. 07.)

 

 

 

 

 본채의 좌측으로 야트막한 담장너머 청암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독립된 별도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이

정원은 사랑마당에서 작은 쪽문을 통해 진입하게 되는데, 입구의 좌측에는 충재沖齋가 있고, 정면에는 청암정으로 건너가기 위해 연못 위에 걸쳐 놓은 단아한 돌다리가 있다.

 

 충재沖齋는 권벌 선생이 서재로 지은 아주 단촐한 규모의 건물인데, 사색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로서의 절제되고 소박한 품성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서재로 지은 충재와  뒤쪽의 청암정 (2012. 10. 07.)

 

  청암정에서 본 충재 (2012. 10. 07.)

 

 

 

 

 청암정靑巖亭의 구조는, 6칸 넓이의 누마루에 2칸 넓이의 긴 마루방을 붙인 건물구성으로 이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丁’자 모양의 정자인데, 거북이 모양의 큰 바위위에 건물을 앉힌 독특한 배치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구암정龜巖井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누마루 안쪽의 마루방은 양측에 퇴를 설치하고 3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멋을 부렸는데, 처음에는 온돌방구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고승이 지나가다가 정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거북이 등에서 불을 때면 되겠느냐?”고 충고를 한 후, 마루방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그럴듯한 일화가 전해져 오기도 한다.

 

 조선의 명필 미수 허목 선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마치 물 흐르듯이 흘려 쓴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는 현판은 정자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고, 정자에서 내다보는 산수와 석계계곡의 풍광은, 이곳이 민간 유적으로는 유일하게 사적과 명승 제3호로 지정된 이유를 짐작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암정 - 1 (2012. 10. 07.)

 

 

                청암정 - 2 (2012. 10. 07.)

 

 

청암정 - 3 (2012. 10. 07.)

 

 청암정 - 4 (2012. 10. 07.)

  

 청암정 - 5 (2012. 10. 07.)

 

 

 

 

 

 주변에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숱한 글 중에, 조경학적인 관점에서 본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별원에는 본시부터 거북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암반이 있었는데 청암정은 바로 이 암반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하니 청암정은 거북이 등에 지은 집인 것이다. 이 정자는 기단을 생략한 채 거북바위 위에 높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건물을 놓은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청암정이 세워진 거북바위 둘레에는 인공적으로 둥그런 형태의 못을 조성해 놓았다. 이 못의 크기는 장축이 약 28M이고 단축이 27M인데 거북바위를 따라 둥그렇게 조성되어 있다. 거북이는 물이 있어야 생명을 보전할 수 있으니 바위 주변에 물을 도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물은 집 앞을 흐르는 신탄의 개울물을 수로를 통해서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인데 이 못으로 인해서 거북바위는 하나의 섬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물을 끌어들여 정원을 조성하는 경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청암정 정원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발상을 통해 이루어진 독특한 인공세계였던 것이다. 이렇듯 청암정 정원은 자연을 기반으로 하여 그 위에 인공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청암정이 아름다운 것은 청암정의 건축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청암정을 짓도록 유도한 거북바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말이다. 그만치 거북바위는 상징적인 경관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거북바위로 건너가기 위해 설치한 석교의 경관성도 특별하다. 간결하면서도 제 기능은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조형물인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거나 지금의 석교보다도 규모를 크게 했거나 장식을 가미했다고 하면 청암정은 그 당당함을 잃었을 것이고 거북바위하고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겉돌았을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그야말로 멋진 작품이 바로 이곳에 있는 석교인 것이다.

청암정에 오르는 석계는 또한 어떠한가. 자연암반을 다듬어서 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못 주변을 돌아가면서 쌓아놓은 석축은 또 어떠한가. 이 모두가 자신은 낮추면서 청암정을 빛내기 위한 것들이니 진정 주연과 조연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생의 조화를 필요로 하는 것인 모양이다.

청암정과 주변의 하나하나의 조형물들을 보면 예학자들의 군더더기 없고 품격 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있으면서도 없는듯하고, 없으나 곧 채워질 것만 같은 여유로움은 바로 지조와 절개가 있으며 사는 모습이 아름다운 그들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청암정 뒤 바위틈에는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단풍나무와 철쭉이 있어 정자와 거북바위와 더불어 상생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있고, 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있어 물 위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못의 외곽부에 자리한 느티나무, 참나무, 소나무들은 이제 고목이 되어 청암정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 출처 : 홍광표 - 동국대학교 조경학 교수)

 

 

 

 

 청암정 - 6 (2012. 10. 07.)

 

청암정 - 7 (2012. 10. 07.)

 

 

청암정 - 8 (2012. 10. 07.)

 

 

 

                      청암정 - 9 (2012. 10. 07.)

  

 

 

 

 

 

 

 청암정은 해마다 특히 단풍철이면 사진작가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다. 수백 년 된 고목과 푸른 이끼 낀 바위와 정자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청하동천靑霞洞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도 순서를 기다려서 차례로 찍어야한다. 심지어 집주인이 손님을 모시고 정자에 올랐다가 사진작가들의 숱한 원성을 감당하지 못해, 앉아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내려오며 불평하던 것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었다.

 주객전도가 이쯤이면, 단풍이 한창인 가을의 주말에는 청암정에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맞다. 그래서 나는, 올해는 미리 조금 일찍 방문하여 여유 있게 둘러보고 왔다. 석천계곡과 청암정의 단풍이 붉게 불탈 때보다, 물들기 시작할 때의 그 파장과 설레임도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청암정 - 10 (2004. 10. 23.)

 

청암정 - 11 (2004. 10. 23.)

 

청암정 - 12 (2004. 10. 23.)

 

 

                  청암정 - 13 (2004. 10. 23.)

 

 청암정 - 14 (2004. 10. 23.)

 

 

 

 

 

 근래에는 청암정이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드라마 ‘동이’, ‘선덕여왕’, ‘바람의 화원’에 등장 했고, 영화 ‘음란서생’에도 출연했다. 요즘, 멋스럽고 운치 있는 한옥과 정자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서,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과 청암정이 쌍벽을 이루며 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와 드라마의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청암정의 주무대는, 연못의 조그만 돌다리이다. 정자는 조연이고 돌다리가 주인공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런 기교와 장식도 없는  단순한 형태로서, 다리로서의 최소한의 기능만 담당하는 이 돌다리의 매력은 무엇일까? 

 통로도 좁고  안전을 위한 난간마저도 배려하지 않은 이 돌다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의 다리로 대접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세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는 단순함이다. 요새말로 하면 쿨 하다는 표현과도 일맥 상통할 수 있을 것이다. 뒷말이 필요 없는 단순명료함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통하는 공통의 디자인 언어인 것이다. 장식을 위한 장식이 범람하고 있는 요즘 새태에 꼭 필요한 충고일 것이다.

 

 두 번째는 자연스러움이다. 연못과 정자를 짓기 전에도 그기에 있었을 것 같은 편안함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자기의 모습을 뽐내지 않는 겸손함이다. 4대강에 다리(보)를 놓는 일처럼 과시적이고 무모한 발상이 아니었기에, 돌다리는 500년을 버텨 왔고 또 500년 이상을 버틸 것이다.

 

 세 번째는 절제와 소통이다. 다리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동적인 공간이다. 아울러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인간세상에서 신선의 세계로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돌다리의 폭을 한사람 만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히고 난간도 없애서, 알맞은 긴장감과 겸양심을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리의 본래 역할은 소통이다. 따라서 돌다리의 중간에는 사람이 비켜설 수 있는 여유공간을 만들고, 보호자가 손을 잡아서 노약자들을 배려할 수 있도록 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적절한 절제와 함께 소통이 우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을 한 신윤복(문근영)

                                     - 물 속의 그림자는  여자로 나온다 (사진출처: http://www.dcinside.com )

 

 

충재와 청암정을 이어주는 돌다리

 

 

 

 

 

 

 

 몇 해 전에 일본학자 미야지마 히로시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사대부 가문을 소개한 <양반>이라는 책을 냈는데, 제일 앞장에 소개된 가문이 바로 안동 권씨, 그 중에서도 충재선생 집안이었다 한다. 그 닭실 권씨의 시조, 충재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한참 후에, 청암정을 방문한 퇴계 이황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다.

 

 

          酉谷先公卜宅寬, 충재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

          雲山回復水灣環,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이 없었네

          更憐巖穴矮松在,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激勵風霜老勢盤, 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네

 

 

 

 

 

 

                                                                                                                                           20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