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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전통건축 이야기

주거건축-025. 나주 홍기응 가옥 - 대문을 열고 산다

 

 

 

 

 

 

 

 

 

 

         25. 나주 홍기응 가옥

         

          - 대문을 열고 산다 -

 

 

 

‘나주평야에 흉년이 들면 전국이 굶는다’는 말이 있었다. 영산강이 만들어낸 호남의 기름진 평야는 예로부터 전국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창으로 여겨져 왔고, 나주평야를 품에 안은 나주시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 지방의  중심적인 역사도시로서, '전라도'의 어원이 전주와 나주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어질 정도로 호남의 대표적인 고을이었다. 

 나주시의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영산강이 목포 앞바다로 흘러가면서 나주평야를 펼쳐 놓았고, 시가지의 북쪽을 둘러싼 금성산의 모양이 서울의 북한산과 비슷하고 영산강을 끼고 있는 지세가, 한강과 비슷하다 하여 ‘작은 서울(소한양)‘로 불리기도 했었다.

 광주에서 1번 국도로 나주를 향해 달려서 영산강을 넘어서면 남평이 나온다. 남평에서 전라남도 농업진흥원을 지나, 다도면의 산림연구원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으로 풍산리 도래마을이 나타난다. 나주평야에 접해서 풍악산의 낮은 기슭에 자리 잡은 도래마을은 남양 홍씨南陽 洪氏 1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다.

 

 도래마을이라는 마을이름을 얻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도리道理를 숭상하며 어질고 예의 바른 이가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도례道禮마을로도 불렸고, 마을 뒷산, 감태봉으로부터 내려온 맑은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도래마을을 통과하여 농경지로 유입되는데, 수맥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내 ‘천川’자 모양을 만드는 까닭에 도천道川마을이라고도 불렸다. 도천의 ‘천川’의 우리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도내가 발음상 도래로 굳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도래마을 전경 - 1 (2012. 09.)

 

도래마을 전경 - 2 (2012. 09.)

 

도래마을 전경 - 3 (2012. 09.)

 

 

 

 

 

 

 도래마을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원래 고려시대에 남평 문씨가 터를 잡고, 이후 조선 초기에 강화 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성천부사를 지낸 홍수 선생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란을 일으키자, 아버지가 남평현령을 지낸 인연이 있는 이곳, 나주로 낙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안면 반송마을에 터를 잡았으나 홍수 선생의 증손인 홍한의 선생이 이웃인 다도면 도래마을의 강화 최씨에게 장가들어 정착함으로써 도래마을이 점차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홍한의 선생이 도래마을에 사냥 왔다가 최씨 처녀를 처음 만나서 인연을 맺게 되면서, 도래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 한다.

 

 도래마을 출신 유명 인사로는 벽초 홍명희 선생이 있다. 이 마을 출신인 홍명희 선생의 조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충북 괴산에 있는 집안으로 양자를 갔는데, 조선총독부 시절 중추원찬의 벼슬을 지낸 일로 집안내력에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홍명희 선생의 부친 홍범식 선생은 경술국치 때 일제에 자결로서 항거한 조선의 기개 높은 선비였다. 홍명희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민중의 계급의식을 주제로 한 역사소설 <임꺽정>을 썼다.

 

 

 

 

 

 

계은정에서 본 도래마을과 나주평야 (2012. 09.)

 

 

1. 도래마을 입구                                                      2. 계은정

3. 양벽정                                                                4. 영호정 

 

 

 

 

 도래마을에는 마을 어귀의 양벽정과 영호정을 비롯하여 계은정, 서벽당, 귀래당 등의 문중 정자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주거 문화재로는 홍기응 가옥을 비롯하여 홍기헌, 홍기창 가옥과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선정한 시민문화유산 제2호인 ‘나주도래마을옛집’이 있다. 시민문화유산은 국가에서 미처 지정하지 못한 비지정 문화재를 직접 보전하려는 민간단체의 운동이다.

 

“시민문화유산 2호인 도래마을 옛집은 전형적인 한국 전통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남 나주 도래한옥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근대 가옥입니다. 재)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들의 기부와 후원금으로 2006년 매입하여 안채, 문간채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별당채는 신축해 2009년 3월에 개소식을 갖고 문화유산일상관리, 한옥숙박체험 및 교육문화프로그램, 후원회원모집 등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래마을옛집은 전통가옥의 국가지정 문화재들 사이에 있고 19세기 후반의 근대가옥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어 시민문화유산으로서 보전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가옥에서 볼 수 있는 사랑채를 따로 두지 않고 안채와 함께 있는 복합구조이며, 사용공간에 따라 칸살이를 자유롭게 배열한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부엌에는 붙박이장을 달아 식기수납을 할 수 있게 했고, 정지방은 전면이 아닌 뒷면으로 이동시켜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 ( 자료 : 도래마을 옛집 홈페이지 http://www.ntdorae.com )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전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하여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으로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추진하고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서울의 성북동 ‘최순우 옛집(시민문화유산 제1호)’에 갔다가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선진문화사회 구현을 위한 아주 바람직한 시민운동으로서, 국가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민간단체 차원에서 보존과 관리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

 

 

 

 

 

 

 

1. 홍기종 가옥                                                         2. 홍기헌 가옥

3. 홍기창 가옥                                                         4. 도래마을 옛집

 

계은정에서 본 홍기응 가옥  (2006. 05.)

 

 

 

 

 

 ‘도래마을 옛집’의 건너편, 마을의 골목길이 끝나는 오른쪽 깊숙한 곳에, 남도지방 양반주택의 공간구성을 잘 보여주는 ‘홍기응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종가집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실제 종가집이었던 뒷집은 철거되고 현재 빈터로만 남아 있고, 이웃에는 집안인 홍기헌 가옥과 안채만 남아 있는 홍기창 가옥이 있다.

 

 홍기응 가옥의 전체적인 구성은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의 건립 시기는, 안채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조선 말기, 고종 29년(189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는 안채가 완성된 후 약 10 년 뒤에 들어섰고, 대문간채와 사당은 그보다 더 나중에 지었다고 한다.

 

 

 

 

 

 

홍기응 가옥의 주진입부 (2012. 09.)

 

홍기응 가옥 외부전경 (2012. 09.)

 

도래마을 옛집에서 본 홍기응 가옥 (2012. 09.)

 

 

 

 

 

 전체 건물의 배치는 서향을 기본으로 하였다. 집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一자형 안채가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 사랑채가 안채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축은 맞추면서 향은 직각으로 틀어서 남향으로 앉혔다.

 집의 입구에는 一자형 대문간채를 두었고, 행랑이 끝나는 곳에서 높은 담장을 이어서 집 주위 전체를 감쌌다. 대문과 행랑채 앞에 직각으로 자리 잡은 사랑채도 별도의 담장을 둘렀다. 그래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담장과 곧장 마주치게 되는데, 그 공간이 좁고, 좀 답답한 느낌을 준다. 안채에 바로 이르지 못하도록 동선과 시각적인 면을 고려했겠지만, 그다지 넓지 않은 대지에, 사랑채를 별도 구획하는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후대에 담장이 추가되지 않았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

 

 

 

 

 

 

문간채와 사랑채   (2006. 05.)

 

 

사랑채 -1  (2006. 05.)

 

사랑채 - 2  (2006. 05.)

 

문간채와 행랑마당 (2012. 09.)

 

사랑채 - 3  (2006. 05.)

 

 

 

 

 

 

 행랑마당과 사랑마당은 담장에 조그만 중문을 만들어서 왕래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사랑채 뒤쪽 부분은 담장을 중간에 끊어서, 사랑채가 바로 안마당에 노출되는 독특한 공간 배치를 취하고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이며, 긴 변이 남향으로, 짧은 변이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쪽으로부터 누마루와 2칸의 사랑방과 부엌이 있고, 직각으로 꺾어져서 남쪽으로 대청과 사랑방이 있다. 남향한 큰사랑 부분에는 한 칸 반의 누마루방을 두었고, 서향한 작은사랑에는 한 칸의 마루를 두어서 사용자의 위계상 차이를 두었다.

 

 

 

 

 

 

사랑채와 안채 (2012. 09.)

 

안마당  (2006. 05.)

 

 

 

 

 

 

 

 대문에서 안채에 이르기 전, 사랑채 건너편에, 별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단지, 그 빈터엔 잘 가꾸어진 정원수만이 별당을 대신하고 있다. 사라진 별당은 집안이 어렵던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매각되었다고 하는데, 대략 6칸 규모로서 대문에서 안채에 이르는 중간영역으로서의, 전체의 구성과 동선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차후에 언젠가는 복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물이다.

 

 안채는 一자형으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북쪽으로부터 부엌방, 부엌, 큰방, 2칸의 대청과 작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중 1칸은 안대청과 바깥대청으로 구분되어 있고, 툇마루의 경계에 문짝이 달려있다. 그리고 부엌이 안채 끝에 있지 않고 부엌방 다음, 두 번 째 칸에 자리 잡은 점도 이 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안 채 - 1  (2006. 05.)

 

 

안 채 - 2 (2006. 05.)

 

 안 채 - 3 .  좌측 상단이 별당 터이다 (2006. 05.)

 

 

 

 

 

 안채 우측편의 사당은 별도의 담장을 둘러서 안채와 비슷하게 서향으로 배치하였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곳간채를 남쪽으로 향하여 직각으로 앉혔다.

 안채의 부엌 뒤에는 사각형의 장독대가 있는데, 경사진 부분에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고 낮은 담장을 둘렀다. 장독대에 별도의 담장을 설치하는 것은 이 지방 특유의 관습으로 보인다.

 

 

 

 

 

안채와 곳간채  (2006. 05.)

 

사당채 (2012. 09.)

 

장독대 (2012. 09.)

 

 

 

 

 

 사랑마당에는 넓진 않지만 신경을 써서 조성한 정원이 있다. 남쪽 담장 밑으로 괴석槐石을 세우고 매화, 석류, 자목련, 백일홍, 모과나무 등을 심었고, 사랑채 기단 앞에도 파초, 감나무, 비자나무, 모과나무 등을 심었고, 사당 앞에는 은행나무와 자두나무, 살구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봉숭아와 맨드라미, 난초 등의 화초류가 담장 밑과 별당 터에 소담스럽게 식재되어 있다.

 

 

 

 

 

 정 원 - 1 (2006. 05.)

 

정 원 - 2 (2006. 05.)

 

 

 

 

 

 내가 홍기응 가옥을 2006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마침 봄이었는데, 안채로 진입하는 마당에는 불두화와 철쭉 그리고 야생화가 한창이었었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으로 다듬지 않은,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멋이 나는, 그래서 한옥과 어울려 고졸한 느낌마저 드는 이 집의 정원은, 요즘 우리 주변의 잔디정원에 식상한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온갖 기묘한 형태와 값 비싼 정원수로 치장한 국적불명의 오늘날 정원은, 일순간 우리의 눈을 현혹하지만 이내 자연생태계와의 부조화와 비인간적인 스케일로 인해서 인간에게 안식보다는 스트레스를 안겨 줄 수도 있다.

 겨울 오면 잎이 지고, 봄에는 씨를 뿌릴 줄 아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지혜롭게 활용할 줄 아는 우리의 전통조경이야말로 훨씬 정겹고 세련되고 우리의 정서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도래마을의 가을 - 1  (2012. 09.)

 

 

도래마을의 가을 - 2  (2012. 09.)

 

 

도래마을의 가을 - 3  (2012. 09.)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뒷산의 이름이 식산食山인데, 조선의 모든 군사가 사흘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식산 기슭에 남양 홍씨 문중의 정자인 계은정이 있다. 계은정은 마을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도 자연적인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짓고, 무한한 자연의 공간으로 정신세계의 함양과 일탈을 꿈꿨던 선비들의 쉼터였다.

 멀리 나주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송림저수지가 바다처럼 누워있다. 그 뒤로 개발이 한창인 광주.전남 혁신도시의 타워크레인도 군데군데 아련히 보인다.

 최근에는 경관 좋은 이 식산에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주말마다 몰려들어, 수 백 년 전통의 도래마을 하늘과 나주평야를 형형색색으로 수를 놓는다고 한다.

 

 

 

 

 

홍기응 가옥 담장너머로 본 계은정  (2006. 05.)

 

계은정 (2012. 09.)

 

 

 

 

 

 홍기응 가옥에는 현재, 홍기응 씨는 오래전에 작고하고, 아들인 홍갑석 씨가 살고 있다. 가족들이 없다보니, 안채는 비워두고 사랑채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계은정까지 친절하게 안내도 해 주셨던 홍갑석 씨의 말씀에 의하면, 이 집에는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3가지 큰 특징이 있는데, 그 첫째는, 곳간채에 있는 지하 저장고이다.

 곳간채에는 음식물과 종자를 서늘하게 보관하는 지하 저장고가 있다. 이제는 가정마다 필수품이 된 요즘의 김치냉장고의 원조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내밀한 공간이다.

 

 둘째는, 사랑채 담장에 뚫어 놓은 조그만 구멍이다. 대문과 연결되는 사랑채 담장에, 수키와 2개를 사용해서 동그란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외부인을 사랑마루에서 지켜 볼 수 있도록 감시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다. 요즘의 현관 비디오폰이나 보안경에 해당하는 편의시설이다. 사랑채를 담장으로 둘렀으니 프라이버시는 아주 좋아졌지만, 눈과 귀가 어두워진 것을 보완하려는 이 집만의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인 것이다.

 

 셋째는, 이 집의 대문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솟을대문의 문짝에, 집주인의 높은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양쪽으로 여는 대문의 문짝에는 길다란 널판지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수평가구재가 서너 줄 돌출되어 설치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미관 및 방범상의 이유로 이 수평가구재가 집 안쪽으로 오도록 대문을 다는데, 이 집에서는 일부러 수평가구재가 집밖으로 나가도록 설치했다.

그 이유가, 주변의 배고프고 어려운 이웃들이, 밤에 대문을 타고 넘어오기 쉽도록 배려함이라 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내가 홍갑성 씨로부터 직접 듣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솟을대문 .  문짝의 3줄 수평가구재가 집 밖으로 나와 있다. (2006. 05.)

 

          사랑채 담장.  좌측 상단에 조그만 구멍이 보인다  (2006. 05.)

 

 

 

 

 

 

 

 도래마을의 답사를 마치고 인근 덕동마을의 홍기종 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0호)을 들러서, 집으로 돌아오는 영산강변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낮에 계은정에서 본 송림저수지는 은빛 물결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는데, 석양의 영산강은 노란 금빛으로 온 세상을 넉넉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 홍기응 가옥에서 다시금 떠올리게 된 그 화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로마 천 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다고 한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그렇다.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 (명문가 이야기 - 조용헌. 푸른역사)

 

 

 주거건축-002 구례 운조루(나누며 산다) 편에서 인용했던 글이다. 다시 봐도 그 의미가 각별하다.

구례 운조루에서 시작된 타인능해 정신이, 요요정의 전설을 간직한 남원 몽심재를 거쳐서 나주의 도래마을까지, 전남지방의 삼각벨트를 이루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 철학은 면면히 이어졌던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오늘을 사는 소시민인 나로서는,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도둑까지 배려했던 선조들의 그 높은 정신세계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고, 그 끝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2012. 09. 추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