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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야기 ■/현대건축 이야기

건축기행-01 국립 진주박물관 - 김수근 (2011.03.)

 

건축물소개

 

 

연도 : 1979

위치 : 위치 : 경남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 169-17

대지면적 : 17,930.66㎡

건축면적 : 2,727.29㎡

연면적 : 4,948.78㎡

층수 : 1B 2F

구조 : 철근 콘크리트

 

 진주 남강변의 진주성 경내에 위치한 이 박물관의 계획에는 주어진 진주성의 경관을 파괴하지 않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주변 경관보다 낮게 보이도록 규모를 낮추고, 기본적 처리에 필요한 조형도 하나의 지붕에 의해 느껴지는 거대한 스케일감을 피하도록 분절하였으며, 주변과의 조화를 도모하도록 접지되는 부분에 대하여는 진주석을 주재료로 하여 건물 자체가 하나의 조경요소로 느껴지도록 처리하였다. 내부동선은 관람객을 두 홀에서 2층으로 유입시킨 후 1층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설계자 소개

 

 

  김수근 Kim Swoo Geun (1931~1986)

 

 

 공간그룹의 설립자이자 공간지의 창간인인 건축가 김수근은 1931년 청진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타개했다.

그는 55년 동안 200여개 이상의 뛰어난 건축물을 국내외에 설계해서,

김중업과 함께 한국현대건축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건축가로 인정받고 있다.

「공간사옥」(1978), 「마산양덕성당」(1979), 「진주박물관」(1986), 「올림픽주경기장」(1987)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건축작품들은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한국건축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

대지와 공간, 조형을 구축함에 있어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김수근은 건축활동 외에도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지인 월간 「空間 SPACE」를 1966년에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펴내면서 한국문화를 기록하고 전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간사랑(1979)과 공간화랑(1972)을 통해 한국의 문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건축가로서 뿐만 아니라 건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장르를 통합하려한 한국의 대표적 문화운동가로 기록되고 있다.

(글 자료-홈페이지)

 

 

 

 

 

 

 

 

 

 

 

 

 

 

 

 

 

 

국립진주박물관

Jinju National Museum, 國立晉州博物館

 

<왜구로부터 이 땅을 지킨 짙푸른 기개를 만나다>

 

 

소재지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 35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격전지였던 진주성 품 안에 자리하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진주 남강을 바라보며 진주의 상징인 촉석루를 지나 영남 포정사 언덕을 넘으면 자연 속에 어우러진 박물관의 기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으로 가려면 꼭 진주성의 여러 문화유적을 거쳐야 하므로 아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진주 역사 여행을 할 수 있다.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

 

박물관은 진주성의 경관을 파괴하지 않는 세심한 배려 속에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주변 경관보다 낮으면서도, 석탑의 형상으로 되어 있어 경건함이 묻어난다. 겨울철 나뭇가지가 모두 떨어지고 건물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 참모습을 볼 수 있다.

1500평 규모에 지상 2, 지하 1층으로 된 박물관은 상설전시실인 '임진왜란실''역사문화실', '두암실', '야외 전시실'이 있다. 1984년 개관 이후 가야 지역의 역사 유물을 전시했으나, 1998년에 국립박물관 중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임진왜란, 7년의 아픈 역사를 기록

 

조금 어두운 편인 실내로 들어가면 2'임진왜란실'에서부터 관람이 시작된다. 임진왜란은 1592(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은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실은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과 조선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전쟁 중 사용된 무기와 일본군의 전략 및 점령 정책을 전시해두었다. 이어 우리 의병의 활약상과 수군의 승리, 명나라 군대의 참전 내용과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연승하며 종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과 당시 사용한 거북선 모형,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집필한 수기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조선과 일본군이 임진왜란에서 사용했던 무기와 갑옷도 비교해볼 수 있다. 조선이 화살과 총통을 주로 사용했다면 일본군은 칼과 조총을 사용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에 대해 알지 못하던 조선의 군사는 그 위력에 놀라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코 영수증'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 정책' 코너에 전시된 '코 영수증'은 무엇일까?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의 소장품으로, 발행일은 1597101일이다. 이는 김제 지방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의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영수증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하들의 전투를 독려하려고 조선인의 코를 베게 했다. 조선인을 죽인 후 이를 증명하기 위해 코를 상납한 부하들은 이러한 코 영수증 받아 또 다른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벤 코를 2000개씩 상자에 담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하는데, 잔인한 과거의 흔적에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한다.

현재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근처에는 귀무덤이 있다. 이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126000여 명 조선인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곳이다.

 

 

흉배 속 동물을 보고 품계와 문무관 구분하기

 

'권응수 영정'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흉배에 대해 공부해보자. 흉배는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의 관복 가슴과 등에 달았던 장식물을 말한다. 권응수 영정은 임진왜란 후 1604년 권응수가 선무공신(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권율 등 무신에게 준 훈의 이름)으로 임명되었을 때 하사한 영정이다. 영정을 살펴보면 흉배에 호랑이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무신을 상징한다.

네모난 흉배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품계와 문신, 무신을 구별할 수 있다. 1품 이상의 대군은 기린, 왕자는 사자를 닮은 백택, 문관은 지혜를 상징하는 공작, 무관은 범과 표범을 수놓았고, 2품 문관은 구름과 기러기를 수놓았다.

 

 

왜구를 벌벌 떨게 한 거북선

 

"거북선이다!"라는 아이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가벼운 나무로 만들어 기동력을 높인 판옥선에 왜군이 기어 올라와 칼과 조총으로 우리 군을 제압하자, 이를 보완해 만든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장 갑판을 떼어내고 둥근 판자를 덮고 배 앞부분에 용 모양의 머리를 달았다. 크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개판 위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칼과 송곳을 꽂았고, 용의 입에서는 대포나 유황불을 뿜을 수 있게 해놨다. 전후좌우에는 총통을 장착해 강력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역사문화실'로 자리를 옮기면,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보물 1호로 꼽는 수레바퀴 모양 토기가 눈에 띈다. 사람이나 특정 사물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토기를 '상형토기'라고 한다. 상형토기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집, , 짚신, 말을 탄 사람, 동물, 뿔잔, 수레바퀴 등 여러 가지를 본떠 만들었다.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에 부착된 수레바퀴는 함께 묻혔던 사람의 영혼을 저승 세계로 운반하는 '수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나치기 쉬운 '두암실'도 꼭 들러보자. 경남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였던 고() 두암(斗庵) 김용두 선생이 기증한 100여 점의 문화재를 전시한 곳인데, 아름다운 서화가 많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호남성 동정호 아래 여덟 군데 절경을 그린 그림이다. 일찍이 문인들 사이에 회자된 이 그림은 시대가 지나면서 관념산수의 대표적인 예로 인식되었다. 하루 중에서는 저녁때나 밤이 주로 표현되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는데 그 단서를 직접 찾아보자.

 

 

진주성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해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1379) 진주 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해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왜구를 물리친 것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촉석루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이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1618)에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506·25전쟁 때 또다시 불타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한 것이다.

 

의암은 경상남도 기념물 235호로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상 글 출처 : 박물관 여행 | 저자 길지혜 | cp명 어바웃어북)

 

 

 

 

 

 

 

 

 

 

 

 

 

 

 

 

 

 

 

 

 

 

 

 

 

 

 

 

 

 

 

 

 

 

 

 

 

 

 

 

 

 

 

 

 

 

 

 

 

 

 

 

 

 

 

 

 

 

 

 

 

 

 

 

 

 

 

 

 

 

 

 

 

 

 

 

 

 

 

 

 

 

 

 

 

 

 

 

 

 

 

 

 

 

 

구 진주역, 국립진주박물관 이전

 

 

경남 진주시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옛 진주역 철도부지 재생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옛 진주역 철도부지 재생 프로젝트 중 복합문화공원은 진주철도 역사전시관, 생태공원, 키즈파크(미니트레인), 월전시관 등으로 구성되며, 문화거리는 옛 진주역부터 남강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우선 도로로 거리전시회, 예술인의 거리, 카페거리로 조성된다.

 

특히 진주역 철도부지 14중 약 6를 차지하는 국립진주박물관 이전 건립은 재생 프로젝트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 박물관으로 임진왜란관, 어린이박물관, 체험관, 시민광장, 도시숲 등으로 조성되며 부대시설로 작은 도서관, 주차장, 회전 교차로가 들어선다.

이를 위해 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지난 63일 업무협약(MOU)를 맺고 이전 건립을 위한 예산확보를 위하여 조규일 진주시장이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과 함께 기획재정부를 방문해 옛 진주역 재생 프로젝트 설명과 국립진주박물관 이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박물관 이전 건립 기본계획 수립 용역비 3억원이 정부 예산편성에 반영됐다.

 

아울러 진주시와 국립박물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이 신속히 진행될 수 있도록 실시설계비 확보를 위해 박대출 국회의원과 김재경 국회의원을 차례로 방문해 옛 진주역 철도부지 재생 프로젝트 설명과 국립진주 박물관 이전 건립의 실시설계비 예산 18억원 증액을 건의했다. 이어 지역의 두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내년도 예산으로 18억 원 증액된 21억 원을 확보하게 됐다. 또한 진주시도 내년도 예산 200억 원을 편성해 옛 진주역 복합문화공원 조성을 시작한다

한편 시는 옛 진주역 일원의 철도부지 재생 프로젝트사업, 원더풀 남강 프로젝트,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더불어 시민이 행복하고 골고루 잘사는 부강 진주 건설을 견인하는 성장 동력이 되어 진주가 누구나 찾고 머무르고 싶은 역사문화 관광도시로 발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